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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약사 Sep 30. 2016

죽어서 살아가는 전쟁이야기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p74.

역사는 앞으로도 수백년은 더 '그건 대체 무엇이었을까'라며 고민하겠지. 대체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어디에서 왔을까. 상상을 한번 해봐. 임신한 여자가 지뢰를 안고 가는 장면을....체르노바는 당연히 아이를 기다렸지... 삶을 사랑했고 또 살고 싶어 했어. 당연히 두려워도 했지.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그 일을 갔어.... 스탈린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서. 그녀는 무릎을 꿇어가며 살아야 하는 삶을 거부했어. 적에게 굴종하는 삶 따위는... 어쩌면 그때 우린 눈이 멀었던 건지도 몰라. 그리고 그때 우리가 많은 것을 놓치고 보지 못했다는 사실도 부인하지 않겠어. 하지만 우리는 눈이 멀었으면서도 동시에 순수했어. 우리는 두 개의 세상, 두 개의 인생을 사람들이라는 것, 당신은 그걸 꼭 알아야 해....




우리는 전쟁에 대한 모든 것을 '남자의 목소리'를 통해 알았다.
우리는 모두 '남자'가 이해하는 전쟁, '남자'가 느끼는 전쟁에 사로잡혀 있다.
'남자'들의 언어로 쓰인 전쟁. 여자들은 침묵한다.






 이 책에 대한 소감과, 이 책 자체에 대해서, 요즘 세상에 만연한 '페미니스트적' 시각으로만 바라보지 않기를 바란다. 애초에 이 책은 '여자'와 '남자'를 대놓고 구분짓고 있으니까 그런 오해를 불러일으킬만도 충분히 하겠지만, 이 책은 그런 류의 감상적이고 감정적이고 피상적인 논리로 접근할, 그런 종류의 책이 절대 아니다. 이 책은, 방금 심장이 수축해서 좌심실에서 힘차게 뿜어져 나오는 선홍색의 피이면서도, 모든 폐기물을 끌어안고 스멀스멀 우심방으로 힘없이 들어가는 검붉은 피이기도 하다. 그 어느쪽이 되었든, 이책은, 우리 몸과 심장과 세포 속에 살아 있는 그 무언가이다.





p17.

여자들의 이야기는 전혀 다른 것이고, 또 여자들은 다른 것을 이야기한다. '여자'의 전쟁에는 여자만의 색깔과 냄새, 여자만의 해석과 여자만이 느끼는 공간이 있다. 그리고 여자만의 언어가 있다. 그곳엔 영웅도, 허무맹랑한 무용담도 없으며,  다만 사람들, 때론 비인간적인 짓을 저지르고 때론 지극히 인간적인 사람들만이 있다. ...... 나는 바로 이 전쟁의 역사를 쓰고자 한다. 여자들의 역사를.





여자들에 의한 전쟁의 역사 ─ . 그것이 이 책이다. 그런데 나는 이 책이 단지 그 '관점'만 바꾸어서 서술했다는 것에는 별로 놀랍지도 감동을 받지도 못했다. 그것보다 더 이 책이 가슴뛰게 하는 것은, 철저히 작가의 서술이 제한적이라는 점, 어떻게 보면 그녀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눈 수많은 다른 여자들의 이야기라는 점, 그것이다. 그렇다. 이 책은 소설이라기엔 너무나도 사실적인, 다큐소설이다. 작가 스베틀라나는 녹음기 하나와 함께 전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인터뷰를 한다. 가장 잔혹하고 끔찍했던 전쟁, 제2차 세계대전에 자진 참전했던 여자들의 이야기를 낱낱이 기록한다. 그녀는 그녀가 녹음한 내용을 듣고 듣고 또 들었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최대한 여과없이 드러내보이려고 한다. 그러기에 이 책은 '줄거리'라고 할 것은 없다. 스베틀라나가 이 책을 엮으면서 겪은 이야기와, 그녀의 생각이 잠시 나오긴 하지만, 결국은 처음부터 끝까지 인터뷰의 나열일 뿐이다. 





'날 것' 그대로의 기록




 그렇다 ─. 이 책은, 흙이 잔뜩 묻은 채로, 피를 흘리면서도 남은 숨을 헐떡이는 사냥감과 같은 모습으로 우리를 노려보는 책이다. 과거이면서도 현재이고, 죽었으면서도 살아있고, 사라졌으면서도 날 것 처럼 생생한 기록. 처음부터 끝까지 이 책을 완독하는 것은 고역이다. 전쟁이라고는 조금도 겪어보지 못한 우리의 세대에서도, 이 책은 가슴에 비수를 꽂는다. 그런 시대가 있었다는 사실, 우리가 망각하고 살아가는 그 사실이 눈앞에서 현실이 되어서 날 것의 피냄새를 잔뜩 내고 있다. 생생하게 진동하는 그 피냄새에 현기증이 날 정도이다.




 이렇게 적나라하고 잔인한 기록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 스베틀라나는 끝까지 해답을 주지 않는다. 왜 이런 책을 썼는지, 계속 질문만 한다. 그녀 역시 혼란스럽다. 나는 여기서 그녀에게 또 한번 놀란다. 이 소설을 읽는 내내, 그녀는 마치 교실 안에서 모퉁이에 쭈그러 앉아있는 아이마냥, 하지만 두 눈빛만큼을 살아서 교실안을 지켜보는 것 마냥, 절대로 중앙에 나서서 개입하지 않으면서도 모든 것을 기록하고 만들어내고 보여주고 있다. 나는 그녀가 꾸며놓은 교실이라는 무대의 중앙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넋 놓고 지켜보다가도, 한번씩 스베틀라나 그녀의 예리한 눈빛을 느껴서 한번씩 돌아보게 된다. 






p460.

 전쟁터에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아, 우리가? 우리는 그랬어. '아, 끝까지 살아남기만 한다면...전쟁이 끝나면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해할까! 아,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 인생이 펼쳐질까! 이처럼 처절한 고통을 이겨냈으니 이제 사람들도 서로 가엾게 여기겠지. 서로 사랑할거야. 달라질거야.'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니까. 철석같이 믿었지.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서로 미워해. 다시 서로를 죽이고. 나는  그게 제일 이해가 안돼...






 그동안 읽었던,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책들 속에서, 이 책만큼 흙냄새 나는 책은 없었다. 잔혹하고 적나라하고, 흙냄새와 포탄의 연기와 화염과 피냄새 (그러한 냄새들을 내가 모두 직접 맡아본 적은 없지만). 그 끝에는 가슴이 쩍쩍 갈라지는 것 같은 처절한 아픔이 있고, 또다시 그 아픔을 적셔 줄 뜨거운 눈물이 있다. 문장 한 줄 읽기가 버겁고 가슴 쓰린 소설. 새로운 감동의 책. 전쟁에 대한 새로운 기록. 제 3자에 의해 쓰여진 살아있는 그들의 기록. 묵직하지만 불타버릴 듯이 뜨거운 책. 




 그리고 우리는이 불타버릴 듯이 뜨거운 책을, 두 손이 곧이라도 화상을 입을 듯이 뜨거울지라도 읽어내야 한다. 우리의 안위를 위해서 외면해서는 안된다. 그것이 이 책의 임무이자, 이 책을 읽은 우리들의 숙명이다. 인간의 존엄성이 땅속에 묻혀 짓밟혔던 시대의 이야기. 그 시대를 살아나온 사람들의 이야기. 그리고 세상이 다시 그들을 외면했음에도 불구하고 살아가고 있는 그네들의 이야기. '승리했다'라는 단순한 결과나 영웅담과는 거리가 먼 '진짜 전쟁'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이야기. 피는 난자했지만 순수했던 그들의 마음속을 들여다 보고, 다시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것. 우리는 평화 속에 익숙해져서 너무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것은 아닐까. 이 책 속의 그녀들에게 전쟁은, 과거이면서도 현재이고, 잊고 싶은 기억이면서도 잊지 못한 추억이며, 그러기에 그녀들은 살면서도 죽어있는, 우리 인간의 화석이기 때문이다.





p460.

직접 겼어보지 않은 사람이 과연 이해할 수 있을까? 어떻게 이야기해야해? 어떤 표정으로? 자, 이제 당신이 대답해봐. 대체 어떤 얼굴로 그 일을 회상해야 하는 지.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든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럴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아니야. 눈물부터 쏟아져. 하지만 반드시, 꼭 이야기해야 해. 우리가 겪은 일이 헛되이 사라지면 안되니까. 사람들에게 알려야 하니까. 이 세상 어딘가에 우리의 비명소리가 남아 있어야 하니까. 우리의 그 피맺힌 통곡이...











p18. 회상이란 지금은 사라져버린 옛 현실에 대한 열정적인, 혹은 심드렁한 서술이 아니다. 그것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과거의 새로운 탄생이다.



p22. 나는 듣는다.... 나는 점점 커다란 귀가 된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두 담으려는 커다란 귀. 나는 목소리를 '읽는다'.



p31. "우리의 기억은 결코 이상적인 도구가 아니다. 기억은 제멋대로인데다가 변덕스럽다. 게다가 기억은 줄에 묶인 개처럼 시간이라는 사슬에 매여있다."




p37. 시간, 이 또한 우리의 고향이다.... 하지만 나는 예전처럼 변함없이 그네들을 사랑한다. 그들의 시대는 사랑하지 않지만 그들은 사랑한다.




p54. 주위에 아무리 사람이 많아도 결국 사람은 혼자야. 왜냐하면 사람은 언제나 홀로 죽음을 대면해야 하거든. 나는 그 끔찍한 외로움을 알지.




p127. 행복이 뭐냐고 한번 물어봐 주겠어? 행복.... 그건 죽은 사람들 사이에서 기적처럼 산 사람을 발견하는 일이야....



p137. 나는 예전에, 고통은 사람을 자유롭게 한다고, 고통을 견뎌낸 사람이야말로 자기 삶의 온전한 주인일 거라고 생각했다. 고통의 기억이 자신을 보호한다고. 그런데 이제 언제나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런 앎, 평범한 보통의 삶에는 있기 힘든 이런 특별한 앎은 손댈 수 없도록 따로 보관해놓은 비축물이나 겹겹이 층을 이룬 광석 틈의 희미한 금가루처럼 별도의 공간에 존재한다. 한참을 속이 빈 암석을 공들여 벗겨내고, 함께 사소한 기억의 퇴적물을 헤집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반짝반짝 모습을 그러낸다! 선물처럼 찾아온다!



p137. 나는 왜 살아남았을까? 무엇을 위해? 생각해보면..... 그건 아마 지금 이렇게 그때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p142. 우리는 이제 사라져가는 세대예요. 매머드들! 우리는 사람이 사는 데는 목숨보다 더 소중한 뭔가가 있다고 믿었던 시대를 지나왔어요.



p148. 우리는 정말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무엇으로, 어떤 재료로 만들어졌을까? 고통을 이겨낸 사람은 어떤 단단함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싶다. 그걸 알기 위해 나는 이곳에 왔다.



p174. 왜냐하면 나는 늘 사랑과 기쁨에 넘쳤거든. 인생은 사랑과 기쁨이라는 걸 깨달았고 전쟁이 끝나면 그렇게 살고 싶었으니까. 하느님은 총을 쏘라고 사람을 창조하신 게 아니야. 서로 사랑하라고 만드셨지. 어떻게 생각해?



p174. 열 번이고 백 번이고 역사를 고쳐 쓰라고 해. 스탈린을 넣든지 빼든지 알아서 쓰라고.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히 남겠지. '우리가 승리했다!'는 사실. 그리고 우리의 고통도. 우리가 겪은 그 아픔들도. 그건 잡동사니 쓰레기도 아니고 타다 남은 재도 아니야. 그건 바로 우리네 삶이지.



p216. 이들은 이미 두 사람이다. 저 사람이면서 이 사람이다. 젊은이면서 늙은이다. 전쟁터에 있는 사람이면서 전쟁 후의 사람이다.




p232.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게 될 것이다. 크고 위대한 것이 작고 평범해지는 그 순간을. 하늘이나 바다가 아무리 좋아도 내게는 현미경 렌즈 아래 놓인 모래 한 알이, 바닷물 한 방울의 세계가 더 소중하다. 그곳에서 내가 빗장을 열고 보게 될 위대하고도 놀라운 한 사람의 삶이. 만약 작은 것이나 큰 것이나 똑같이 무한하다면, 어떻게 작은 것을 작다고 하고 큰 것을 크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그 둘을 구별짓지 않는다. 한 사람만으로도 벅차다. 한 사람 안에 모든 것이 있으므로. 그 안에서 길을 잃고 헤맬만큼.




p319. 과연 그 답을 들을 수 있을까? 우리의 말과 감정이 허락하는 이야기는 어디까지일까? 말과 감정으로는 도저히 설명되지 않는 이야기는 또 무엇일까? 질문은 자꾸만 많아지는데, 대답은 자꾸만 적어진다.

 만남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가끔, 고통은 고독이라는 생각을 한다. 완전한 고립. 한편으로 고통은 앎의 특별한 형태는 아닐까라는 생각도 든다. 인간의 삶에는, 특히나 우리네 삶에는 고통 외의 다른 방법으로는 도저히 전달할 수도 지켜내ㄹ 수도 없는 뭔가가 있다.  그건 이 세상이 그렇게 생겨먹었고, 또 우리가 그렇게 생겨먹었기 때문이다.



p322, 전쟁이 무슨 색이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답하고 싶어. 전쟁은 대지의 색이라고.



p336. 우리의 사랑은 내일을 기약할 수 있는 사랑이 아니었으니까. 오직 오늘만 할 수 있는 사랑이었으니까. 우리는 모두 알고 있었어.... 지금은 사랑하지만 일 분 후에라도 사랑하는 사람이 이 세상을 떠날 수도 있다는 것을. 전쟁터에서는 모든 게 너무도 빨리 일어났어. 삶도 죽음도. 겨우 몇 년 사이에 우리는 그곳에서 인생 전체를 산 셈이지. 그런데 그걸 누구한테 설명을 못하겠는 거야. 그곳에선 시간이 다르게 흘렀다는 걸...



p370. 우리 이야기는 꼭 안 써도 돼.... 우리를 잊어버리지만 마.... 당신과 내가 이렇게 서로 이야기를 나눴잖아. 같이 울었고. 그러니까 헤어질 때 뒤돌아서 우리를 봐줘. 우리들 집도. 낯선 사람처럼 한 번만 돌아보지 말고 두 번은 돌아봐줘. 내 사람 처럼. 다른 건 더 필요없어. 뒤돌아봐주기만 하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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