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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약사 Nov 03. 2016

1년에 단 한번, 그녀를 만납니다

영화 아오이유우의 《니라이카나이로부터의 편지》감독 : 쿠마자와 나오토















 한국에는 "니라이카나이로부터의 편지"라는 일본스러운 타이틀이 아니라, "아오이유우의 편지"로 보급된 영화. 하지만, 이 영화는 역시 원제대로, "니라이카나이"에서 온 편지여야 한다. ─ 응. 그래야만 할 것 같다.










이쯤되면 영화제목에 나온 생소한 이름 '니라이카나이'가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그리고 그 궁금증은 영화 초반부에 바로 알려준다. 주인공 '아사토 후키(아오이유우)'의 어릴적, 후키의 엄마가 말한다. 저 수평선 너머에는 니라이카나이라는 세계가 있다고. 그것은 한국인인 우리에게는 생소하지만, 이 영화의 배경이 된 오키나와에서는 마치 전설과도 같은 아름다운 곳, 바다 너머에 존재하는 이상향 같은 세계이다.











항상 '후키, 후키'라고 부르며 무한한 사랑을 보여주던 후키의 엄마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후키가 6살이 되던 때에 배를 타고 도쿄로 나가더니, 돌아오지 않는다. 후키가 7살이 되던 해, 한통의 편지에 단지 '엄마는 도쿄에 더 있어야 할것 같다'고만 말했을 뿐. 그 이후에도 후키의 엄마는 매년 후키의 생일날에만 한통의 편지를 보내왔다. 카메라맨이었던 후키의 아버지는 오래전에 이미 세상을 뜨고, 오직 그의 사진과 그의 카메라만이 함께할 뿐이었는데, 엄마마저 떠난 후키는 이제 부모님 모두를 떠나보내고, 할아버지의 손에 자라게 된다.




1년에 단 한번의 만남. ─ 후키는 오직 그날만 엄마의 존재를 느낄수 있었다.











 하지만 십대로 넘어가면서, 그런 후키도 조금은 방황하게 된다. 어째서 엄마는 설명해주지 않는가. 그리고 곧, 엄마의 편지에는 "후키가 20살이 되는 해에 모든 것을 설명해주겠다"고 한다. 방황하고 무너지고 반항하려던 후키도 다시 마음을 다잡는다. 오직 20살의 생일을 기다리며.











오키나와라는, 세상과는 떨어진 섬. 그곳은 순박한 이웃들과 속세와는 동떨어진 공동체적인 모습과, 그리고 이러한 시골을 벗어나고픈 갈망이 공존해 섞여 있는 곳이었다. 아름다운 바다가 있고, 조용한 마을이 있고, 사람들로 붐비지 않는 곳. 그곳에서 후키는 엄마 아빠도 없이 오직 아버지가 남기고 간 카메라에 마음을 붙이고 지냈을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그녀는 틈틈이 아버지의 카메라로 자신만의 사진을 찍는것을 좋아하게 되었다.









하지만 20살이 될때까지는 무슨일이 있어도 섬을 떠나지 말라는 할아버지의 강압적인 명령과, 혼자서 학교를 그만두고 꿈을 좇는것에 대한 두려움, 본인이 떠나고 홀로 남을 할아버지에 대한 걱정, 그리고 엄마가 있는 도쿄에서 맞부딪힐지도 모를 진실에 대한 회피, 이 모든것이 한데 섞여 그녀는 꿈은 꿈으로만 두고, 자기를 키워주신 할아버지가 시키는대로 살아가고자 한다.










그러던 18세 생일. 여전히 엄마로부터 편지가 왔고,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드디어 후키는 결심한다. 꿈을 좇아 도쿄로 떠나기로. 할아버지의 반대에 부딪히지만, 엄마로부터의 조언이자 격려는 그녀에게 큰 힘을 주었고, 결국 할아버지를 설득하고서 오키나와를 떠나는 배에 오른다.










지인의 언니를 통해 소개받은 어느 프로사진작가의 어시스턴트. 하지만 도쿄에서의 삶은 녹록치 않았다. 오키나와 출신 후키는, 느긋했고, 느렸고, 어색했고, 약했다. 마치 자신에게 맞지 않은, 커다란 옷을 입고 휘적휘적거리는 마른 사람마냥. 햇빛도 못보고, 자신의 꿈인 사진찍을 시간도 없는 채, 혼이 빠진 시간들을 꾸역꾸역 보내고 있을 뿐이었다.




 처음 동경에 와서는, 엄마의 편지에 있는 우체국 직인을 쫓아 엄마를 찾으려고 했었다. 하지만 겨우겨우 힘들게 찾은, 바로 그 직인에 나와있는 시부야 1국 우체국 앞에서, 그녀는 발걸음을 돌린다. 20살이 되면 모든것을 설명해주기로한 엄마를 믿기 때문일까, 아니면 한통의 편지에 담긴 세상이 아니라, 그녀에서 보여질 적나라한 진실이 두려워서 였을까. 우리는 그저 짐작만 할뿐, 그 이유는 알지 못한다. 중요한 것은 후키는 거기서 발을 돌렸다는 것일뿐.










19세의 생일. 어김없이 엄마에게서 편지가 왔고. 후키의 친구가 도쿄에 와서 그 편지를 전해준다. 그 친구는 오키나와를 떠나 대학교에 진학했지만, 학교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이상하게 섬에 두고온 소와 밭이 눈에 밟힌다면서. 후키도 말한다, ㅡ 나도 돌아갈까.




영혼의 빛이 죽어가던 후키에게 다시 불을 지핀건 다름아닌 그날의 엄마편지였다. 20살이 되는 생일에 도쿄의 어느 다리에서 만나자는 엄마. 후키는 다시 꿈을 꾸기 시작했고, 다시 힘이 나기시작했다. 1년후 만날 엄마앞에 당당히 서고 싶은 후키.



그녀는 바쁜 어시스턴트 와중에도 틈틈이 자신만의 작품을 만들어간다. 밤늦도록 암실에서 사진을 현상하고, 본인이 구상하는 사진을 찍기위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그녀는 1년전 그녀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곧 엄마를 만날것이므로.










드디어 기다리던 20살의 생일. 엄마의 편지에 나와 있는 그 다리에, 약속시간에 맞춰 간 후키. 그녀의 손에는 공모전에서 입상한 그녀의 사진작품이 실린 잡지가 들려있다. 오직, 엄마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하지만 그곳에서 만난건 할아버지였다.  할아버지가 엄마를 못만나게 보내버렸다고 오해하고는, 그동안 꾹꾹 참아온 설움과 분노를 할아버지에게 쏟아붓는다. 그러고는 엄마의 편지를 붙인, 그 시부야1국 우체국으로 간다. 우체국장님을 불러달라고. 이 편지를 붙인 사람을 만나야한다고. 우리엄마라고. 우체국에서 애원하는 후키에게 국장이 나타난다. 그리고 ㅡ 후키는 모든 진실을 알게된다.











사실은 후키가 여섯 살이던 해, 그녀의 엄마는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후키의 엄마, 그녀 역시 그녀의 어머니를 어린나이에 여의었기에, 후키 곁에 엄마로서 오래오래 있고 싶었었다. 하지만 그럴수없음에 슬퍼하던 그녀는, 할아버지의 의견을 받아들여 후키에게 하고 싶은 말들을 병상에서 편지로 쓰기 시작했다.




7살. 9살. 14살. 18살. 매 해, 매 순간, 딸에게 하고 싶은 말과 조언들을 미리 써내려가는 그녀. 그리고 그편지를 할아버지가 매 해 후키에게 붙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진실을 알게된 후키는 그 길로 오키나와행 배를 타고 돌아온다. 이제는 아버지 사당 옆에 어머니 사진이 올려져있다. 20살이 되기전까지 기다려온 어머니의 사진. 그리고 실감하는 어머니의 죽음. 후키는 오열한다. 더이상 어머니가 계시지 않는다는 현실과 맞부딪히는 순간이었다.










후키는 그동안 보물처럼 간직해온 어머니의 편지들을 다시 읽어본다. 처음으로 받았던 7살 생일편지부터, 하나하나.




느낌이 다르다. 그저 도쿄에 계신 엄마가 보낸 생일편지라고 생각하던 때와, 죽음을 앞두고서 딸에게 하고 싶은 조언들을 온맘다해 쏟아놓은 기록이라는 것을 알고 읽는 지금. 그리고 그 편지들을 읽으면서 받아들이게된다. 어머니의 부재와, 어머니의 죽음, 그리고 어머니의 사랑을.










후키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았다. 어떤 느낌일까. 속았다,는 기분일까. 혼자서 바보가 된 기분일까. 어떤 거짓말을 '바른' 혹은 '좋은' 거짓말이라고 수식해서는 안될것이다. 거짓은 거짓이니까. 하지만 나는 어딘지 그냥 알게 된다.




내가 느끼는 느낌을 글로 표현하긴 왠지 어렵게 느껴진다. 한마디로 적어내려가기가 어려울것만 같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또다른 일본영화, 미키 사토시 감독의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의 한 장면을 인용하고 싶어진다. 이 영화는 내가 20번도 넘게 본, 너무 좋아해서 감히 리뷰를 남길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로, 애정하고 생각을 많이하게 되는 영화인데, 이 영화에 이런 장면이 있다. 주인공 우에노 쥬리가 오랜만에 본가에 홀로 계신 아버지를 뵈러갔을 때였다. 요즘 어떤 세대인데 집에 전화도 두지 않냐고 타박하는 우에노쥬리에게, 아버지는 당신은 불편하지 않으니 괜찮다고 하신다. 딸이, 이제 아빠도 늙었다고, 언제 도움이 필요한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고 하자, 그 아버지는 말한다. ㅡ 그게 좋다고. 내가 죽었다고 바로 아는것보다 시간이 흐르고서 '아, 오래전에 돌아가셨구나'하는 편이 덜 슬프다고.




꼭 같은 맥락은 아닐것이다. 이 영화가 말하고자하는 메시지도 이게 초점은 아닌것도 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든다. 이미 오래전에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10년 넘어 알고서 받아들이는것. 어쩌면 그것은, 어제 돌아가신 것보다 그 슬픔을 극복하기 더 나을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어떠하였든,

후키에게 엄마는, 돌아가셨어도 살아계셨으니까.











후키가 꼬맹이인 시절, 마을전체 축제 준비하면서 힘들어 하는 후키에게 엄마의 '힘내'라는 말은 후키의 눈물을 멈추게 해주었고, 어딘지 할아버지와 서먹해지고 반항기가 생기던 사춘기의 후키에게 할아버지의 속깊은 마음을 전해준것도 엄마였고, 진로로 고민하는 후키에게 꿈을 좇으라고 응원해줬던 것도 엄마였고, 꿈을 좇는게 힘에 겨워 힘이 빠진 후키를 다시 일으켜세운 것도 다름아닌 엄마였다.



분명 후키의 엄마가 살아있었다면, 이 모든 격려와 조언을 바로 곁에서 살아서 해주었겠지. 하지만, 후키의 엄마는 죽어서도 매년 그녀 곁에서 아낌없는 격려와 조언을 해온 것이다.










사실, 스토리는 식상하리만큼 뻔했다. 너무많은 극적인 이야기와 반전스토리를 접해온 우리에게, 이런 스토리는 작위적 신파극, 말그대로 영화같은 이야기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영화의 '극'초반부에, 함께 영화보는 사람이 저 엄마는 이유가 뭘까,라고 하는 가벼운 질문에, 엄마 죽은거 아냐?,라고 툭 답할 정도 였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이 영화를 바라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영화를 볼때에 그런 시각으로만 바라본다면, 영화는 끊임없이 예상을 뒤엎을 자극과 파격과 충격만 추구하게 될것이고, 그러한 위험한 자극의 끝은, 퇴폐와 잔인함과 잔혹함으로만 얼룩지고 말 테니까 말이다.




이 영화는  '아름다움'으로 봐주었으면 좋겠다. 조용한 오키나와 섬마을을 정경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구성원들의 순수한 마음, 그리고 딸을 향한 애틋한 모성애. 그것을 한폭의 그림처럼 담아낸 후지이 마사유키의 영상미에 감탄해주었으면 좋겠다.




지루하지만, 지루하게 보고싶지 않은 영화.

 ㅡ 그렇다. 이 영화는 참, 아름다운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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