진정한 이열치열의 여름
다시금 폭염이 시작됐다. 며칠 전, 3개의 태풍이 동시에 우리나라를 향해 북상하고 있다는 기사를 분명히 보았는데, 하늘은 거짓말처럼 티 없이 맑기만 했다. 저번 주부터 몸 상태가 꾸준히 나빠지고 있어서 그런지 점점 달아오르는 날씨를 견뎌내는 게 쉽지 않았다. 그저 숨 막히는 열기를 견디기만 하면 되는 날보다 마음 같지 않은 몸 상태 때문에 잔뜩 표정을 찡그린 채 땀을 흘리며 괴로워하는 날이 더 많았다. 여름의 잔인한 횡포로부터 도망갈 곳이 없었다. 아직 한 달은 더 꼼짝없이 이 맹렬한 더위와 함께해야 할 것을 생각하면 정말 눈앞이 캄캄했다.
매주 한 번은 꼭 들렀던 마트에도 발길을 끊었다. 여름이 깊어질수록 마트 안팎의 온도 차가 너무 심해지는 게 문제였다. 밖은 너무 덥고, 안은 너무 추워서 고작 10여 분만 돌아다녀도 퍽 지치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고, 물건에 제대로 집중할 수가 없었다. 마트에 한 번 다녀오면 한없이 지쳐 한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쓰러져 있기 일쑤였다. 덕분에 종일 집에만 있는 날이 많아졌고,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은 비슷비슷한 하루가 이어졌다.
하지만 지난주, 강물처럼 세차게 쏟아진 시원한 빗줄기 덕분에 초여름부터 숨 막히게 달아올랐던 뜨거운 대지의 열기가 한결 사그라들었다. 한낮엔 여전히 무더웠고, 뉴스에선 연일 절망적인 폭염 전망을 전해왔지만, 저녁에 불어오는 바람 온도가 분명히 달라졌다. 늦은 밤 가볍게 몸을 씻고 가만히 누워 눈을 감고 있으면, 창밖에서 은근히 서늘한 기운의 바람이 희미하게 불어왔다. 습기가 적은 가벼운 밤공기가 방 안 가득 차오르면, 그것만으로도 조금은 위로가 됐다. 먹먹하게 조용한 새벽의 어둠 속에서 미약한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면, 힘든 여름을 이겨낼 용기가 마음 한구석에 싹트는 것 같았다.
그렇게 7월도 어느새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이번 주도 점심이 되면 어김없이 시원한 팥빙수를 즐기고 있었는데, 더운 날씨에 매번 직접 연유를 만들려니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었다. 이 때문에 그냥 시판 연유를 하나 구매하려 했는데, 몇 개월째 냉장고 한편을 떡하니 차지하고 있던 캔 연유가 눈에 들어왔다. 몇 개월 전 둘세 데 레체를 만들겠다며 호기롭게 구매한 캔 연유. 이런저런 이유로 계획을 미뤄왔더니 얼마 전 유통기한도 지나버렸다. 이 더운 여름에 둘세 데 레체를 직접 만든다는 건 분명 미친 짓이겠지만, 멀쩡한 연유를 내버려 두고 새 연유를 구매하는 것도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다.
둘세 데 레체는 남미권에서 아주 큰 사랑을 받는 캐러멜 잼이다. 보통 연유를 재료로 만드는데, 그냥 밀봉된 캔 채로 뜨거운 물에 넣고 3~4시간쯤 끓여내면 갈색빛의 캐러멜 잼이 된다. 물론, 만드는 건 간단하지만, 뜨거운 물에 넣어 끓이든 오븐에 넣어 끓이든 최소 3시간 이상 고열로 가열해야 하므로 여름에 할만한 짓은 아니었다. 이 때문에 웬만하면 다음을 기약하려 했는데, 아쉬운 마음에 이리저리 정보를 찾다가 우연히 우리의 친구 전자레인지를 이용한 방법을 찾게 되었다. 그리하여 오늘은 둘세 데 레체 마들렌을 만들어 보았다.
하얗고 매끈한 연유를 전자레인지로 짧게 끊어가며 돌린다. 연유가 갈색빛으로 변하고 표면이 살짝 푸석해지면, 아이고 망했구나 싶지만, 잘 섞은 뒤 핸드 블렌더로 곱게 갈아내면 멀쩡한 둘세 데 레체가 완성된다. 물론, 말은 쉽지만 역시 여름에 추천하고 싶은 작업은 아니다. 둘세 데 레체는 간단하게 표현하면 진한 밀크캐러멜을 그대로 녹여 놓은 것 같은 맛이다. 처음에 너무 되직하게 완성되어 연유와 우유로 농도를 조절해서 그런지, 예상보다 단맛이 강하지 않았고 부드러우면서도 농밀한 단맛이 아주 은은하게 퍼졌다. 워낙 매력적인 맛이라 오늘은 별다른 재료를 섞지 않고 마들렌 반죽에 둘세 데 레체만 잔뜩 넣으려 했는데, 제법 진하게 농축된 만큼 먹을수록 은근히 느끼한 맛이 남아서 레몬 제스트를 조금 더해 다소 느끼한 맛만 살짝 잡아주기로 했다.
완성된 마들렌은 사뭇 평범했다. 얼핏 느끼기엔 일반적인 레몬 마들렌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 바탕에 은은한 우유 향이 정말 살포시 퍼졌다. 혀에서 직관적으로 느껴지는 게 아니라, 마들렌을 먹다 보면 어느새 콧속에 연한 우유 향이 가득 퍼져 있었다. 마치 남미에서 만든 허니 레몬 마들렌을 먹는 기분이랄까. 분명 평범한데, 평범해서 좋았다. 자극적인 것도 좋지만, 역시 질리지 않는 건 평범한 매력일지도 모르겠다.
여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