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사비금귤마들렌

익숙한 재료의 새로운 얼굴

by 거울새

나는 일본에서 처음 진짜 생와사비를 먹어봤다. 물론, 시판 와사비는 그전에도 정말 자주 먹어왔지만, 생와사비는 가격이 워낙 비싸서 순수하게 생와사비만을 사용한 시판 제품은 국내에 사실상 없다고 한다. 나도 몇 해 전에야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평생 먹어온 와사비가 순수한 진짜 와사비가 아니었단 사실은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생와사비를 처음 맛보았을 땐 생각보다 압도적인 맛 차이를 느끼진 못했다. 분명 맛있었지만, 생와사비와 시판 와사비의 가격 차를 생각하면 다소 아쉬운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와사비를 기름진 음식과 함께 곁들였을 때, 나는 비로소 새로운 세계를 만날 수 있었다. 알싸하고 쨍한 느낌이 정말 거짓말처럼 순식간에 부드러워졌다. 알싸함이 사라진 자리는 특유의 은은한 단맛과 은근한 고소함이 오롯이 대신했다. 와사비의 섬세한 풍미는 살려주고, 지방이 주는 느끼함은 깔끔하게 잡아내는 생와사비의 매력에 단숨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생와사비의 풍미를 가득 담은 마들렌을 만들고 싶어졌다.


사실 시판 와사비도 나름의 사정은 있다. 생와사비 특유의 풍미는 휘발성이 매우 강하다. 굳이 지방과 만나지 않아도 시간이 지나면 점점 희미해진다. 결국 그 풍미 자체를 제품에 고스란히 담아내는 건 쉽지 않다. 마들렌에 사용할 때도 마찬가지다. 마들렌은 지방 함량이 높은 데다 고온에서 구워내기에 생와사비 자체의 풍미를 온전히 유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와사비 맛을 마들렌에 담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일단, 잣을 쓰기로 했다. 내가 표현하고 싶은 건 알싸함 속에 숨겨진 와사비의 은은한 단맛과 고소함 같은 섬세한 풍미였다. 잣을 쓰면 분명 그와 비슷하게 은근한 고소함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잣만으론 부족했다. 자칫 느끼할 수 있는 잣의 기름진 맛을 깔끔하게 잡아줄 제3의 존재가 필요했다. 그래서 선택한 재료가 바로 금귤이다. 몇 해 전 후쿠오카를 여행할 때 한 식당에서 푸아그라 크림을 채운 금귤을 맛본 적이 있었다. 너무나 농후하고 포근하면서도 깔끔하고 상큼한 맛이 인상적이었다. 금귤이라면 분명 잣의 부드럽고 풍부한 지방 맛을 깔끔하게 정리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와사비 금귤 마들렌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잣에는 크림치즈를 섞어주었다. 적당한 농후함과 약간의 산미를 지닌 크림치즈를 잣과 섞으면, 자칫 과해질 수 있는 잣의 풍미를 부드럽게 눌러주면서도 깊은 고소함과 고급스러운 풍미를 충분히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금귤은 아직 철이 아니므로, 작년에 만들어 둔 금귤 정과를 꺼내 들었다. 1주일 넘게 천천히 조려낸 금귤 정과에는 적당히 새콤달콤한 맛과 마치 유자를 연상시키는 깊은 향이 오롯이 담겨 있었다. 속 알맹이를 깔끔하게 파낸 뒤 알맹이는 씨를 빼고 곱게 다져 잣 크림에 함께 섞어주었다. 비워낸 금귤 정과에는 잣 크림을 가득 채워 다시 온전한 모양의 금귤을 만들었다.


마들렌 반죽에 와사비를 섞어 구웠지만, 역시나 완성된 마들렌에선 와사비의 풍미를 거의 느낄 수 없었다. 하지만 아직 비장의 수가 남아 있었다. 일단 마들렌을 파내고 잣 크림을 채웠다. 그리고 준비해 둔 금귤 정과를 배꼽 한가운데 올렸다. 마지막은 역시 와사비. 향이 온전하게 남은 선명한 와사비 풍미를 살리기 위해, 최대한 먹기 직전에 와사비 글라쎄를 만들어 발라줬다. 또한 와사비 향이 날아가지 않도록 오븐 대신 실온에서 그대로 말려 와사비의 향을 오롯이 담아낼 수 있도록 했다.


마들렌을 한입 베어 물자 은은한 와사비 향이 코끝을 스쳤다. 먹기 직전에 와사비 글라쎄를 발라준 덕분에 꽤 선명한 와사비의 존재감을 느낄 수 있었다. 설탕의 달콤함이 와사비의 알싸한 풍미를 부드럽게 잡아주고 와사비에 숨겨진 향긋한 풍미를 은은하게 피워냈다. 그리고 이어지는 잣 크림의 고급스러운 농후함. 맛은 깊고 진했지만, 질감은 무겁지 않고 부드러우면서 섬세했다. 거기에 금귤 정과의 은근한 상큼함이 더해지니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떨어지는 고풍스러운 맛이 완성됐다.


좋아하던 재료의 또 다른 모습을 마주하는 일은 언제나 큰 즐거움이다. 마들렌에 사용하긴 힘들다 생각했던 식재료의 강렬한 풍미를 한겹 한겹 벗겨내고, 그 속에 감춰진 섬세한 맛의 세계로 조심스레 발걸음을 내디딘다. 그렇게 내 행복의 범위가 한 발짝 더 늘어난다. 그렇기에 나는 이 소소한 기록을 언제까지고 계속할 수밖에 없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오늘도 마들렌을 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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