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에게 비는 한 해의 행복
지난주 토핑으로 썼던 누룽지는 생각 이상으로 만족스러웠다.
사실 그 누룽지는 우리 집의 애물단지였다. 한창 밥을 제대로 못 먹어 힘이 들 때 흰 죽 대신 끓여 먹기 위해 주문한 제품이었다. 평소엔 어머니께서 누룽지를 워낙 맛있게 눌리셔서 시판 제품엔 전혀 관심이 없었는데, 당시엔 어머니께서도 몸 상태가 좋지 않으셔서 별다른 선택권이 없었다.
하지만 시판 제품의 맛은 기대에 훨씬 미치지 못했다.
일단 가장 문제는 바삭함을 넘어선 딱딱함이었다. 아무리 끓여도 물에 제대로 풀어지지 않아 죽보다는 밥을 말아먹는 기분이 들었다. 게다가 가마솥에서 눌렸다더니 은근히 탄 향이 배어 있어서 그 끝에 쎄한 맛이 감돌았다. 돈이 아까워 꾸역꾸역 먹어내려 했지만, 입에 맞지 않는 걸 넘어 소화도 잘되지 않아서 한 봉지가 고스란히 남아 찬장 한 편을 지키게 되었다.
그런데 이번에 완전히 새로운 면모를 발견한 느낌이었다.
은근한 잡내를 제거하기 위해 찬물에 가볍게 씻어준 뒤에 약한 불에서 천천히 구워내다가 버터와 소금을 살짝 더해서 버무리면 누룽지 토핑이 완성되는데, 마치 고소한 팝콘 향을 누룽지에 입혀 놓은 듯한 맛이 났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딱딱했던 식감도 다소 바삭하게 바뀌었고, 적당히 짭짤한 맛과 함께 누룽지 특유의 구수함도 한결 살아나서 훨씬 매력적인 맛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언젠가 기회가 되면 꼭 한 번 다시 사용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이게 웬걸.
이번 주가 바로 정월대보름이었던 것이다.
다소 뜬금없이 느껴질 수도 있지만, 정월대보름에는 흔히 부럼을 깬다. 보통 부럼으로는 날밤, 호두, 땅콩, 잣, 은행 등 견과류를 사용하는데, 때에 따라 겨울철에 살짝 얼어 단단한 무나 엿을 베어 물기도 한다. 결국 단단한 무언가를 깨물며 한 해의 건강을 기원하는 풍습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바삭한 누룽지를 깨물어 먹어도 상관없지 않을까.
그렇게 오늘 준비한 마들렌은 바로 부럼 마들렌이다.
계획의 시작은 누룽지였지만, 단순히 바삭한 누룽지를 올리고 부럼 마들렌이란 이름을 붙이고 싶진 않았다. 기왕 만드는 거 정월대보름을 기리는 마음을 제대로 담아내고 싶었다. 그래서 본격적으로 부럼 마들렌의 구성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건 팥이었다. 오곡밥은 부럼과 더불어 정월대보름을 대표하는 절식 중 하나이다. 보통 찹쌀, 팥, 검은콩, 차조, 찰수수 등 우리나라 전통 색상인 오방색을 나타내는 곡물로 밥을 짓는다고 알려져 있지만, 가을에 추수한 곡식 중 가장 잘 자라던 곡식으로 오방색의 구색을 맞추다 보니 지역에 따라 오곡밥에 사용하는 재료는 천차만별이었다고 한다. 다만, 웬만하면 빠뜨리지 않는 핵심 재료가 있었으니, 그게 바로 팥이다. 오곡밥은 기본적으로 액운을 물리치고 한 해의 평안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먹었기 때문에 액운을 쫓는 의미를 지닌 ‘팥’의 존재는 오곡밥의 주연과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나 역시 팥을 중심으로 한 마들렌 반죽을 만들고, 추가로 네 가지 색을 지닌 부럼을 올려 오곡밥의 의미를 담은 부럼 마들렌을 만들어 보기로 했다.
우선 팥은 예전에 삶아서 얼려둔 앙금을 녹여 곱게 갈아내고, 수분을 날려 포실한 식감의 앙금을 만들었다. 적당히 수분감을 조절한 앙금만 반죽에 섞어도 충분히 팥 맛을 느낄 수 있겠지만, 다양한 부럼을 토핑으로 올릴 계획인 만큼, 좀 더 확실한 존재감을 느낄 수 있도록 앙금 일부를 바짝 말린 뒤 가루로 만들어 반죽에 섞어주었다.
사실 부럼으로 오곡밥의 구색을 맞출 수 있을지가 제일 걱정이었는데, 거뭇하게 볶아낸 누룽지부터 푸른색의 호박씨, 누르스름한 호두 거기에 새하얀 잣까지 모아 놓으니 끼워 맞추기에 불과하긴 해도 얼추 나름의 오방색을 담아낼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해바라기씨까지 함께 더해 오독오독한 식감을 극대화했다.
그렇게 나의 안녕을 함께 빌어줄 다양한 부럼이 한자리에 모였다. 부드럽고 온화한 잣부터 묵직하고 씁쓸한 호두, 오독한 식감의 호박씨와 고소한 해바라기씨 그리고 짭짤하면서도 바삭한 누룽지까지, 쉴 새 없이 느껴지는 바삭하고 오독한 식감만큼이나 다채로운 부럼의 풍미가 번갈아 나타나며 입안을 즐겁게 만들었다. 그리고 톡톡 튀는 맛의 향연을 부드럽게 감싸안는 팥의 포근한 맛까지 더 해지니 더없이 만족스러운 부럼 마들렌이 되었다.
다양한 재료들과 함께 한 해의 안녕을 기원한 만큼 후회 없는 한 해를 보낼 수 있을까. 올해는 부디 우리 모두가 웃으며 한 해를 마무리할 수 있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