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와 함께 맞이한 늦여름의 맛
요즘엔 외출을 거의 하지 않고 집에 누워만 있으니, 아무래도 계절에 대한 감흥이 거의 없다. 그저 더위가 조금이나마 가시길 바라며 비 예보를 기다릴 뿐이다. 하지만, 지난 1주일 동안 벌써 4번이나 비 예보만 있고 결국 비는 한 방울도 내리지 않았다. 이번 주말에는 전국적으로 소나기가 내린다는데, 과연 비가 내릴까. 며칠 전에도 비슷한 뉴스를 보았던 걸로 미루어볼 때, 어쩌면 우리 집은 내가 모르는 새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로 분류되기 시작했는지도 모르겠다.
오후에는 볼 일이 있어서 잠깐 외출하셨던 어머니가 포도를 사 오셨다. 지나가다 마트에서 할인 행사를 하길래 사 오셨다며, 오랜만에 포도나 먹자고 하셨다. 아닌 게 아니라 작년엔 샤인머스캣을 워낙 열심히 먹어서 여름내 포도를 먹었던 것 같은데, 올해는 이게 무려 첫 번째 포도였다. 어머니께서는 요새 워낙 마트를 안 가서 마들렌 만들 재료나 있냐며 포도로 마들렌을 만들어 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하셨다. 물론, 포도는 수분이 워낙 많아서 마들렌 재료로 사용하기에 적합한 재료는 아니었지만, 수박과 멜론으로도 마들렌을 만들었는데 포도가 안 될 이유는 전혀 없었다. 마침, 너무나 무료하고 지치는 마음이었기에 좋은 도전 과제를 맞이했다는 기분이 들었다.
분명 어디선가 껍질째 먹는 포도로 샐러드를 만들 때 견과류를 잘게 다져서 뿌리고 치즈 덩어리를 여기저기 올려 먹는 걸 본 적이 있었는데, 그런 조합을 이용하면 어떨까.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리를 굴리며 인터넷을 돌아다니다가 마침 포도와 치즈 그리고 피스타치오를 이용한 전채 요리 사진을 발견할 수 있었다. 포도 알맹이를 치즈로 감싼 뒤 겉에 잘게 다진 피스타치오를 묻혀서 만든 한 입 거리 요리였다. 포도 알갱이를 그대로 살려 마들렌에 넣기는 힘들겠지만, 포도의 풍미를 담은 마들렌을 만들고 표면을 치즈로 한 겹 덮은 뒤 잘게 다진 피스타치오를 묻힌다면 상당히 독특한 마들렌이 탄생할 것 같았다. 그렇게 포도 피스타치즈 마들렌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우선 반죽에 진한 포도 페이스트를 섞기 위해 포도 껍질을 벗겨내고 씨를 빼냈다. 포도 껍질에는 과육보다 훨씬 더 많은 아로마 성분이 농축되어 있으므로 버리지 않고 최대한 말려 주었고, 전자레인지에서 포도 과육의 수분을 충분히 날린 뒤 함께 갈아주었다. 피스타치오는 얇은 갈색 속껍질까지 모두 제거해서 좀 더 깔끔한 맛을 느낄 수 있도록 준비했고, 강한 존재감의 염소 치즈에 그릭 요거트를 섞어 치즈 크림을 완성했다. 사실 치즈 크림과 피스타치오로 마들렌 전체를 덮을지, 반만 덮을지가 가장 큰 고민이었는데, 확실하게 맛을 비교해 보기 위해, 둘 다 만들어 보기로 했다.
그렇게 완성된 두 가지 포도 피스타치즈 마들렌. 당연하게도 온몸을 피스타치오로 감싼 녀석이 폭력적인 외형으로 훨씬 더 눈길을 끌었지만, 배꼽 부분에만 피스타치오를 묻힌 녀석도 마치 제복을 입은 듯 제법 단정하고 깔끔해서 볼수록 빠져드는 기분이 들었다. 맛에서는 어머니와 나 모두 배꼽 부분에만 피스타치오를 묻힌 녀석을 선택했다. 마들렌 전체를 피스타치오로 감싼 녀석은 역시나 피스타치오의 풍미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강했다. 은은한 포도의 풍미를 느낄 수 없는 건 아니었지만, 피스타치오의 양이 압도적으로 많다 보니 지배적인 맛은 피스타치오에 가까웠고, 치즈의 존재감도 아주 흐릿했다. 다만, 생각보다 퍽퍽함이 심하진 않았고, 오독오독한 피스타치오의 고소한 풍미가 워낙 매력적이라 따로 준비한 포도 생과와 함께 먹는다면 충분히 추천할 만한 맛이었다. 반면 배꼽 부분에만 피스타치오를 묻힌 녀석은 나름 포도의 선명한 존재감을 느낄 수 있었고, 은근히 얼굴을 들이미는 치즈 크림의 존재도 확실히 인지할 수 있었다. 그 와중에 피스타치오가 연신 씹히면서 고소한 풍미와 바삭한 식감을 선사하니 훨씬 균형감 있는 맛이 느껴졌다. 다정한 늦여름의 맛이었다.
다음 주엔 무려 5일이나 비가 예보되어 있는데, 과연 며칠이나 비가 올까. 한 가지 확실한 건 포도와 함께 드디어 늦여름이 찾아왔다는 사실이다. 오독오독 씹히는 피스타치오의 고소함 사이로 언뜻언뜻 존재감을 드러내는 포도의 풍미를 느끼면서 부디 얼마 남지 않은 여름이 좀 더 부지런히 발길을 재촉하길 바라며, 다음 주엔 시원스레 비가 오길 기도했다. 특히나 요즘 강릉에 가뭄이 너무 심해서 모두가 힘든 상황이라는데, 한여름의 더위가 잊힐 만큼 상쾌한 비가 온 세상을 적셔주었으면 좋겠다.
비구름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