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는 게 답일 때도 있다.
무언가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을 때, 묵묵히 해야 할 일을 해 나가는 것, 그것은 직접적으로 문제를 해결해 주진 못해도, 문제 해결을 위한 단초 마련에 도움을 준다. 하지만, 그게 항상 옳은 건 아니다. 삶엔 절대적인 진리가 없기 때문이다. 결국, 가끔은 그저 쉬는 게 답일 때도 있다.
오랜만에 로컬푸드 매장에 방문했다가 ‘다래’를 발견했다. 안 그래도 몇 해 전부터 관심이 갔는데, 올해는 유독 눈에 많이 띄어서 어떤 맛일지 퍽 궁금하던 차였다. 상태가 묘하게 거칠었지만, 로컬푸드 매장에선 한번 놓치면 다시 만나지 못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주저 없이 한 팩 집어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다래는 며칠간 후숙을 해야 했지만, 이번 주 마들렌 재료로 충분히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처음에 뭣도 모르고 다래를 냉장고에 넣었다가 꺼낸 탓인지 후숙은 생각보다 아주 더디게 진행되었고, 그사이 내 몸 상태에는 묘하게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초조한 마음이 들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멈춰야 했다. 사실 이미 내 몸은 선을 조금 넘어있었다. 결코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1주일에 한 번은 꼭 포스팅하자는 결심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나는 기어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결국 한밤중 무리를 해서 마들렌 반죽을 완성했고, 다음 날 아침부터 몸을 제대로 가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열이 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며칠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덕분에 다래는 더없이 잘 익었다. 문제는 내가 생각했던 다래와 실제 다래의 맛이 사뭇 달랐다는 것이다. 분명 키위였지만, 키위가 아니었다. 좀 더 새콤하고 선명한 산미를 상상했던 나는 실제 다래의 섬세한 달콤함을 맛보고 쓸데없는 짓을 했음을 깨달았다. 정확한 맛도 모르면서 무슨 자신감에 마들렌 반죽부터 만들었을까. 이성을 잠깐 잃었던 건가. 후회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우습게도 난 또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했다.
계획만 좀 수정하면 늦게라도 다래 마들렌을 포스팅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한눈에 보기에도 빠듯한 계획을 세우고 서둘렀다. 하지만, 마음이 급하니 자잘한 실수가 이어졌다. 아직 몸 상태가 온전하지 않았기에 다시 조금씩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새로운 크림을 만들겠다고 허둥대다가 아까운 재료만 낭비했다. 그제야 현실이 눈에 들어왔다.
‘아, 지금 무리하고 있구나.’ 순간 정신이 들었다.
처음 맛본 다래는 너무나 매력적인 과일이었다. 지금도 충분히 멋진 마들렌을 만들어 낼 수 있었지만, 억지로 끼워 맞춘 듯 어중간한 다래 마들렌을 완성하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다래는 포기하기로 했다. 그렇게 하루 더 멍하니 누워서 쉬다가 냉장고에 넣어둔 마들렌 반죽이 떠올랐다. 며칠 지나긴 했어도, 그냥 버리긴 아깝고… 그렇다고 그대로 완성하기도 애매한 상태의 반죽. 초콜릿에 햇생강을 다져 넣어 알싸한 맛을 살린 마들렌이었다. 순간 몇 가지 새로운 아이디어가 머릿속을 스쳤지만, 무시하기로 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또 욕심을 내면 그건 바보다. 이미 충분히 진한 풍미가 담겨있었다. 굳이 새로운 무언가를 더할 이유도 없었다. 그래도 그냥 굽긴 좀 허전한 것 같아 호두를 다져 올리기로 했다. 대신 그냥 호두는 너무 밋밋하니까, 다래처럼 조금 더 산뜻한 맛을 살리면서 독특한 풍미를 느낄 수 있도록 유자청을 넣어 캐러멜 화했다.
나흘이나 냉장고에 덩그러니 놓여있었던 마들렌 반죽. 흔히 마들렌 반죽은 24시간 이상 숙성하면 팽창력이 나빠진다고 하지만, 홈베이커들에겐 크게 유의미한 수준이 아니다. 결국 오랫동안 반죽을 보관하면 안 되는 이유는 팽창력 감소 때문이 아니라, 신선도 문제에 있다. 생강을 잔뜩 다져 넣어서 그런지 다행히 초콜릿 반죽은 아주 말짱했고, 보란 듯이 퐁실하게 부풀어 올랐다.
외면받았던 마들렌은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오븐을 열자마자 느껴지는 신선한 생강 향이 기분 좋게 입맛을 자극했다. 선명한 생강이 웃으며 마중 나와 초콜릿으로 나를 이끌었고, 어느새 하나가 되어 오묘하게 퍼져나갔다. 선명하진 않았지만 은은한 유자 향이 자칫 무거울 수 있는 풍미를 슬쩍 밀어 올렸고, 군데군데 씹히는 호두가 기분 좋게 오독거렸다.
꾸준한 것만큼 중요한 건 내 속도를 지키는 일이다. 과속해서 달려가면 좀 더 빨리 갈 수 있겠지만, 결국 멀리 가진 못한다. 느리더라도 내 속도로 꾸준히 가는 것, 그것이 중요하다. 균형을 잃지 말자. 얼마 남지 않은 올해를 어떻게 보내야 할지 조금은 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