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행복약사 Jun 22. 2017

사랑은 수동적 감정이 아니다

ㅡ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언젠가 알랭드 보통의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을 읽고 브런치에 글을 썼을 때에도 나는 사랑에 대하여 '기술'이라는 표현을 썼었고, 그 표현에 대해서 가슴 아파 하던 독자가 계셨었다. 그 분이 에리히 프롬의 이 책을 접한다면, 책의 제목부터 "사랑의 기술"이라고 떡하니 적어놓은 것을 보고 다시 씁쓸해 하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러한 감정적 오해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서문에서 에리히 프롬이 스스로 밝히 이 책의 의의를 읽어보지 않을 수 없다.





자신의 전체적인 인격을 발달시키고자 적극적으로 노력해 생산적인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사랑을 위한 모든 시도가 결국 수포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는 점을 독자들에게 확신시켜 주려는 것이 바로 이 책을 쓰게 된 목적이다.

ㅡ 작가의 말 중





 사랑의 "기술"이라는 말로 감정이 메마른 듯한 인상을 주지만, 이 책의 궁극적 의의는 우리 모두 "전체적인 인격을 발달시키고자 적극적으로 노력해 생산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게끔 해준다는 것이다. 흔히 서점 베스트셀러칸에 놓여있을 법한 ─ 최정의 연애서와 같은 ─ 그런 표면적이고 얄궂은, 말그대로의 '기술'만 나열하는 조잡한 연애서가 아니다. 이 책은 '사랑'에 대해서 전체적이고 심도있는 고찰을 통해서, 우리가 어떠한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이 사랑으로 충만한 사람이 될수 있는가에 대한 적극적인 노력의 촉구인 것이다. ─ 그것은 사랑스러워지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랑을 할 수 있는 한 인격체로 거듭나기 위한 자기계발서와 같은 개념으로 받아들이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사랑은 수동적인 감정이 아니라 활동이다.
사랑은 '빠져드는 것'이 아니라 '참여하는 것'이자,
가장 일반적인 방법으로 사랑의 능동적인 특징을 나타낸다면,
사랑은 기본적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다 라는 말로 표현할수 있다.





흔히 '애정 결핍'이라는 단어를 쓰고는 한다. 그 단어는, 사랑을 많이 받지 못해서 그것에 대한 갈증을 느끼는 상태를 표현하고는 한다. 물론 가정적인 환경이나 사회적 환경으로 인하여 애정이 결핍되어 실제로 정신적인 장애가 된 상황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한 상황은 논외로 하고, 적어도 일상생활을 충분히 영위하는 일반적인 개념에서 사용되는 애정결핍에 대하여도 우리는 그것을 상대의 탓으로 돌리고 있지는 않을까.



 한 커플 안에서도, 마치 나만 더 해주는 듯한 기분이 들고, 상대는 받기만 하는 것 같고, 상대의 애정이 부족한 것 같아서 외롭기만 하고, 그런 감정상태에 빠지고는 한다. 그러한 감정들이 과연 '상대'에게만 짐을 지울 것이 맞는 걸까.





혼자 있을 수 있는 능력은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의 조건이 된다.





 우리는 혼자 서 있으면서도 사랑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그런 '강한' 사람이 아니라서 못해 ─ 라고 자기자신을 섣불리 규정짓진 말자. 설령 지금까진 그렇게 독립적인 생각을 하지 못하였다 할지라도, 에리히 프롬은 말그대로 '적극적으로 노력'해 나가보라고 한다. 지금까지 해본 적 없는 감정상태를 갖기 위해 불안한 마음이 생기더라도 용기를 가지고, 우리는 스스로를 사랑으로 충만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해야 건강한 사랑을 할 수 있고, 건강한 사랑을 줄 수 있다. 



 우리는 받기 위해 주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상대가 필요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나 스스로가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받을 생각으로 주는 탐욕과, 필요하기 때문에 사랑을 주는 기만을 행하지 말자. 우리는 그저 사랑을 해야 한다.





사랑한다는 것은
아무런 대가없이 자신을 내던지는 것이며,
우리의 사랑이 사랑받는 사람에게도
사랑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희망에
자신을 완전히 내던지는 것이다.





다만, 여기서 에리히 프롬은 현대 사회가 그러한 사랑을 할 수 있는 인격으로 성장하기에 어려운 구조를 가졌다고 비판하고 있다. 그러하기에 그러한 구조적 문제를 분석해서 바른 세상으로 이끌어 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어쩌면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문제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역시 구조 보단 사람이 먼저 서기를 바란다.




 내가 프로이트의 이론에 반대하는 가장 큰 이유도, 외부의 상황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만들어져버린 것이 지금의 나를 결정한다고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외부의 상황이 우리 부모님이든, 사회 구조이든, 나는 그런 것들이 나를 결정짓게 하고 싶지 않다. 수동적 의미의 "me"가 아니라, 능동적 의미의 "I"가 되고 싶다. 그렇기 때문에, 나 안에 만들어진 성격 구조를 바로 세워야 사회가 바로 선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이 부분에서는 프롬의 견해와 조금 엇갈릴지도 모르겠다. 





p63.

사랑이란 근본적으로 어떤 특정한 사람과의 관계가 아니다. 사랑은, 한 사람과 한 대상과의 관계가 아니라, 세계 전체와의 관계를 결정하는 '태도', 즉 '성격의 방향'이다. 만일 어떤 한 사람만을 사랑하고 그 외의 사람들에게는 무관심하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라 공서적 애착이거나 확대된 이기주의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이란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대상에 의해서 형성되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사랑은 수동적으로 만들어진, 그리하여 어느 순간 훅 빠져버린 사랑이 아니다. 굳이 '빠진다'는 표현을 쓰고 싶다면, 내가 의지를 가지고 빠진 것이 사랑이어야 한다. 어떠한 대상이 나를 사랑에 빠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기에 그 대상을 사랑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하여 그것은 프롬이 늘 강조하듯이, "태도"이자 "성격의 방향"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에는 반드시 일정부분의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고, 그 노력을 굳이 표현하자면 '기술'이라는 단어로 표현할 수도 있는 것일 것이다. ─ 다시한번 분명히 말하지만, 여기서의 '기술'은 그 단어에서 풍기는 작업의 정석 같은 뉘앙스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p125-126.

사랑은 오직 두 사람이 자기 존재의 중심으로부터 상대방과 관계를 맺을 때만, 그리고 그들 각자가 자기 존재의 중심에서 자신을 경험할 때만 가능하다. 오직 이와 같은 '중심적 경험' 속에만 인간의 현실이 있고, 오직 여기에만 생동감이 있으며, 오직 여기에만 사랑의 기초가 있다. 이렇게 경험된 사랑은 끊임없는 도전이다. 그것은 휴식처가 아니라 함께 움직이고 성장하며 일하는 것이다. 조화가 있든지 갈등이 있든지, 아니면 기쁨이 있든지 슬픔이 있든지 하는 문제는, 두 사람이 그들 존재의 본질로부터 경험하고, 그들이 서로에게서 달아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과 하나가 됨으로써 서로 하나가 된다는 기본적인 사실에 대해 2차적인 것이다. 사랑이 존재하고 있다는 증거는 관계의 깊이, 관련된 두 사람의 생기와 힘이다. 이것은 사랑을 인식하게 하는 열매인 것이다.





 각자가 중심을 잡고, 상대의 존재를 인정하고, 사랑하는 태도로 서로를 대할 때, 우리는 사랑을 할 수 있다. 아무리 산업화된 사회가 우리를 하나의 노동력으로 치부하고 노예화, 상품화 하고, 우리 역시 큰 사회 속 하나의 부속품으로 전락하는 듯한 기분에 빠져들지라도, 우리의 존재를 반듯하게 세워야 한다. 우리는 노예화되어서 일해서는 안되고 우리의 자주적 의지로 일해야 하고, 권위에 굴복하여 부속품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권위는 바로잡을 힘을 가진 하나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사회에서만 우리도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런 능동적 사고를 가진 하나의 존재로 거듭날 때, 사회가 그렇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사랑도, 유아적 개념의 사랑에서 벗어나, 진정한 성인으로서 두 사람의 존재의 본질 받아들여 하나의 사랑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p37.

많이 '가진' 사람이 부자가 아니라 많이 '주는' 사람이 부자이다.



p42.

인간은 자기 노동의 대상을 사랑하며, 자기가 사랑하는 것을 위해 일한다.



p57.

유아적인 사랑은 '나는 사랑받기 때문에 사랑한다'라는 원칙에 따른다. 그러나 성숙한 사랑은 '나는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받는다'라는 원칙에 따른다. 미성숙한 사랑은 '나는 네가 필요하기 때문에 너를 사랑한다'라고 말하지만, 성숙한 사랑은 '나는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네가 필요하다'라고 말한다.




p60.

성숙한 인간은 외부의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자유롭게 된 사람이며, 자기 내부에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을 형성한 사람이다.





p67-p69.

그러나 진정한 모성애는 갓난아이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자라는 어린이에 대한 사랑에 있는 듯하다. ...(중략)... 자아 도취적이며 지배적이고 소유욕이 강한 여자는 어린애가 어릴 때만 '사랑을 주는' 어머니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오직 진실로 사랑을 주는 여자, 받는 것보다 주는 것에 더 행복감을 느끼고 자신의 존재를 바탕으로 확고히 서 있는 여자만이 분리의 과정을 밟고 있는 어린애에게 사랑을 주는 어머니가 될수 있다.




p74.

우리는 성애의 중요한 요인인 '의지'라는 것을 무시하고 있다.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단순히 강렬한 감정은 아니다. 그것은 결정이며 판단이고 약속이다.




p91.

인간 자신이 부여하는 의미를 제외하고는 인생에 대한 아무런 의미도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타인을 돕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전적으로 혼자이다.




p101.

인간에 대한 사랑도 직접적으로는 가족과의 관계에 담겨져 있지만, 최근의 분석에 따르면 살고있는 사회의 구조에 대해 결정된다. 만일 사회 구조가 권위, 즉 드러나 권위이거나 시장(market)과 여론 등의 익명적 권위에 복종하기를 강조하는 것이라면,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신에 대한 개념은 유아기적이고, 성숙한 개념에 훨씬 미치지 못하게 될 것이다.




p109.

오늘날 인간의 행복은 '즐김'에 있다. 즐긴다는 것은 상품, 구경거리, 음식, 술, 담배, 사람들, 강의, 책, 영화 등 소비되고 삼켜 버릴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소비하고 취하는 만족에 있다. 세계는 우리의 식욕에 대한 하나의 거대한 대상이며, 커다란 사과, 커다란 병, 커다란 가슴이 된다. 우리는 젖을 빠는 자들이고, 영원히 기대하는 자들이며, 희망에 가득 찬 자들이고 영원히 좌절에 빠진 자들이다. 우리의 성격은 교환하고 받고 싸게 팔고 소비하는 데 적합하다. 물질적인 대상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대상도 교환과 소비의 대상이 된다.




p116.

상호간의 성적 만족으로서의 사랑과 '팀웍'으로서의 사랑, 고독으로 벗어나려는 피난처로서의 사랑은, 현대 서구 사회에서의 사랑의 해체를 나타내는, 사회적으로 유형화된 사랑의 병리학의 두 가지 '전형적인' 형태이다.





p140.

타인과 연관해서 정신 집중을 한다는 것은 우선 들을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제로 듣지도 않으면서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심지어 충고를 하기도 한다. 그들은 다른 사람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들의 대답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대화는 그들을 지루하게 만든다.



p147.

객관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은 곧 '이성'이다. 이성의 뒤에 있는 정서적 태도는 '겸손한 ' 태도이다. 객관적이고 이성을 이용한다는 것은 겸손한 태도를 취할 때만, 어릴 적에 가졌던 전지 전능의 망상에서 벗어날 때만 가능하다.




p149.

신념은 자신의 경험, 자신의 사고력과 관찰력, 그리고 판단력의 확신에 뿌리를 두고 있다. 비합리적 신념은 권위나 다수가 진실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어떤 것을 진실이라고 인정하지만, 합리적 신념은 다수의 의견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생산적인 관찰과 사고에 바탕을 둔 독립적인 확신에 근거하고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는 우리 자신이 되어야 한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