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위커드 마들렌

새콤하지만 농밀하고, 진득하지만 무겁지 않은 맛

by 거울새

감기에 걸렸다.


오뉴월 감기는 개도 안 걸린다는데, 나는 개가 아니었고 결국 감기에 걸렸다. 처음엔 한낮의 맹렬한 열기가 식지 않아 그저 몸이 조금 뜨거운 줄만 알았다. 하지만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기운이 빠지면서 입맛도 없어지고 좀처럼 몸을 제대로 가누기가 힘들더니, 본격적으로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보통 여름 감기는 실내외의 급격한 온도 변화가 원인이라는데, 종일 집에만 있고 에어컨은커녕 선풍기도 쐬지 않는 사람이 도대체 어디서 급격한 온도 변화를 느낀 걸까. 혹시 밤에 좀 서늘해서 숨통이 트인다 했더니, 그걸 온도차라 느낀 걸까. 지금도 매우 의문이다.


그나마 본격적인 감기 증상이 시작된 후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해서 한낮의 뜨거운 열기는 피할 수 있었지만, 기침이나 콧물 대신 소화기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면서 상황은 점점 더 악화했다. 좀처럼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데 매일 해가 지면 열이 끓어오르니, 회복은 고사하고 하루하루 버텨내는 것도 무척 힘겨웠다. 흰쌀죽은 도저히 먹기가 싫어서 조금 더 구수한 누룽지를 끓여 먹었다. 하지만 아주 얇게 입안 전체를 덴 듯 꺼끌꺼끌하면서도 서걱거리는 느낌이 드는 데다 입안 여기저기가 잔뜩 헐어있다 보니 솔직히 어서 삼키고 눕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어째 먹어서 얻는 에너지보다 먹는 데 쓰는 에너지가 더 큰 것 같았지만, 그래도 참고 먹었다.


그렇게 생각지도 않았던 여름 방학을 보냈다.


보름이 넘는 시간 동안 어느새 비는 그쳤고, 뉴스에선 다시 폭염을 예고하기 시작했다. 아직 몸 상태가 온전히 회복되진 않았지만, 이대로 있으면 이번 여름은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다행스러웠던 건 가만히 누워서 땅굴만 파고 있진 않았다는 것. 몇 가지 새로운 마들렌에 대한 생각을 정리했고, 필요한 재료나 레시피도 얼추 정리가 되어있었다.


다시 오븐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번 주에 선택한 재료는 바로 그린 키위다. 사실 요즘에 골드 키위를 열심히 먹고 있어서 당연히 이번 주엔 골드 키위를 쓸려고 했는데, 얼마 전 부쩍 가격이 오른 골드 키위 사이에 유난히 저렴한 녀석이 있다며 신나서 주문한 게 바로 그린 키위였다. 골드 키위를 기다렸는데, 땡땡하게 덜 익은 푸릇푸릇한 그린 키위를 배송받았을 때의 기분이란. 몇 번이나 주문창을 다시 확인했지만, 그린 키위를 시킨 게 맞았다. 분명 골드 키위를 검색했는데, 왜 그린 키위가 섞여 있었던 걸까. 세상은 음모로 가득 차있다.


덕분에 원래 계획했던 키위 잼 대신 키위커드를 떠올리게 되었다. 과일커드는 영국식 스프레드의 일종이다. 보통 산미가 강한 과일에 달걀노른자와 버터를 더해 만들며, 새콤하면서도 부드럽고 농밀한 맛을 느낄 수 있다. 새콤한 맛이 강한 그린 키위는 키위 잼을 만들어 필링으로 사용하는 것보다 키위커드를 만들어 크리미 하면서도 상큼한 풍미를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게 좀 더 매력적일 것이다.


반죽에는 깻잎 가루를 넣었다. 처음엔 피스타치오 페이스트의 고소한 풍미와 상큼한 키위커드의 조화를 떠올렸지만, 이미 고소하면서도 진한 질감의 키위커드에 더 진득한 고소함이 더해지면 자칫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조금 더 산뜻하지만, 은은한 풍미로 키위커드를 감싸 안아 줄 만한 재료가 필요했다. 마치 깻잎 같은. 깻잎은 디저트에 자주 사용하는 재료는 아니지만, 다소 강한 풍미가 마들렌 반죽과 어우러졌을 때, 마치 쑥처럼 향긋하고 고소한 풍미를 자아낼 수 있고, 은근히 화한 풀 향이 그린 키위에 감도는 은근한 풀 향과 좋은 조화를 이룰 수 있었다. 거기에 레몬 제스트를 소량 더하면 상큼하지만 진득하고, 고소하지만 너무 무겁지 않은 푸릇푸릇한 마들렌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랜만에 구워낸 마들렌은 은은한 깻잎 향을 퐁퐁 뿜어내며, 퐁실하고 귀엽게 부풀어 올랐다. 키위커드를 가득 채워 넣은 오동통한 마들렌은 입을 벌리기만 해도 입천장을 통해 콧속으로 깻잎 향이 은근히 배어들었다. 키위커드는 전란을 사용해서 그런지 생각보다 새콤한 맛이 아주 쨍하게 느껴져서 마들렌과 함께 먹어도 그 존재감이 대단했다. 하지만 이내 다시 부드럽고 향긋한 깻잎 향이 입안에 잔잔하게 남아서 고소한 여운을 충분히 즐길 수 있었다.


조금 새콤해도 은은한 고소함을 함께 즐길 수 있었던 키위커드 마들렌처럼 남은 여름도 조금 무덥지만, 그럭저럭 버틸만한 날씨가 이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남은 여름을 그저 무탈하게 지낼 수 있기만을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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