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당 호지차 마들렌

일본의 가을

by 거울새

나는 이맘때가 되면 가끔 흑당과 호지차가 떠오른다.


호지차를 처음 만났던 게 아마 2017년 봄이었나, 일본 여행 중 편의점에서 하겐다즈 미니 컵 아이스크림을 살펴보다가 새로운 맛을 발견했다. ‘호지차 라떼 맛’. 딱 보기에도 매우 수수해 보였고, 그다지 끌리는 느낌도 없었지만, 밤은 이미 깊었고, 편의점에 남은 한정판 맛은 호지차 라떼와 정체불명의 모찌 밖에 없었다. 빈손으로 돌아가긴 싫어서 결국, 호지차 라떼 맛 하겐다즈를 하나 들고 숙소로 향했다. 그렇게 숙소로 돌아와 따뜻한 물에 목욕을 마치고, 침대에 기대 별 기대감 없이 호지차 라떼 맛 하겐다즈를 한입 떠 넣었는데, 그 맛에 깜짝 놀라 한동안 호들갑을 떨 수밖에 없었다. 너무나 복합적인 구수함이 크림과 뒤섞여 아주 부드럽게 퍼져나갔고, 은은한 단맛이 혀끝을 맴돌며 고급스러움을 자아냈기 때문이다. 평소 맛보던 녹차의 강한 쌉쌀함과는 차원이 다른 풍미가 느껴졌다. 맛있는 차 한잔을 깔끔히 비운 것 같은 정갈한 느낌이었다. 호지차 라떼 맛은 아직도 내 안에서 하겐다즈 맛 중 가장 맛있는 맛으로 남아있다.


흑당은 일본 여행 중 방문한 유명 디저트 가게에서 처음 만났다. 사실 처음엔 그게 무슨 맛인지도 잘 몰랐다. 유명 가게이다 보니 사람은 많았고, 메뉴도 너무 많아서 눈이 돌아갈 지경이었는데, 그 와중에 목표로 했던 메뉴는 이미 매진인 상태라 대체 메뉴를 찾다가 가을 한정 메뉴로 판매 중이던 흑당 맛 롤케이크를 갑작스레 구매하게 된 것이었다. 근데, 그 맛이 너무 오묘했다. 달고나와 누룽지를 합쳐놓은 듯한 구수함에 묘한 캐러멜 맛이 나는데, 묵직하지만 자극적이지 않았고 오묘한 감칠맛이 느껴졌다. 분명 모르는 맛은 아닌데, 아무리 맛을 봐도 도통 재료의 정체를 알 수가 없었다. 친숙하면서도 이질적인 맛, 그게 흑당과의 첫 만남이었다. 그렇게 별 소득 없이 숙소로 돌아와 느릿한 인터넷으로 한참을 검색한 뒤에야 흑당을 주재료로 만든 롤케이크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 독특했던 풍미 때문일까, 왠지 가을이 한창이면 한 번씩 호지차와 흑당이 떠올랐다. 몇 해 뒤 다시 찾은 일본에서 오키나와 산 흑당을 구매해 온 덕분에 흑당의 묵직한 단맛은 가끔 생각날 때마다 맛볼 수 있었지만, 사실 호지차의 구수한 맛은 몇 년째 맛본 적이 없었다. 근데 공교롭게도 얼마 전부터 호지차와 밤 그리고 무화과를 이용한 디저트가 종종 눈에 띄었다. 그것이 오랜만에 호지차를 사용하고 싶다는 열망으로 번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오늘은 흑당 호지차 마들렌을 만들었다.


이번 마들렌의 주인공은 엄연히 흑당과 호지차다.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처음 계획을 세웠을 때부터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는 것이었다. 그사이 나는 생각할 시간이 좀 많았고, 계획은 조금씩 보완되었다. 좀 더 진한 맛을 위해 흑당은 캐러멜이 되었고, 무화과나 보늬밤처럼 보조 역할을 하기로 했던 재료들이 다소 격렬한 형태로 변해갔다. 그래도 다시 한번 말하지만, 주인공은 역시 흑당과 호지차다. 절대 무화과가 아니다.


호지차는 따로 구매하지 않고, 사둔 지 오래된 녹차를 직접 볶아서 사용했다. 물론, 오랜만에 만나는 데 질 좋은 호지차를 구매해도 좋았겠지만, 원래 호지차는 남은 녹차를 소비하기 위해 탄생한 차니까 직접 볶아도 괜찮겠다 싶었다. 흑당은 진득한 흑당 캐러멜의 형태로 반죽에 섞어줬고, 무화과는 과육을 얇게 눌러 편 뒤, 마들렌 틀 위에서 살짝 말려 완성된 마들렌 위에 씌워주었다. 보늬밤은 페이스트 형태로 만들어 반죽 위에 얇게 펴 발랐고, 피스타치오를 올려 오독오독한 식감을 더해주었다.



그렇게 오랜만에 다시 마주한 호지차는 한층 기품 있는 모습으로 나를 반겼다. 특유의 복합적인 구수함과 적당한 달콤함 그리고 흑당 캐러멜과 함께 자아내는 약간의 쌉쌀함이 전체적인 맛의 균형을 잡아줬다. 질깃하지 않을까 걱정했던 무화과는 너무나 부드러웠고, 선명하게 존재감을 드러내진 않았지만, 은은한 향과 함께 톡톡 씹히는 식감을 선사해서 즐거운 기분이 들었다. 흑당 캐러멜의 묵직한 풍미 뒤에 이어지는 피스타치오의 고소함이나 아주 은은한 보늬밤의 단맛까지 마들렌 안에 일본의 가을이 가득했다.


마들렌을 먹고 나니 훌쩍 여행을 떠나고 싶어졌다. 요즘처럼 몸이 안 좋으면 여행은 꿈도 못 꾸겠지만, 부지런히 회복하면 내년엔 웃으며 일본 여행을 떠날 수 있지 않을까. 다시 여행을 떠날 그날을 위해 오늘도 마들렌을 만들며 몸을 움직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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