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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약사 Aug 10. 2016

당신을 결정짓지 말아요

《미움 받을 용기》 - 기시미 이치로



경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경험에 부여한 의미에 따라
자신이 결정하는 것이다.




언젠가 '프로이트의 심리학'에 심취된 사람과 대화할 기회가 있었다. 프로이트의 이론에 따른 정신분석도 받고 싶다고 했던 그. 하지만 나는 그와의 토의에서 항상 어딘지 모를 불편함을 느꼈었다. 프로이트의 이론 ─ 특히, '트라우마'에 관한 이론 ─ 그것에  도저히 동의할 수 없었던 것이다.



요즘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이 '거의' 맹신하는 이론, 유아교육 프로그램에서 컨설턴트가 늘 강조하는 내용 ─ 엄마의 행동에 의해서 아이의 성격과 미래가 결정되어 버린다 ─ . 그리하여 사춘기 청소년의 비행과 비뚤어짐은, 어릴적 엄마와의 유대가 원활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어릴 적 기억이 그 아이의 트라우마로 무의식 속에 자리잡아 평생 영향을 미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 영향은 본인이 '인식하지 못해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라는 이야기. 지금의 나의 행동과 사고가 '나의 무의식'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 ─ 이 얼마나 웃기는 결정론적 이야기인가.


(나는 그때까진 '아들러'를 몰랐다. 내가 그때 아들러를 알았더라면 그와의 열띤 토론을 펼칠 수 있었을 지도 모르겠다.)



프로이트의 무의식 개념, 특히 빙산에 비유한 개념은 널리 알려져 있고 많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하지만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과거에 의해서 현재의 내가 모든것이 결정되어 있는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의 삶이 '어릴 적 어머니'에 의해서 '결정'되었다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다. 게다가 내가 인식하지 못하는 '무의식'이 지금의 나를 이끌어 가고 있다고는 더더욱!




프로이트의 원인론은 '소유의 심리학'이고
결국은 결정론으로 귀결돼.
반면 아들러의 심리학은 '사용의 심리학'이고
결정은 자네가 하는 걸세.




프로이트의 무의식이니, 트라우마니, 하는 이론에 빠져들면, 인생 자체가 허무해져버리고 만다. '지금의 나'는 '예전의 나' 혹은 '내 주변의 상황'에 영향을 받은 무의식에 의해서 '내가 인식하지도 못하게' 영향을 받아 살아가고 있을 뿐, '나 자신'이 주체가 되는것은 아니니까. 그렇다면 삶은 무슨 의미가 있으며, 나의 존재는 일종의 허상에 불과한 것 아닌가. 이 얼마나 허무한가 ─ 그렇다. 나는 프로이트에 관한 토의를 할 때면 그 특유의 허무함에 몸서리 쳐졌던 것이 아닐까.



'아들러의 심리학' 그 자체를 풀어쓴 책이 아니라, '기시미 이치로'에 의해 한번 프리즘에 걸러진 이론의 집대성. ─ 나느 이 책이 좋다. 어쩌면 아들러 심리학 원론을 들여다보면 또 지나치게 철학적인 관점에 의해 반감을 가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기시미 이치로의 관점으로 재해석된 아들러의 심리학에는, ─ 내가 보통 '완전히', '완벽히' 라는 말을 쓰기를 꺼려함에도 불구하고 ─ '완전하게' 동의하는 바이다.




'지금, 여기'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춘다는 것은,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진지하고 빈틈없이 해나가는 것을 뜻한다네.





과거에 구속되지 않고, 미래만 공상하지 않고, '지금 이순간'에 집중하면서 현재를 살아가는 것. 하루하루 '나'에 의해서 선택되는 삶. 그렇다고 유희주의나 쾌락, 향락주의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자신을 수용하고 인정하는 삶.



온갖 SNS에 허세가 난무하고, 타인의 삶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섞기가 다반사인 요즘 우리의 모습에, '진정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를 깨닫게 해주는 책.





왜 '특별'해지려고 하는 걸까?
그건 '평범한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지.
평범한 것은 무능한 것이 아니라네.
일부러 자신의 우월성을 과시할 필요가 없는 것 뿐이야.






인생은 누군가가 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는 걸세.




나는 감정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아닐세.

누구나 감정은 있어. 당연하지.

하지만 만약 '인간은 감정에 저항할 수 없는 존재다'

라고 한다면, 

그 의견은 결코 수용할 수 없네.

우리는 감정의 지배를 받아서 움직이는 것이 아닐세.





인간은 과거의 원인에 영향을 받아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정한 목적은 향해 움직인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 주어졌느냐가 아니라

주어진 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이다.

무엇이 주어졌는가에 집착한다고 해서 현실이 변하나.

우리는 교환이 가능한 기계가 아닐세.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교환이 아니라 고쳐나가는 것이다.




생활양식을 바꾸려고 할때,

우리는 큰 '용기'가 있어야 하네.

변함으로써 생기는 '불안'을 선택할 것이냐,

변하지 않아서 따르는 '불만'을 선택할 것이냐.




아들러의 심리학은 용기의 심리학일세.

자네가 불행한 것은 과거의 환경 탓이 아니네.

그렇다고 능력이 부족해서도 아니고.

자네에게는 그저 '용기'가 부족한 것 뿐이야.

말하자면 '행복해질 용기'가 부족한 거지.





시간만 있으면 할수 있다.

환경만 허락되면 쓸 수 있다.

나는 그런 재능이 있다는

가능속 속에서 살고 싶은 걸세.




'변할수 있는 것'과 '변할 수 없는것'을 구분해야 하나.

'바꿀수 없는 것'에 주목하지 말고,

'바꿀수 있는 것'에 주목하란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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