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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약사 Oct 16. 2016

나와, 너와, 우리와, 그 관계에 대한 서사

쇼코의 미소 - 최은영







자기 자신이라는 이유만으로
멸시와 혐오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 쪽에서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는 작가가 되고 싶다.
그 길에서 나 또한 두려움 없이,
온전한 나 자신이 되었으면 좋겠다.
─ 작가의 말 中






 

 어떤 책과의 만남, 어떤 작가와의 만남, 그것은 어떨때는 아무런 이유를 설명하지 못하기도 한다. 무슨무슨 책을 읽기로 마음 먹을 때에, 대부분의 경우 특정한 이유가 있는 경우가 많은 건 사실이다. 지인의 추천이라든가, 읽어야 하는 과제라든가, 베스트셀러라서 여기저기서 광고를 접했다든가. 하지만 모든 경우가 그러한 것은 아니다. 나와 이 책 <쇼코의 미소>의 만남이 그러했고, 나와 최은영 작가와의 만남이 그러했다. 아무런 이유와 계기를 설명할 수 없는 만남 ─. 그것은 어떻게 보면 말 그대로 '무의미'했고, 어떤 의미에서는 너무나 '유의미'한 것이었다. 




 더도 덜도 말고 ─ "그냥" 이었다.  이 책을 내 손에 쥐고 읽게 된 것은. 그리고 무심코 창밖을 바라보면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표정을 읽는 듯한 무심한 기분으로 이 책을 읽어나가기 시작했을 뿐이었다. 아무런 기대도, 아무런 정보도 없이. 그리고 나는 이 책은 딱, 그러하기에 좋은 소설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은 참으로 무심하고 담담한 책이다.



 신인작가들의 작품에서 많이 보이는 화려하고 유려한 스킬은 없다. 서점에 놓여지는 수많은 책들 중에서 이제 막 세상에 나온 신인들의 책은, 제 스스로 반짝이지 않으면 세간의 관심을 받기가 힘든 것이 현실이다. 때문에, 많은 신인작가들은 본인이 가진 역량을 최대한 화려하게 꾸며내곤 한다. 그러한 꾸며내는 것에 혹하는 것이 괜히 마술사의 눈속임에  ─ 물론 그것은 단순한 눈속임이 아니라 하나의 예술이자 기술임에도 불구하고 ─ 현혹되는 것만 같아서 일부러 그런 류의 책을 멀리하는 나로서는, 최은영 작가 특유의 담담함이 참 예뻐보였다. 따뜻하고 온화하고 차분한 이야기.  하지만 그 속에는 꽤, 어둡고 우울한 회색빛 배경이 깔려있긴 하지만.





이 책 전체를 통해 가장 두드러져 보이는 것은 서사를 감싸고 있는 순하고 맑은 힘이다. 그 힘은 이를테면 열기라기 보다는 온기에 가까워서 힘보다는 기운이라고 함이 좀더 적절할 수도 있겠지만, 비유하자면 그 힘은 추운 겨울에 따뜻한 실내로 들어갔을 때 갑작스럽게 몰려오는 온기와도 같다. 힘은 힘이되 누구도 해칠수 없어 보이는 부드럽고 따뜻한 힘, 압도적이지만 위업적이지는 않은 힘이다.
─ 문학평론가 서영채 해설 中





 이 책 <쇼코의 미소>는 엄밀히 말하자면, 최은영 그녀의 중편 소설 "쇼코의 미소"를 필두로 하여 그녀의 여러 단.중편의 소설들을 한 데 엮어 놓은 모음집이다. 부끄럽지만,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그녀의 소설을 한 편씩 읽어나가면서 그녀의 소설이 어떤 것을 말하려는지,  그 소설들의 결말은 무엇인지, 멍한 기분이 들었었다. 이해되지 않고, 마치 부연 연기속을 두둥실 부유하는 듯한, 정처없는 기분이 들었었다. 그녀의 소설은 너무나도 열려있었고, 분명하고 단호하게 무언가를 결정짓지 않았다. 그녀는 끊임없이 질문만 던졌고, 보여주기만 했고, 독자의 머릿속에 물음표를 남겼고, 생각의 여지를 주었다. ─ 그렇다. 그녀의 소설은 결말을 보여주는 소설이 아니라, 과정을 보여주는 소설이었다.





공감과 관계의 소설





 하지만 그 '과정'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관계'였다. 그녀의 소설은, 인간들의 수많은 관계를 층위적으로 엮어가면서 입체적으로 보여주었다. 물론 그녀가 중점적으로 관심을 가지는 '여성'들의 모습에 좀더 중심이 있었고, 부모의 관계 못지 않은, '조부-조손'의 관계가 꽤 많이 다루어 지긴 하였지만, 왜 '모든' 관계를 다루지 않냐고 윽박지를 필요는 없는 것일 것이다. 우리는 그저 그녀가 놓아놓은 수많은 관계와, 그 속에서 번민하기도 하고 치유되기도 하고, 때로는 풀리지 못하고 얽힌채로 끝나버리는 모습들을 바라보면서, 함께 느끼고 생각하고 공감하면 될 것들이다.



 단지, 그녀의 이 소설모음집이 다소 이색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그녀의 소설들의 이국적인 색채 때문일 것이다. 그녀의 이 모음집을 앞에서부터 순차적으로 읽어나가다 보면, 마치 세계 각국의 요리를 선보이는 어느 다국적 뷔페에서 음식을 맛보는 것과 흡사한 다채로움을 느낄수 있다. 왜 그녀는 이렇게 이국적인 배경을 담고, 이국적인 인물들과 이국적인 소재들을 담았을까. 나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타국'이라는 이질적 배경이 주어질 때에, 인간 대 인간의 관계가 더욱 도드라져 보이는 것 때문은 아닐까. 태어날때부터 많은 것을 공유하고 비슷한 경험을 겪어서 비슷하게 살아온 사람들, 그리고 이미 충분히 익숙해져 있는 배경 속에서 이야기를 하는 것 보다, 낯선 세상에 떨어졌을때 인간 본연에 숨겨진 진짜 모습이 더 도드라져 보인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또한, 외국인 인물들을 등장시킴으로, 그 사람들과 우리 사이의 공감과 차이를 끌어내고, 극복 혹은 좌절되는 부분들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소설 <미카엘라>에서 '미카엘라'가 이세상 모든 '딸'들을 대변하듯이, 결국은 국경과 언어를 초월하여 모든 인물들을 하나의 '사람'이라는 관념적인 관점으로 바라본 것은 아닐까.





p138.

나는 내 병을 지독한 구취로 기억한다. 아무리 이를 닦고 샤워해도 그 냄새가 몸에서 떠나질 않았다. 아침에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기 힘들었고, 화장실까지 걸어가는 일이 불가능하게 느껴졌던 때도 있었다. 스스로에게 잔인하리만치 근면했던 삶의 태도도 그 병 앞에서는 일말의 도움이 되지 않았다. 샤워하고 머리 말리고 옷 입고 밖으로 나가는 것만으로도 하루치의 체력과 정신력이 소진되었다. 나는 내 몸의 주인이 아니었다.





 '우울증'이라는 증상을 겪으면서 느끼는 감정의 상태를 이렇게 표현해 해는 작가, 최은영.






p138.

실수로 꼬리칸을 자르고 앞으로 달려가는 기차처럼, 예전에 내가 나라고 알던 사람을 나는 잃어버렸다. 스물의 나는 스물넷의 나로부터 완벽하게 분리되어 내가 다시는 돌아갈 수 업ㅅ는 어두운 레일 위에 우두커니 남겨졌다.




또한 세월의 흐름속에서 변해가는 자기 자신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감각적으로 서사해낼수 있는 작가, 최은영.

이런 신인 작가의 작품은, 앞으로도 눈여겨 볼 수 밖에. ─ 참신하지 않지만 신선하고, 무던하면서도 감동적이고, 서늘하게 우울하면서도 따뜻하고 온화한, 그녀의 소설을, 나는 앞으로도 기대할 것 같다.












p7. 쇼코는 해변에 서 있으면 이 세상의 변두리에 선 느낌이 든다고 말했었다. 중심에서 밀려나고 사람들에게서도 밀려나서, 역시나 대양에서 밀려난 바다의 가장자리를 만나는 기분이라고.



p22. 어디로 떠나지도 못하면서 그렇다고 그렇게 박혀버린 삶을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의 맨 얼굴을 들여다보는 일은 유쾌하지 않았다.



p44. 새벽에 눈을 뜨면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우리가 밟고 있는 이 단단한 땅도 결국 흘러가는 맨틀 위에 불완전하게 떠 있는 판자같은 것이니까. 그런 불확실함에 두 발을 내딛고 있는 주제에, 그런 사람인 주제에 미래를 계획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니.



p69. 시간이 지나고 하나의 관계가 끝날 때마다 나는 누가 떠나는 쪽이고 누가 남겨지는 쪽인지 생각했다. 어떤 경우 나는 떠났고, 어떤 경우 남겨졌지만 정말 소중한 관계가 부서졌을 때는 누가 떠나고 누가 남겨지는 쪽인지 알 수 없었다. 양쪽 모두 떠난 경우도 있었고, 양쪽 모두 남겨지는 경우도 있었으며, 떠남과 남겨짐의 경계가 불분명한 경우도 많았다. 



p69. 나는 줄곧 그렇게 생각했다. 헤어지고 나서도 다시 웃으며 볼 수 있는 사람이 있고, 끝이 어떠했든 추억만으로도 웃음지을 수 있는 사이가 있는 한편, 어떤 헤어짐은 긴 시간이 지나도 돌아보고 싶지 않은 상심으로 남는다고.



p71. 이제 나는 사람의 의지와 노력이 생의 행복과 꼭 정비례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안다.



p72. 엄마는 그런 할머니를 이해하지 못했고, 그런 태도를 경멸했지만 시간이 흐르고 난 뒤 그 무정함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상대의 고통을 같이 나눠 질 수 없다면, 상대의 삶을 일정 부분 같이 살아낼 용기도 없다면 어설픈 애정보다는 무정함을 택하는 것이 나았다. 그게 할머니의 방식이었다.



p93. 빛은 사람을 취하게 하고 동시에 깨어 있게 해. 나는 여기서 눈을 뜨고도 꿈을 꾸네.



p98. 두려움은 내게 생긴 대로 살아서는 안되며 보다 나은 인간으로 변모하기를 멈춰서는 안된다고 말해왔었다. 달라지지 않는다면, 더 나아지지 않는다면 나는 이 세계에서 소거되어 버릴 것이었다.



p98. 우리는 싸움을 제외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서로를 견뎠다. 감정을 분출하고 서로에게 욕을 해서 그 반동을 확인하고자 하는 의지도 없었다. 싸움도 일말의 애정이 있을 때나 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그를 미워하지 않았고 그도 나를 미워하지 않았다. 나는 그의 말이나 행동으로 상처받지 않았다. 그도 그러했을 것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나쁘게 대하는 법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니 가장 나쁜 건 서로에게 나쁘게 대하지도 못하는 그 무지안에 있었다.



p98. 우리는 예의바르게 서로의 눈을 가렸다. 결국 마지막에 와서야 내가 먼저 그의 눈에서 내 손을 뗐고, 우리는 깨끗하게 갈라셨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지막은 그렇게 깨끗할 수 없었기에 그 이별은 우리 사이에 어떤 사랑도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했다. 우리는 그저 한 점에서 다른 한 점으로 이동했을 뿐이다.



p115. 나는 그 침묵 속에서 내가 얼마나 그 시간에 집착하고 있는지 알았다. 그 시간은 영원해야 했다. 다른 시간들처럼 함부로 흘러가버려서 과거 속에 폐기되어서는 안됐다.



p116. 되갚아 주고 싶은 건가. 아니면 그저 누군가를 자극해서 그 반응을 보고 싶은 건가. 나는 그런 식으로밖에 자신에 대해 안심하지 못하는 그들이 진심으로 가엾게 느껴졌다. 누군가를 조롱하고 차별하면서 기쁨을 느끼는 삶은 얼마나 공허한가.



p120. 한지는 나와 가깝다고 무람없이 이야기할 수 있었을지 몰라도, 나는 그에 대해 그렇게 이야기 하지 못해. 한지에 대해 한마디라도 하면, 모두가 한지에 대한 나의 상상까지 꿰뚫어볼 것만 같아서. 그런 면에서 나는 조금은 미친 사람같지.



p122. 우리는 대등한 관계의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연인이 될 수 없었고, 친구로 만나기에도 나는 부족한 사람이었다. 아무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고, 그렇게 판단하지 않았겠지만 나 자신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할 때면 내가 자신을 '만나줬던 것'이라고 말했던 전 남자친구가 생각났다. 어쩌면 그와 나를 삼 년이라는 시간 동안 묶어줬던 건, 스스로를 보잘것 없는 사람이라고 믿었던 우리의 공통점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단지 그의 열등감이 나의 열등감보다 더 컸으므로 나는 그를 경멸하며 나에 대한 경멸을 피해봤을 뿐이었다.



p125. "기억은 재능이야. 넌 그런 재능을 타고 났어"

할머니는 어린 내게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건 고통스러운 일이란다. 그러니 너 자신을 조금이라도 무디게 해라. 행복한 기억이라면 더더욱 조시하렴. 행복한 기억은 보물처럼 보이지만 타오르는 숯과 같아. 두 손에 쥐고 있으면 너만 다치니 털어버려라. 얘야, 그건 선물이 아니야."



p133. 침묵은 나의 헐벗은 마음을 정직하게 보게 했다.

사랑받고 싶은 마음, 누군가와 깊이 결합하여 분리되고 싶지 않은 마음, 잊고 싶은 마음, 잊고 싶지 않은 마음, 잊히고 싶은 마음, 잊히고 싶지 않은 마음, 온전히 이해받으면서도 해부되고 싶지 않은 마음, 상ㄷ처받고 싶지 않은 마음, 상처받아도 사랑하고 싶은 마음, 무엇보다도 한지를 보고 싶다는 마음.



p135. 나이에 걸맞은 옷과 표정을 걸치고서 누구와도 불화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서 아주 가끔씩, 지금의 시간들을 떠올리게 될거야. 내가 가장 나다울 수 있었던 시간을. 그 시간 속의 너와 나를 기억할거야.

내 적막한 마음에 함께 있어줘서 고마웠어.



p138. 적어도 안타를 쳐야 한다는 친구의 말이 떠올랐다. 나 나름대로 성실하게 책상에 앉아 있었지만 결과가 파울이면 아무런 변명을 할 수가 없었다. 공을 치기 전까지 공이 어디로 갈지 모른다는 생각이 나를 얼어붙게 했다.



p160. 오래 살아가는 일이란 사랑하는 사람들을 먼저 보내고 오래도록 남겨지는 일이니까. 그런 일들을 겪고도 다시 일어나 밥을 먹고 홀로 길을 걸어나가야 하는 일이니까.



p183. 있는 마음 없는 마음 다 주면서도 그 마음이 다시 되돌아오지 않을까봐 불안하지도 두렵지도 않았다. 그저 그 마음 안에서,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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