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절기를 이겨내는 힘
하루가 다르게 추워지고 있다.
며칠 전에는 오랜만에 마트를 가기 위해 밖을 나섰다가 생각보다 싸늘한 한낮의 날씨에 깜짝 놀랐다. 아직 가을옷을 몇 번 입지도 못했는데, 이제 두툼한 파카를 꺼내 들 날이 얼마 남지 않아 보인다.
몸은 빠르게 추워지는 날씨에 여전히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 날이 추워져서 그런지 여기저기 자꾸만 염증이 생긴다. 자다가 잠에서 깨는 일이 잦아서 잠을 자도 잔 것 같지가 않다. 낮에는 멍하니 있다가 꾸벅꾸벅 조는 일이 많아졌다. 가만히 있어도 몸이 우왕좌왕하는 게 느껴진다. 다시 매일 조금씩이라도 걷고, 점점 늦어지고 있던 취침 시간도 당기고, 무탈하게 겨울로 넘어가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애쓰고 있지만, 역시 마음처럼 쉽게 넘어가긴 힘든 모양이다. 이런 때일수록 마음을 가다듬는 게 중요하다. 외줄을 타듯 위태로운 마음이 언제든지 폭발할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괜찮아. 다 괜찮을 거야. 잘 지나갈 거야.
마트에는 햇생강이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 집은 보통 생강 철이 되면, 햇생강을 사서 껍질을 까고 손질한 뒤 잔뜩 얼려놓고 1년 동안 조금씩 소비한다. 햇생강은 향이 강하고 생강 특유의 알싸한 맛이 잘 살아있다. 요즘은 다른 계절에도 쉽게 생강을 구할 수 있지만, 역시 제철 햇생강만큼의 맛은 느낄 수 없다. 얼려둔 생강은 대다수가 요리에 사용되기 때문에, 냉동하여 보관해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고로 지금 이 시기에 사둔 생강이 앞으로 1년 동안 우리 집의 생강 생활을 좌우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올해는 유독 타이밍이 중요했다. 어머니도 나도 몸 상태가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생강은 원래도 쉽게 썩는데, 햇생강은 수분이 더 많은 편이라 냉장고에 내버려 두면 금세 썩고 만다. 가격이 저렴하다고 한 번에 너무 많이 사도 손질할 수 있는 양에 한계가 있으니 분명 문제가 생길 터였다. 그래서 기회가 될 때마다 각 마트의 생강 가격 추이를 살피며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다 얼마 전 꽤 저렴한 가격에 판매하는 햇생강을 마주해서 얼른 한 아름 구매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그 말인, 즉 우리 집에 오랜만에 얼지 않은 생생강이 존재한다는 이야기였다.
그렇다면 역시?
마들렌을 만들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게 오늘은 단호박 생강 마들렌을 만들어 보았다.
생강 하면 떠오르는 전형적인 맛 조합이 몇 가지 있었지만, 오늘은 조금 색다른 조합을 찾아보고 싶었다. 너무 튀지 않으면서, 가을에 걸맞은 맛. 지금이 아니라면 조금 아쉬울 만한 맛. 단호박은 어떨까. 사실 가을이 되고 묵묵히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재료 중 하나가 바로 단호박이었다. 아마 폭주하는 보늬밤 조림 시리즈가 아니었다면 이미 단호박 마들렌을 한 번은 만들었을 거다. 하지만, 단호박도 전형적인 모습으로 만들 생각은 없었다. 그렇다면 역시 생강과 함께 호흡을 맞춰봐도 좋겠다 싶었다.
단호박은 물성의 장점을 그대로 살려서 필링을 만들기로 했다. 흔한 펌킨 스파이스 조합도 좋지만, 이번 마들렌에서 향신료는 생강만으로 충분했다. 대신 생크림을 섞어서 너무 퍽퍽하지 않도록 농도를 조절하고 흑당 캐러멜을 더해 진한 맛을 강화했다. 반죽은 생강의 영역이다. 맛과 향이 절정에 이른 생강을 그대로 잘게 다져서 반죽에 섞어줬다. 다만, 매운맛이 너무 튀지 않도록 꿀에 살짝 절여서 사용했다. 고소한 맛과 약간의 식감을 더하기 위해 호두도 잘게 다져 넣었다. 더 필요한 게 있나? 상큼함? 전반적인 맛이 너무 묵직해진 느낌이 들어서 반죽에 레몬 제스트로 화사한 향을 더하고, 건 체리를 잘게 다져 단호박 필링에 섞었다. 소량의 브랜디에 절인 건 체리를 섞어주니 산미가 살짝 돌면서 훨씬 균형 있는 맛이 완성되었다. 자, 이제 마들렌을 완성할 때다.
역시 햇생강은 풍미가 진하고 향긋하다. 덕분에 마들렌을 한입 베어 물자마자 미소가 새어 나올 정도로 선명한 생강 향이 나를 덮쳤다. 말린 생강에는 없는 신선한 풍미가 가득했다. 그래, 이거지. 내가 사랑하는 생강은 이런 향이다. 이 풍미와 함께 춤을 추기 위해선 어지간한 녀석들론 어림없다. 하지만 내겐 단호박이 있다. 흑당 캐러멜을 더한 만큼 한층 진한 맛으로, 자신도 잊지 말라며 당당하게 얼굴을 들이민다. 평소엔 즐기지 않지만, 생강 향 사이로 언뜻언뜻 존재감을 드러내는 단호박의 맛이 은근히 반갑다. 묘하게 생강 향 약과 맛이 아른거리는 오묘한 동양의 풍미. 그들의 거친 춤사위가 나의 환절기를 응원하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