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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약사 May 18. 2017

당신에게 필요한 시간

《철학이 필요한 시간》 ㅡ 강신주







삶에서 만날 수 밖에 없는 타자와의 관계,
그리고 그로부터 발생하는 자신의 감정을
회피하지 말고 정면으로 응시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삶의 현장에서
기쁨과 유쾌함을 지키기 위한 노력도
게을리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또 다시 나의 버릇이 발동했다. 흔히 말하는 베스트셀러는 읽지 않는 버릇. 그것은 바꾸어 말하면, 유행이 지난 후에야 그 책을 집어든다는 뜻일지도. 출간과 동시에 세간의 주목을 받으며 많은 독자를 만들어내는 책에 대해서는, 이상하게 그 시기에는 손이 가지 않는다. 그리하여 나는 이 책 역시 이제서야 집어들고 말았다.



이 책에 대한 감상을 적기에 앞서, 가장 압축된 나의 감상을 말하자면 ─ 아쉽다! ─ 일 것이다. 그렇다. 이 책은 아쉽다. 아쉬워도 너무 아쉽다. 무엇이 아쉬운가 하니, 짧아서 아쉬웠다. 이 책은 각 장 마다 유명한 철학자들의 책이나 사상을 소개하면서 저자 강신주 본인의 해석과 감상을 함께 서술해 놓았다. 하지만 이 책의 하나의 장에 소개된 그 철학은, 몇 백장으로 풀어써도 모자란 것이 아닌가. 그리고 저자인 강신주 역시 본인의 목소리를 살짝만 비추고 끝맺고 만다. 그 과정이 너무 아쉬웠다. 그럴 수밖에 없고, 그럴 의도로 엮어진 책임을 충분히 알고서도, 나라는 독자는 참 욕심도 많았다. 그래서 더 말해 달라고, 더 깊이 보여달라고 조르고 있는 모양인가 보다.





p80.

때로는 살아가는 것이 힘들게 느껴질 때가 있다. 새롭게 펼쳐진 삶의 환경과 우리 내면의 습관이 불일치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이런 불일치에서 우리는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하나는 기존의 습관대로 환경을 바꾸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환경에 맞게 자신의 습관을 새롭게 형성하는 것이다. 어느 것이 옳은 선택일까? 삶의 환경이 타락했다면 습관을 지키는 것이 더 좋을 수도 있다. 아니면 삶의 환경이 더 좋아진 것이라면 새로운 습관을 만드는 것이 더 탁월한 선택일 수 있다. 어떤 선택이 옳은지 미리 결정할 수 없다. 분명한 것은 그것이 우리의 삶을 더 풍성하게 만드는 것이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의 내용이 아쉽다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의 취지 자체가, 일반적인 독자들이 쉽게 접할수 있도록 짤막짤막하게 철학자들의 사상을 소개하는 것이었고, 그를 통해 인문학의 세계로 독자들을 인도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성공적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의 짧은 이야기가 궁금해서 관련 서적들을 더 깊이 찾아보고 싶어졌으니까.




이 책은 정말 어렵지 않다. 쉽게 읽힌다. 아무리 어려운 철학적 이야기도 저자의 손을 거쳐 단순명료하게 뚜렷한 모습을 드러낸다. 그래서 마치 너무 단순하고 뻔한 얘기를 하고 있는 것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 책을 읽어 보기를 권하고 싶다. 하지만 이 책에서 멈추면 안된다고도 말하고 싶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이 책만으로는 부족한 것은 분명하다. 이 책의 내용만으로 그 모든 일면을 파악하고 그 내용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오히려 이 책은 저자 강신주가 던져주는 에필로그라고 받아들여야 한다. 여기서 어떤 결론을 얻어내고, 어떤 정보를 얻어서, 다른 사람들 앞에서 '뭐 좀 아는 척'해서는 절대 안될 것이다.




그리고 설령 조금 철학적 감상을 피력하고 싶어도, 이 책의 감상은 저자 강신주의 감상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새로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저자와 같을 수도 있고, 큰 맥락만 같이 할 수도 있고, 조금은 어긋날 수도 있다. 그것이 당연하다. 이 책의 저자 역시, 우리가 그의 생각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인문학 좀 아는 척 하는 사람'이 되길 바라진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책에서 멈추어서는 안되고 본인이 번쩍이는 영감을 얻은 철학에 대해서는 좀더 깊이 다룬 다른 책을 반드시 읽어보아야 한다. 그러한 시간들이 때론 지리하게 길어질지라도, 우리에게 꼭 필요한 시간이 아닐까.




만약 그러고 싶지 않다고? ─ 그렇다면 어디가서 아는 척 하지 말아야 한다. 지성이라는 것은 시간과 노력을 들인 자만이, 그것도 조심스럽게 조금 내보일수 있을 법한 것이 아닐까.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글귀 몇 자, 정직성과 책임감 없는 사람이 써놓은 글에 언급된 문장 몇 줄, 전체 맥락은 없이 조금만 떼어내놓은 발췌부분, 그런 것들로 자신의 지식을 채워서는 안된다. 우리는 무언가를 입밖으로 내기 전에 그 말에 대한 충분한 책임감을 가지고자 하는 의식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그 책임감을 갖기 위해, 우리는 우리가 밖으로 뱉어낼 말에 대해, 충분한 사유를 거쳐 얻게된 완숙된 지성을 소유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 글을 쓰는 나 역시 한없이 부족하지만, 적어도 그렇게 하기 위해 노력하고 싶다.





p109.

드디어 우리는 '진인사대천명'이란 익숙한 말이 얼마나 무서운 교훈을 가지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이 말의 논점은 바로 '진인사',  즉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다한다'는 구절에 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최선을 다해 수행해야 한다. 그럴 때에만 자신이 할 수 없는 것, 다시 말해 겸허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한계 상황에 이를 수 있고, "이것이 나의 천명이다"라고 이야기 할 수 있다. 물론 최선을 다한 결과는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것은 모두 나의 역량 밖의 일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결과가 좋아도 감사하게 받아들일 뿐이고, 반대로 결과가 나빠도 겸허하게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맹자가 "자신의 도를 다하고 죽는 것이 바로 올바른 명"이라고 말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나는 아마도 맹자와 노자에 관한 책을 더 찾아보게 될것 같다.











p43.

나는 어려서부터 성인의 가르침을 읽었으나 성인의 가르침을 제대로 알지 못했으며, 공자를 존경했으나 왜 공자를 존경해야 하는지를 스스로 알지 못했다. 그야말로 난쟁이가 광대놀음을 구경하다가 사람들이 잘한다고 소리치면 따라서 잘한다고 소리를 지르는 격이었다. 나이 오십 이전의 나는 정말로 한 마리의 개에 불과했다. 앞의 개가 그림자를 보고 짖으면 나도 따라서 짖어댔던 것이다. 만약 남들이 짖는 까닭을 물으면 그저 벙어리처럼 쑥스럽게 웃기나 할 따름이었다.

ㅡ 《속분서》, 이지





p104.

우리는 자신과 대화하는 사람이 어떤 삶의 문맥을 가지고 이야기하고 있는지 섬세하게 읽어내야 한다. 자신의 문맥에 따라 상대방의 이야기를 재단하는 순간, 오해와 갈등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p153.

스스로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는 아이히만에게 아렌트는 '순전한 무사유(sheer thoughtlessness)'의 책임을 부과한다. 그녀는 더불어 살아가는 삶에서 '사유'란 하지 않아도 상관이 없는 '권리'가 아니라 반드시 수행해야만 할 '의무'라고 강조한다.




p156.

아렌트는 우리에게 묻고 있다. "지금 당신은 근면과 성실이란 미명 아래 사유의 의무를 방기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지금 당신은 생각해야 할 것을 생각하고 있는가?"





p169.

선물을 받고 나면 항상 그 선물의 액면가와 유사한 대응 선물을 고르는 것이 우리의 일상적인 관례이다. 이것은 우리가 주고 받는 대부분의 선물이 명목상으로만 선물일 뿐, 그 이면에는 뇌물의 논리가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p171.

"우리는 순진무구함과 폭력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폭력의 종류를 선택하는 것이다. 우리가 신체를 가지고 있는 한 폭력은 숙명이다" ㅡ 메를로 퐁티, 《휴머니즘과 폭력》




p193.

누군가를 사랑하기에 앞서, 그가 누구이며 그리고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야 한다. 그렇지만 불행히도 우리는 누군가를 알아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그를 알려고 하는 존재이다.




p195.

나 자신의 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타자와 소통하기 위한 필요조건일 뿐 결코 충분조건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직 우리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 즉 타자에 대한 선입견을 비우는 데 최선을 다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기다려야 한다. 사랑하는 타자가 나의 수줍은 손을 잡아주기를.





p195.

타자를 사랑할 때 사랑하는 마음을 제외한 일체의 마음을 비워야 한다. 오직 비어 있는 잔만이 술이 가득차기를 희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p199.

깨달은 자의 마음은 맑다. 그렇지만 맑고 고요한 물이 외부의 바람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처럼, 맑은 마음은 타자에 대해 섬세하게 대응할 수 있는 마음이다.



p249.

현실 세계가 단순한 이미지들로 바뀌는 곳에서는, 이 단순한 이미지들이 현실적 존재가 되고 또한 무자각적인 행동의 효과적인 동인이 된다. 스펙터클은, 사람들로 하여금 다양한 전문 매체들에 의존해서 세계를 바라보게 하는 경향으로서(세계는 더 이상 직접 파악될 수 없다), 특권적인 인간 감각을 당연히 시각에서 찾는데, 다른 시대에 그 특권적 인간 감각은 촉각이었다.

ㅡ < 스펙터클의 사회 > 중



p259.

불확실한 결과가 충분히 예견될지라도 과감하게 낚싯줄을 던질 수 있어야만 한다.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기 때문이다.




p269.

빼앗으려고 한다면 반드시 먼저 주어야만 한다. 이것을 '은미한 밝음'이라고 말한다. 유연하고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는 법이다. 물고기는 연못을 벗어나게 해서는 안 되고, 국가의 이로운 도구는 사람들에게 보여서는 안 된다.

ㅡ 노자, <도덕경>, 36장




p273.

세상 사람들이 모두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강자는 반드시 약자를 핍박할 것이고, 부자는 가난한 자를 업신여기며, 신분이 높은 자는 비천한 자를 경시할 것이고, 약삭빠른 자는 반드시 어리석은 자를 기만할 것이다. 세상의 모든 전란과 찬탈과 원한이 일어나는 까닭은 서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단 반대하면 무엇으로 그것을 바꾸겠는가? 묵자가 말했다. "서로 사랑하며 서로 이롭게 하는 원칙으로 그것을 바꾼다"

ㅡ <묵자>




p295.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자신을 버리고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항상 기다릴 수밖에 없다. 사랑하는 '너'가 자유로운 결정으로 나를 사랑할 때까지 말이다. 이런 기다림을 유지한다면, 다시 말해 사랑하는 타자의 자유를 긍정한다면, 두 사람의 사랑이 항상 푸르게 유지될 가능성은 매우 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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