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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약사 Jan 04. 2017

곁에서 잠시만 쉬었다 갈게요

《내 옆에 있는 사람》 ─  이병률








술을 마신다는 것은 내가 젖는다는 것.
술에 취한다는 것은 내가 잠긴다는 것.
술이 깬다는 것은 나에게 도착한다는 것.






꽤 늦게 읽었다. 꽤 늦게 접했다. 늘 서점에 도착하면 제일 앞에 보란듯이 누워있는 베스트셀러 칸은, 마치 N극과 N극을 가까이 대어놓을 때의 모양으로, 스르륵 피해서 지나가 버리는 나이기에. 이렇게 유명한 이병률 시인의 에세이 집을 이제서야 읽을 마음이 생겼나보다. 



사실은 이런류의 에세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요즘 SNS에 유행처럼 떠돌아 다니는 '좋은 글귀'로 치부될 법한 그런 류의 에세이. 감성적이기 위한 감성적인 글. 아름답게 쓰기 위해 아름답게 쓰인 글. 나는 분명 또다시 나만의 색안경을 끼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이런 나임을 알기에, 한동안 이병률씨의 책은 들었다 놓았다를 수어번 했었다. 그러다가 문득, 그 색안경을 끼지 않고 볼 용기가 생길 즈음, 나는 이 책을 다시 들었다. 





낯설고 외롭고 서툰 길에서
사람으로 대우 받는 것,
그래서 더 사람다워지는 것,
그게 여행이라서.





 타박타박 걸으면서, 술 한잔 걸치고, 어깨엔 오래된 카메라 하나, 배낭은 가볍게, ─ 딱 이런 느낌의 책. 처음 만나는 사람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은, 그런 정답고 그리운 느낌. 참 글이 예뻤다. 쉼표도 예뻤고, 마침표도 예뻤고, 문단과 문단 사이의 여백이 예뻤다. 이 책은, 이병률 씨의 책은, 참 예쁜 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류작가의 글과는 다른 남성적인 분위기도 풍긴다는 건 또다른 아이러니일지도. 그 아이러니를 모두 껴안고서도, 이 책은 참 예쁜 책이다.





분명한 건, 사람 때문에 마음이 조금 기울었을 뿐인데 이럴 땐 마음을 말려야 되는 것인지 다려야 하는 건지 아니면 못을 쳐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것이다. 사람은 접으면 접혀지고 자르면 잘라지지만, 마음은 접어도 접히지 않고 잘라도 잘라지지 않는 게 무섭다.

- 본문 중에서 




어떤 스토리가 있다거나, 어떤 스토리가 감동이 있다거나, 그런 류의 감상은 없을지도 모른다. 그저, 잠못드는 밤에 스르륵 책장을 넘겨보다가, 흠칫, 그가 적어놓은 한 문장에 꽂혀 밤잠 설치게 되는, 그런 책일지도 모르겠다. 그가 쏟아내는 글자들의 서걱거림이, 어떨 때는 따뜻한 아침햇살 같기도 하고, 어떨 때는 다홍빛의 석양같기도 하고, 어떨 때는 차디찬 얼음 알갱이 같기도 해서, 오래오래 곁에 두고 다시 읽고 싶어 지는 책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 이 책은 곁에 두고 싶은 책이다. 나의 감정 상태에 따라서 읽히는 글귀가 달라질 것이고, 느끼는 감동이 달라질 것이고, 눈에 들어오는 단어가 달라질, 그런 팔색조 같은 책. 그렇게 오래오래 곁에 두고 보고 싶은 책. 




앞을 향해 정신없이 내달려야 하는 현대 사회 속에서, 내가 진심으로 쉴수 있는 1평도 안될 내 이불 속에서 그 지친 하루를 가다듬을 때, 네가 있어줬음 좋겠더라. 오늘도 나의 머리는,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뻥튀기 기계 같이 푸식푸식 뜨거운 증기를 뿜어대고, 삐삐 거리며 끓어오르는 오래된 스테인리스 주전자 같았었는데, 그 옆에 네가 있어주면 왠지 그 열기가 식는 것 같더라. 그런 사람이 있다면, 아니, 그런 사람이 없다면, 나는 이 책을 내 침대 머리 맡에 두리라.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생길수록 살고자 하는 길의 방향이 더 선명해지고, 살아가야 할 이유 또한 명백해지니 나는 그저 그것이 고맙다.

습격을 받아 전부를 잃어버려 덮어도 덮어지지 않는 마음이 있기는 해도 이제는 괜찮다. 더 큰 파도를 기다린다. 더 큰 파도가 나를 덮쳐도 기꺼이 맞이하겠다. 세상 끝까지 휩쓸려가서 찬란히 쓰려져주겠다.

- 본문 중에서





무조건 토닥이는 목회자 같은 말만 늘어놓았다면 이 책이 이렇게 좋아지진 않았을 지도 모른다. 이병률, 그는 토닥이면서, 쉬어가면서, 고민하면서, 그러면서도 부딪혀서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더욱 공감이 되고 치유를 받게 되는 그런 책. 




요즘처럼 차가운 겨울이면, 따뜻한 차 한잔과 함께 이 책을 읽어야만 할 것 같다. 어쩌면, 이병률 시인은 따뜻한 술을 함께 하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우리가 산에 가는 이유는 그곳에 쉽지 않은 것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 쉽지 않은 것이 우리를 달라지게 할 것이라 믿기 때문에 우리는 산에 오르는지도 모른다. 이 추측은 작게나마 진실이다.



사랑과 여행이 닮은 또하나는 사랑이 끝나고 나면 여행이 끝나고 나면, 다음번엔 정말 제대로 잘 하고 싶어진다는 것, 그것이다.



신은 인간에게 견딜수 있을 분량만큼의 슬픔만 나눠준다고 하지만 그 슬픔을 딛고 뛰어넘을 수 없을 때 인간의 삶은 그저 밑으로 줄줄 샐 거라는 사실도 가르쳐 주었습니다.



비극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대신 눈물이라는 감정만 사용했으면 싶다. 상처라는 말에 끌려다니기보다는 무시라는 감정으로 버텨냈으면 한다.



개인적으로, 안 좋은 저 일과 안 좋은 이 일이 겹쳤으면 한다. 그 국면을 뛰어넘기 위해 한번도 가져본 적 없는 에너지를 쏟게 될테니, 그런 다음 엄청난 기운으로 솟구쳐 되살아날 테니



사람은 그 자체로 기적이에요. 사람이 사람을 만나고, 마음 안에 그 사람을 들여 놓는다는 것은 더 기적이에요.



다시는 만날수 없을 것 같고 다시는 볼수 없을 것 같아서 그것만으로 아름다운 사람.

나에게 그만큼인 사람이 바로 당신입니다. 물이 닿은 글씨처럼 번져버릴까, 혹여 인연이 아닐까 나는 목이 마르고 안절부절입니다. 부디 내 옆에 있는 사람이 되어주세요. 이 간절함으로 그래도 된다면 당신을 세상에 고소할 것이고, 나는 세상이 당신을 가둬놓은 아름다운 감옥으로 이사할 겁니다.



하지만 어쩔 것인가. 소년의 시절이었을 때 그 아득한 벼랑 끝과 스무살 초입에 피었던 수많은 꽃들의 냄새를, 어그러지고 버그러지는 일만이 그때의 최선이었음을, 하고 싶은 것만 많았고 실제로 할 수 있는 것들은 하나도 없었던 그때를 이제는 비루하게나마 기억하는 수밖에 내겐 별다른 재간이 없는 것이다.



아무도 모르는 사이, 거의 모든 일은 일어납니다.



시간이 하는 일입니다. 사람이 하는 일은 억세고 거칠어서 마음을 도려내지만, 시간이 하는 일은 순하고 부드러워 그 도려낸 살점에다 힘을 이식합니다.



자기 인생에 대한 분명한 태도를 갖는것, 그건 여행이 사람을 자라게 하기 때문이야.



여행은, 신이 대충 만들어놓은 나 같은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손을 뻗어야 하는 진실이야. 그 진실이 우리 삶을 뒤엉켜놓고 말지라도, 그래서 그것이 말짱 소용없는 일이라 대접받을지라도, 그것은 그만큼의 진실인거야.



사람이 헤어지는 것에는 별 이유가 없는 법이다. 사람이 만나지는 이유가 특별한 것에 비하면 말이다.



아름다웠던 낮과 밤은 그대로 두어야한다. 사랑하지 않는 사랑이라면 다른 세계로 옮겨가야 한다. 더이상 감정을 위조할 수 없다면 새로운 시간과 새로운 사람으로부터 새로운 충격을 받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기에 사랑을 사려드는 이는 있지만 이별은 값이 엄청나서 감히 살 수도 없다. 그래서 이별은 사랑보다 한 발자국 더 경이에 가깝다.



땅만 바라보고 살았던 사람에게 어느 밤의 별들은 그 사람을 다른 세계로 이끌어준다. 이 세계가 아니면 다른 세계는 절대 존재하지 않을거라고 믿게 하는 사랑. 그 사랑은 몇 번의 세계를 거치고 훈련하면서 먼 우주로 나아갈 수 있다. 작은 물이 모여 바다로 간다는 그 말처럼 사랑은 고통을 치른 만큼만 사랑이 된다.



이 사실을 알기까지 오래 걸렸습니다.

내가 좋은 사람이 되지 않으면

절대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없다는 것을요.

내가 사람으로 행복한 적이 없다면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줄수 없다는 것을요.

내 옆에 있는 사람이 왜 그 사람이어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내가 얼만큼의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서라는 것을요.



사랑은 0 이다. 사랑은 감정으로 숫자를 늘리는 일이지만 결국엔 0 이 된다. 0 하고는 상관없는 듯 우리는 100처럼 사랑하지만 결국엔 시간에 의해 바람에 의해 요지부동의 0 에 도착하고 만다. 아무 감정이 없는 아주 무심한 진공의 상태.



사랑을 통해 성장하는 사람. 사랑을 통해 인간적인 완성을 이루는 사람은 다른 사람과 명백히 다를 수밖에 없다. 사랑은 사람의 색깔을 더욱 선명하고 강렬하게 만들어 사람의 결을 더욱 사람답게 한다. 사랑은 인간을 퇴보시킨 적이 없다. 사랑은 인간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다.




나는 지금 여행중이고 안경을 가져오지 않아 먼 것을 보는 일이 어렵지만 두고 온 것을 아까워 하지 않기로 한다. 먼 것을 흐릿하게 보는 것으로 다행이며 가까운 것을 꼭 붙잡고 있을수 있으니 다행인 것으로 치면 그만이다.



나를 앞세우는 데 열심일 것인가. 그 사람을 앞세우는 게 중요할 것인가. 내가 먼저 다가갈 것인가. 그가 먼저 손 내밀기를 기다릴 것인가. 나를 사랑해주길 바랄 것인가. 나 스스로 사랑이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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