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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약사 Jun 12. 2017

우리는 우리 자신이 되어야 한다

ㅡ 에리히 프롬, 《소유냐 존재냐》





만약 나를 나의 소유라 가정하고
소유하고 있는 것을 잃어버린다면
그때의 나는 누구일까?



 누군가에게 좋아하는 책은 무엇인지 물어보고 그 책을 읽어보는 것은 참 흥미로운 일이다. 특히 그 누군가가 '인생의 책'이라고 말하기라도 한다면, 그 책을 통해서 나는 그에 대해 꽤 많은 부분을 알게 될 테니까 말이다. 그리하여 누군가가 '인생의 책'이라고 한다면 그 책은 꼭 읽어봐야 할 책이 아닐 수 없다. 이 책은 그런 이유에서 접했다.






소유에 대한 지배적인 지향성은
완전한 성숙이 달성되기 전의 시기에 나타나며,
만일 영속적으로 되면 그것은 병적이다.





 다만 급하게 구입한 이 책은, 이 책의 문제인지 에리히 프롬의 문체의 특징인지는 몰라도, 매우 안.읽.혔.다. 심지어 몇번을 읽어도 정체불명의 번역투 말투로 인하여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는 문장까지도 나오기도 했다. 아마도 나는 이 책 판본이 아닌 다른 버전의 "소유냐 존재냐"를 다시 읽어보아야 할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 이 책에서 에리히 프롬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만큼은 분명했다. 그리고 그 주제에 관하여 나 역시 반성 아닌 반성을 하였고, 다짐 아닌 다짐을 하게 되었던 것 같다. 또한 평소에 내가 느껴왔던 것과 비슷한 생각을 하는 그에게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p122.

각자의 몫이 타인의 몫과 아주 똑같아야 한다는 의미의 평등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들 역시 강한 소유지향을 가지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다만 그것이 엄격한 평등이라는 선입견에 의해 부인되고 있을 뿐이다.




 집착과 소유에 대하여 이렇게 철저하게 분석한 책을 접했던 적이 없다. 그리고 그 병적의 양상이 교묘하게 포장되는 모습까지도. SNS가 지나치게 발달하고 있는 요즘같은 때에, 에리히 프롬의 말들을 새겨듣지 않을 수 없다.



이미 자본주의의 사회에서 살고 있는 우리, 그리고 민주적인 정치체계를 취하고 있는 이 곳에서, 우리는 "평등"하게 "소유"한다는 것의 의미를 묘하게 왜곡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러한 주장을 강하게 하는 그들은, "평등"을 주장하면서도 실상은 "소유"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아닌가.





p235.

대부분의 소비가 수동성을 낳는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며, 또한 소비주의에 의해서만 충족될 수 있는 스피드와 새로움에 대한 요구는 불안감, 즉 내적인 자기도피의 반영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은 끊임없이 다음에 해야 할 일을 찾거나 최신의 소도구를 찾아 사용하는 것이 자신이 자기 자신 혹은 다른 사람에게 접근하는 것을 막는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난 이런 것을 가졌어' ─ 그 대상은 어떤 '물건'이 될수도 있고, '사람'이 될수도 있고, 일종의 '경험'이 될수도 있고, 심지어 어떠한 '이념' 내지는 '사상'이 될수도 있다 (어떠한 생각을 갖는 것은 지극히 지향해야 할 목표 중의 하나이겠지만, 변하지 않는 일종의 집념에 집착하고 그 사상만 끊임없이 합리화하는 것은 지양해야 하지 않을까)─ 라고 단순히 '보여주려고'하는 일련의 모습들은, 소유에 대한 집착의 병적인 결과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내가 소유하고 있는것을 내비추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이 병적인 모습은, 또 다시 새로운 것에 대한 갈망과 '얼리'하게 '어댑'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불안감과 혼합되어 더욱더 그로기스러운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그렇게 그로기스럽지 않다고 생각하는 뻔뻔함과, 심지어 그런 행동을 하지 않는 사람을 '혹시 문제있는거 아니야?'라고 음해하고 의심하는 것까지 더해지고 나면, 이것은 우리 모두가 큰 문제의식을 가지고 고치지 않으면 안 될 무언가가 아닐까. 그리고 더욱더 안타까운 것, ─ 그 병적인 결과물에 가슴 한구석 휘둘리고 마는 것. ─ 우리는 이러한 우리의 모습을 반성하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다.





내게 이 책을 소개해 주었던 사람은 분명 일반적인 경우보다는 존재지향적인 것은 맞았던 것 같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는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기에 앞서, 한번씩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라든가 '그것은 지나친 것 아닌가', '없어도 되지 않나' 라는 생각이 "사로잡혀" 있는 것만 같았다. 그리하여 충분히 가능한 상황에서의 일정량의 노력 내지는 일정량의 유희, 열정 조차 무언가를 소유하려고 하는 데에서 오는 '소비욕'으로 치부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그에게 언젠가 "당신은 '존재해야 한다'는 강박적 사고에 집착하고 있는 것은 아니냐"고 물어보게 될 것 같았다.






존재양식에서의 신념은
우선 어떤 관념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내적 지향이며 '태도(attitude)'이다.





'존재한다'는 것은 에리히 프롬의 말 처럼 어떠한 관념적인 적이 아니다. 말그대로 "내적인 지향"이고 "태도"이다. 누군가가 가진 것을 보고 '어떻게든 따라서 사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 내가 가진 것을 남들에게 내보이는 것에 집착하지 않는 것, 그동안 바랬던 무언가를 얻고 나면 그것에 시들해지고 얼마지나지 않아 새로운 자극을 찾아 헤매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 허세와 허영과 집착에서 다소 떨어져 있는 사람을 의뭉스러운 눈길로 음해하지 않는 것. 내가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 그대로 우뚝 존재할수 있는 것.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그렇게 집착에서 떨어져 나와서 자기자신이 오롯이 서 있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 지금처럼 SNS에 넘쳐나는 병적인 소비양상이 가라앉은 세상이 되는 것.






p233.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와 같은 전체적 목표를 지닌 청사진은 주로 사회주의의 부재를 은폐하기 위한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의 진부한 문구가 되고 말았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니 '지적 엘리트의 독재'니 하는 것도 '자유시장 경제'라는 개념과 같이 막연하고도 오해받기 쉬운 말이다. 그러한 면에서는 '자유'국민이라는 개념 또한 마찬가지이다. 마르크스에서 레닌에 이르는 초기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은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 사회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갖고 있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사회주의의 커다란 약점이었다.


p235.

지금껏 거의 손을 댄 적이 없었던 인간 요구의 본성이라는 문제에 관한 기초적인 연구가 새로운 인간과학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우리는 어떤 요구가 우리의 유기체에서 연유된 것이며 어느 것이 문화 과정의 결과인가, 어느 것이 개인의 성장의 표현이고 어느 것이 산업에 의해 개인에게 강요되는 합성품인가, 어느 것이 '능동화'하고 어느  것이 '수동화'하는가, 어느 것이 병리에 뿌리박고 있으며 어느 것이 정신적 건강에 뿌리박고 있는가를 결정해야만 한다.





하지만 어떠한 상황 혹은 태도가, 소비에 종속된 수동적인 것인지 아니면 자기자신의 존재를 키워나가는 능동적인 것인지 ─ 그것은 상당히 경계가 애매하고 기만적인 합리화가 얼마든지 가능하며, 적당한 뻔뻔함과 포장으로 충분히 타인들을 속일수 있는 부분이기에, 우리는 올곧은 태도를 취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기에 에리히 프롬은 그 본성을 깊이있게 연구하고 또 연구해서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학이 발전하고 새로움이 넘쳐나는 세상이 되면 될수록, 인간은 인간 본인 스스로 존재하기보다 과학적 발명품과 새로운 문명을 '소유한 자신'이 진짜 자신이라고 착각하고는, 그 소비의 대상과 자신을 동일화 하는 오류를 범하기 더 쉬워질 테니까.














p20.

"인간은 초인이 되었다... 그러나 초인간적인 힘을 지닌 이 초인은 초인간적인 이성의 수준에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그의 힘이 커짐에 따라 점점 그는 가련한 인간이 된다... 초인이 되면 될수록  자기 자신이 비인간적으로 된다는 사실에 우리는 각성해야만 한다."

ㅡ 알베르트 슈바이처





p25.

공산주의자는 그들의 체제가 계급을 폐지함으로써 계급투쟁을 종식시킨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허구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체제는 생활의 목적을 한없는 소비원리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더 많이 갖기를 바라는 한, 계급이 형성되게 마련이고 계급투쟁이 있게 마련이다.




p61.

소유형의 사람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에 의존하는 반면, 존재형의 사람들은 그들이 '존재한다'는 사실, 살아 있다는 사실 그리고 억제를 버리고 반응할 용기만 가지면 어떤 새로운 것이 탄생하리라는 사실에 의존한다.




p98.

모든 것이 다 갈망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물건들, 재산, 의례, 선행, 지식, 사상 등이 모두 갈망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것들은 그 자체로서는 '나쁘지' 않은데 나쁘게 변한다. 즉 우리가 그것들에 집착할 때, 그것들이 자유를 해치는 쇠사슬이 될 때 그것들은 우리의 자기실현을 방해하는 것이다.




p113.

무엇을 영속적으로 소유한다는 표현은 영속적이고 파괴 할 수 없는 실체라는 환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 가령 내가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나는 ㅡ 실제로는 ㅡ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내가 어떤 물건을 갖고 소유하고 지배하는 것은 사는 과정에서의 한 순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p130.

생산적 능동성은 내적 능동성의 상태를 나타낸다. 그건은 반드시 예술작품의 창조나 과학적 창조나 어떤 '유용한'  것의 창조와 결부되는 것은 아니다. 생산성은 정서적으로 불구가 아닌 한, 모든 인간에게 가능한 성격적 지향이다.




p137.

나의  행동이 부분적으로는 나의 존재를 반영할는지 모르지만 그것은 보통은 내가 가지고 있으면서 나 자신의 목적을 위해 쓰는 가면이다.




p144.

'거짓된 사랑', 즉 이기심의 공유는 사람들을 더욱 이기적으로 만든다. 진정한 사랑은 사랑하는 능력과 다른 사람에게 주는 능력을 증대시킨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특정한 인물에 대한 그 혹은 그녀의 사랑에 의해서 전 세계를 사랑하는 것이다.




p153.

소유는 사용에 의해 감소되는 어떤 것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존재는 실천에 의해 성장한다.



p205.

문제는 인간이 실제로는 최대의 '무력상태'에 있으면서  과학과 기술에 결부된 자신을 '전능'하다고 '상상'하고 있다는 점이다.



p228.

방종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되는 가능성으로서의 자유. 탐욕스러운 욕망의 덩어리가 아니라 언제나 성장이냐 쇠퇴냐, 삶이냐 죽음이냐의 양자택일에 직면하는, 미묘하게 균형을 유지하는 구조로서의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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