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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약사 Apr 03. 2017

인간 내면의 심연까지 들여다보는 영화

ㅡ 영화 《분노》, 감독 이상일





그저 오랜만에 영화관을 가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어쩌다 보게 된 시놉시스가, 꽤 흥미 위주의 스릴러 같아 보였기에, 이런 류의 스릴러 영화에서 기대할 법한 단순한 재미과 긴장을 기대하고서 영화관을 찾았다. 그뿐이었다. 특별히 무언가 생각하고 보게 된 영화는 아니었다.










"분노". 영화의 제목 치고는 꽤 그로기스럽게 느껴졌다는 건 부정하지 않겠다. 하지만 영화의 전반부까지만 해도, 그저 그런 스릴러 영화를 기대했을 뿐이었지만, ─ 이 영화는, 나의 그런 기대를 보기 좋게 져버렸다.




솔직한 감상을 원하는가. 그렇다면 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보러가지 말라고 할 것 같다.  이런 류의 일본 영화에 흥미가 있지 않은 사람이라면, 이 영화가 그다지 매력적이진 않을 것이다. 러닝타임 2시간 30분가량.

그렇다. 이 영화는 꽤 길다. 게다가 꽤 '마이너' 적인 부분이 없지 않다.










하지만,
일본영화는
볼 때는 재미없다가,
보고 나서 오래간다.





─ 적어도 나는 그랬다. 일본영화가 볼 때도 재미있는 경우도 있었지만, 볼 때 재미없던 영화도 보고 나서 1-2시간 후부터 그 잔상과 상념이 오래가곤 했다. 이 영화도 그랬다. 단순한 살인마를 추리해내는 범죄 스릴러에 그쳤다면, 아무런 뒷맛이 없는 영화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영화는 2시간 30분이라는 시간 안에 담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았다. 그리고 관객은, 영화관에서 보는 동안에는, '무슨 말이 이렇게 많아?' 내지는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거야?'라고 궁금해하다가 결국에는,  '뭐가 이렇게 길어?'로 짜증의 종지부를 찍고 말지도 모른다.  끝나 둥 마는 둥 어색한 시점에서 갑자기 새까만 화면으로 바뀌는 찰나, '뭐야?'라는 어색한 물음표와 함께 엔딩 크래딧이 올라가는 것을 등지고서 영화관을 나설 때만 해도, 그저그런 영화를 한편 보는 데 꽤 긴 시간을 죽이고야 말았다는 허무함으로 나서게 될 것이지만, 왠지 집에 가는 내내, 집에 와서도 내내, 영화의 잔상이 아른거린다.










3명의 살인 용의자 중에서 진짜 살인마가 누구인를 찾는 것이 중심인 것 같지만, 사실은 그 내면에 담긴 '인간'의 이야기가 더 짙은 영화. 어떻게 불신하고, 어떻게 신뢰하고, 어떻게 변하고, 또한 어떻게 변하지 않는지. 신뢰가 불신으로 바뀌는 순간들을 목도하며, 우리관객은 인간의 감정이란게 얼마나 간사한지 다시금 깨닫고야 만다. 그리고 그러한 필연적 간사함을 가슴에 지고서 방황하는 내면을 지켜보게 된다. 또한 영화의 제목에 담긴 '분노'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지, 우리는 어떨 때에 분노하는지, 무엇이 정당한 분노인지, 하지만, 그 정당한 분노는 어디에도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사실. 우리는 그 텁텁한 마음을 스크린 가득히 받아들이게 된다.




분노라는 감정에 대한 고찰 외에도, 이 영화에는 인간의 내면에 대한 다각도적인 고찰이 담겨있다. 그러한 내면을 묘사함에 있어서, 일본영화 특유의 섬세하면서도 감상적 표현들이 녹아내리고 있다.




인생의 나락으로 떨어지고서야 돌아온 가출소녀의 아버지는, 그녀를 온맘으로 아끼고 위하는 듯해 보여도, 실상은 그녀가 행복해져서 잘 살아갈거라고 가장 믿지 못하는 사람 중의 한 이었고.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하고 신뢰한 상대가, 아주 작은 계기로 불신의 상대로 바뀌고서는, 결국에는 도망치고 마는 연인들. 그들은 도망치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죄책감과 의구심으로 갈팡질팡하며, 그 상대를 그리워하고,찾고 있고.

가장 정상적이고, 쿨하고 행복해보였던 사람이, 그 속내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이코일 수 있고,

절대적 신뢰에 대한 절대적 배신, 그것은 한 선량하고 순박한 사람이 살인을 저지를 정도의 분노를 불러 일으키고,

사이코의 끝은 결국 그에 상응하는 또다른 분노로 끝이 나고 말 것이라는 것.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닌 세상에 살기에,

모든것을 보여주면서 이해받으면서 살 수도 없다는 아이러니한 답답함.













피해자들의 피로 한 쪽 벽에, 성낼 노 '怒'자를 커다랗게 적은 살인마. 그 사이코 살인마에 대해, 목격자는 이렇게 말한다.




그렇다고 그 사람이 안됐다고 생각하지 말아요.
그 사람은 평소에는 누구보다도 남을 업신 여기는 사람이었어요.





살인을 저지른 날은, 유난히도 더운 날이었고, 그는 일용직 노동자를 고용하는 어떤 회사의 장난기 어린 사기에 당해서  그 땡볕 더위에 길을 헤매야 했었고, 그리하여 그에게 차가운 물 한잔을 떠주며 그를 동정하는 무고한 사람을, 아무 이유없이 살해하였다는 것. 그것이 그가 불쌍한 일용직 노동자였고, 날이 더웠고, 회사 고용주가 악덕했다는 사실로 이해받아야 하는가─. 절대 아니다. 그래서는 안된다. 그의 '분노'는 절대로 '분노'가 아니었어야 했다. 그런 분노는 분노가 아니다. 그는 단지 사이코, 소시오패스에 불과할 뿐이다. 그는 정말로 분노해야 할 상대, 정말로 억울한 일을 당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오히려 업신여기고 비웃었고, 심지어 즐기고 재미있어 했었다. 결국, 그의 분노는 과장되고 가장된 분노일 뿐이다.



그리하여 영화가 끝나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 거짓된 분노가 판을 치는 세상 속에서, 정말로 억울하고 분노해야 할 사람들은 아무에게도 제대로 말하지 못하고, 말한다고 할지라도 그 감정을 이해받지도 못할 것이고, 결국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속으로 삭이고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아무리 분노가 가슴에 턱턱 막혀와도, 그 당사자가 할수 있는 말은 오직 하나, ─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주세요.'




왜냐하면, 말해봤자 달라질 것이 없기 때문에. 그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기에, 그 분노와 억울함을 가슴에 안고 스스로 살아가는 수 밖에 없다는 것. 타인에게 나 자신을 이해시킬 수도 없고, 이해받을 수도 없기에.




그는 오로지 드넓은 바다를 향해 소리를 치는 것이 전부일지도 모른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팻말을 들여보여도 결국 외면 받을지도 모르고, 그 극단은, 분노의 대상을 찔러죽이는 일이겠지만, 사실 그것이 궁극적 해결책은 되어주지는 못할 것이다.











이 영화를 본 사람들마다 감상은 다를 것이다. 이 영화는 2시간 30분동안 너무 많은 관점과 너무 많은 내면심리와 너무 많은 생각을 담아내고 있다. 그러기에 나의 감상은 어디까지나 나의 감상일 뿐이다. 그리고 ─ 여느 일본영화가 종종 그러하듯 ─ 나는, 또 다른 시기에 이 영화를 본다면 또다른 생각과 감상을 갖게 될지도 모른다. 지금 보이지 않았던 대사가 가슴에 와서 쿡 박히고, 지금 보이지 않던 배우의 연기가 눈동자에 아른거릴지도 모른

다.






너무나 믿었던 사람이기에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어요.





영화를 본 후 몇 시간 동안, 내 귓가에 맴돌았던  대사. 정확히 말하자면 영화거의 다 끝나고 나서, 그저 티비의 뉴스에서 보도되던 내용의 일부였을 뿐이었는데, 왜 이렇게 귓가에 남아도는 것일까. 한 순박하고 순수한 영혼에 입은 상처가 내 가슴속에도 이입되어 같이 상처받았기 때문일까. 나는 그 세상에 묻지 않은 순수한 영혼이 분노로 얼룩지고 만 그 모습이 가슴 아팠던 것이리라. 그리고 그것의 해법이 오직 그 극단적인 방법 뿐이었을까, 라는 안타까움을 느끼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 극단적인 방법 외에 분노를 표출할 방법이 달리 떠오르지 않는다. 그래서 더욱더 공감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리하여
이 영화는,
괜찮은 영화다





꽤 많은 관객에게서는 외면 받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리하여 꽤 많은 지인들에게는 감히 추천할 수 없는 영화이겠지만, ㅡ 이 영화는 괜찮은 영화다. 그리고 이 영화의 메시지가 가슴에 울리는 관객이라면, 같은 감독의 작품, 《악인》도 추천한다. 답답하지만 그러한 현실을 냉철하게 꿰뚫은 스토리. 그런 냉철한 시선에도 불구하고 대놓고 시니컬하지 않게 표현해내는 세련됨. ㅡ 아, 역시 이 영화는 괜찮은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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