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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약사 Jul 06. 2017

너를 사랑함으로써 나는 생을 사랑한다

《생의 한가운데》 ㅡ 루이제 린저







눈을 반짝이면서 니나는 말했다.
아, 그렇게 많은 것을 좋아해. 뭐든지 다.
그리고 이 지독히도 저주스러운 생을.





 나는 이 책에 대해 언급할 면 반드시 "전혜린" 번역본을 읽기를 추천하곤 한다. 한번도 외국도서에 대해서 번역자에까지 신경쓰지 않던 내가, 어느 순간 번역자의 가치에 집중하게 된 계기가 된 책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책을 고등학생 때 처음 접했었다. 그 때의 충격이란! 그것은 마치 가슴 한구석이 무두질 당한 기분이었고, 아무도 없는 무인도에서 사흘 밤낮을 굶다가 야생의 맛이 한없이 담긴 과일을 한입 베어 무는 듯한 기분이었고, 그러한 달콤함과 충격과 더불어 한켠에서는, 아무도 없는 바닷가에 앉아 밀려 가는 파도를 무한히 바라보는 허무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후 대학교 도서관 서고에서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를 다시 만났었다. 그것은 대학 때의 나의 취미였다. 중앙도서관 4열, 그곳은 여러 장서들의 보고같은 곳이었고, 나는 일부러 대여할 책 제목을 정하지 않은채 무작정 '프랑스문학'이니 '독일문학'이니 하는 서고에서 말그대로 '꽂히는' 책을 발견하는 것을 좋아했었다. 그렇게 꽂힌 책을 대여해서 읽다가 내 스타일이 아니라서 실망한 적도 많았지만, 그러다가 보석같은 책을 발견하기라도 할 때의 희열이란....! 그 날도 무심코 들여다보던 서고에서 몇 년 전 나의 심장을 울렸던 책, "생의 한가운데"를 발견하였고 나는 반가운 마음에 책 첫 장을 펼쳤었다. (나는 본가에서 떨어져 학교를 다니고 있었고, 내가 고등학교 때 읽었던 이 책은 본가에 남아있는 채였기 때문에 반갑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 달랐다. 너무나도 달랐다. 견딜 수 없이 달랐다. 내가 읽었던 책이 맞나 싶어서 다시 책표지를 확인해 보기까지 했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번역자가 달랐고, 그리하여 문체가 전혀 다르게 다가왔다는 것을. 그 때 나는 알았다. 외국도서의 번역본을 읽어야만 하는 한국독자들의 한계를. ─ 그리고 축복을. 원서 그대로, 원작자의 느낌 그대로의 문체를 느낄 수 없다는 한계, 번역자에 따라서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한계 ─ 어쩌면 나는 도서관에서 발견한 이 책이 처음 접한 "생의 한가운데"였다면, 이 책을 이만큼 좋아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 도 있지만, 절묘한 번역자에 의한 판본을 접한 독자가 느끼게 되는 감동은 축복일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원작 그대로의 맛보다 더욱더 한국적인 느낌이 철저히 가미된, 더욱 극대화된 감동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 나는 되도록이면,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만큼은 "전혜린" 번역본으로 읽기를 권장하고 싶다.






삶의 의의를 묻는 사람은 그것을 결코 알 수 없고,
그것을 한번도 묻지 않는 사람은 그 대답을 알고 있는 것 같아요.






 서론이 길었지만, 그것은 그만큼 내가 이 책을 애정한다는 것을 시사할지도 모른다. 그렇다. 나는 이 책을 고등학생 시절 처음 접한 이후로 최소 3번 이상 읽었다. 내 가슴 속의 애정도에 비하면 3번이라는 횟수는 적을 수도 있으나,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숨고르기가 필요하고, 그만큼 완벽한 집중을 필요로 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리하여 나는 이 책을 읽고 싶을 때조차도 어떨 때는 주저하곤 했었다. 그만큼 이 책은 강력한 몰입도를 요하고, 가슴에 불 지필 각오를 하고서 임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 여자는 인간이 허위 없이도 살 수 있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시위하고 있는 인간입니다.
흥미있으나 까다롭지요.
아무데나 충돌하고 입 안을 태우고 모험 속에 얽혀 들어가고
언제나 맨 극단에 있는 대담한 존재입니다.




니나 부슈만. 내가 이 책을 좋아한다고 하면, 내가 니나 부슈만 같은 삶을 동경한다고 보여질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나의 내면 어딘가에서는 그런 존재에 대한 일종의 경외심 비슷한 것을 지니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 내가 이 책을 읽을 때마다 나 자신에게 수없이 되물어보지만 ─ 절대 니나 부슈만이 되고 싶어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오히려 그녀의 언니와 닮아 있을 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나는 슈타인 박사 쪽이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나의 언니나 슈타인 박사가 그러하였듯이, 나는 니나에게 빠져들지 않을 수가 없다. 이 책은, 다시 한번 말하지만, '몰입'의 책일지도 모른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도 꽤 그러하지만, 이 책만큼 한 구절 한 구절 놓치고 싶지 않은 책은 좀처럼 없을 것 같다. 루이제 린저, 그리고 그녀의 문장을 더욱 완벽하게 완성시킨 전혜린의 번역 ─ 그 문장들은 경의롭다 못해 스릴이 넘친다. 그녀들의 문장들은 남성적이면서 여성적인 조신함과 조숙함, 그러면서도 번뜩이는 야성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혼을 쏙 빼놓는다.






p163.

나는 텅 빈 방과, 천천히 죽어 가는, 수종으로 부은 할머니와 작은 가게와 파리를 바라보았다. 니나는 여기에서 거의 1년을 보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아버지의 빚을 갚기 위해서, 나의 도움을 받지 않기 위해서, 그러나 사실은 '생'이 자기에게 과하는 온갖 과제를 자기가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p182.

사람이 처음에는 몹시 큰 혐오를 가지고 시작한 일에 마침내 익숙해 버린다는, 아니에요, 한 번도 거기에 익숙해지지는 않았어요. 그렇지만 나는 그것을 받아들였어요. 내 말 아시겠어요? 우리가 그 속에서 잘 적응해 나갈 수만 있다면 인간이 견디지 못할 생활 상태란 없다고 생각해요.






 니나 부슈만, 그녀는 말그대로 모든 생을 받아들인 여자이다. 심지어 죽음까지도. 생이 자신에게 부여한 모든 과제를 충실히 행하는,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절대 절망하거나 무너지지 않는 강한 여자. 그리하여 보통의 사람들이 할 수 없는, 모든 것이 꽉 차 있어서 숨이 막힐 것만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 여자.






그것도 다 생의 일부분이니까.
우리는 추악한 것을 보지 않으면
중요한 것도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에 반해 슈타인 박사, 아 ─ 그는 그녀에 비하여 늙은 괭이같아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사랑은, 그의 배려는, 우리를 감동시키지 않을 수가 없다.





 나는 거기에 들어갈 힘은 없었어. 나의 눈은 광채에 적합하도록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어. 그렇기에, 너도 알지 않니. 우리들이 서로 해후하긴 하지만 결코 상대방이 있는 그 피안의 영역에의 문지방을 넘어설 수는 없었어. 너는 내 생을 인정하지 않을 거야. 그것은 네 것과는 달랐으니까.
 그렇지만 당신은 내 생을 이해하고 인정하시잖아요, 하고 그 여자는 놀라서 부르짖었다.
 나는 해야 할 말을 하지 않았다. 그건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다만 미소를 지었을 뿐이다.




 20년 가까이어져 온 니나와 슈타인의 인연에 대해서 답답하면서도 안타까움을 금할 길이 없다. 서로 사랑을 하면서도 그 사랑을 이룰 수 없는 피안의 끝. 아슬아슬하게 기대어 놓은 카드 두 장의 경계선. 그들의 이야기는 독자가 한 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게 만든다. 계속된 물음표를 남기고, 또다시 그 해답을 놓고, 슈타인의 심정과 니나의 심정이 얽히고 설키는 과정이 반복된다.



 루이제 린저. 그녀는 무서울 정도의 이야기 꾼이다. 소설 안에 니나의 이야기가 있고, 슈타인의 수기가 있고, 니나의 단편 소설이 있고, 니나의 언니의 관점이 있다. 시간은 끊임없이 전후좌우로 옮겨 다니고, 앞의 이야기가 뒤의 이야기와 이어지고, 니나의 관점이 한참 뒤에 되어서야 슈타인의 관점과 맞닿는다.



 누군가가 이 소설의 줄거리를 묻는다면, 순간 머리가 새하얘진다. 이 소설을 어떻게 스토리만 읊을 수가 있겠어?, 이 소설을 읽어야만 느낄 수 있는 소설이야, 라고. 어떻게 보면 통속적인 사랑이야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소설은 그보다 더 심층적인 부분에 속해있다. 그리하여 이 소설의 막바지로 가면 갈수록 우리는 단순한 사랑이야기를 넘어선 그들의 숙명에 대하여 가슴이 쓰라릴 정도로 느끼게 된다. 이는 니나의 언니의 눈물로 표현되기도 한다.




p350.

내 생에서 처음으로 나 자신에 대해서, 또 마치 젖은 잿빛의 촘촘한 그물과 같이 얽힌 나 자신과 모든 인간의 숙명에 대해서 울었다. 누가 과연 이 그물을 찢을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비록 그것이 가능하더라도 그물은 여전히 발에 걸려 있어서 사람들은 그것을 끌고 다닐 수 밖에 없으며, 그것은 보기에는 아무리 얇은 것 같아 보여도 감당하기에 어려운 무거운 짐이다.





 이 소설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물음표로 시작하여 물음표로 마치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째서 거의 20년이라는 긴긴 시간을 보낸 뒤에야, 왜 죽음을 목전에 둔 지금에서야, 슈타인박사는 니나를 애타게 찾는가. 그리고 니나는 끊임없이 그를 밀어내고야 마는가. 마지막의 언니의 행동은 그들의 인생에 어떤 반향을 불러 일으킬 것인가. ─ 우리는 쉬이 예상할 수가 없다. 생은 언제나 예측불허이므로.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히 알게 된다. 우리는 그러한 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만 한다고. 어떤 종류의 절망이든지 고통이든지 과제이든지, 그것은 우리 인생의 하나의 재산이 될 수 있다는 것. 그것은 니나의 활활 타오르는 삶에 대한 의지를 통해 간접적으로 깨닫게 된다.





p7.

'생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끝을 갖고 있지 않다. 결혼도 끝이 아니고, 죽음도 다만 가상적인 것에 불과하다. 생은 계속해서 흐른다. 모든 것은 그처럼 복잡하고 무질서하다. 생은 아무런 논리도 없이 이 모든 것을 즉흥한다. 그 중에서 우리는 한 조각을 끌어내서 뚜렷한 조그마한 계획하에 설계를 한다. 포즈를 취한 사진이다. 극장에서처럼 차례로 진행된다. 모두가 그렇게 쓰이고 있다. 나는 그렇게 모든 것을 간단하게 해버리는 인간이 싫다. 모든 것은 이처럼 무섭게 갈피를 잡을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ㅡ.'





 단순하게 불꽃같은 삶을 사는 여성의 일대기나 사랑이야기로 치부하지 말길 바란다. 이 책은 읽어보아야만 느낄 수 있는 책이다. 그렇다. 이 책은 읽어야만, 몸소 경험해야만 하는 책일 것이다. 그리고 경험한 독자들은 분명히 느낄 것이다. 이 책은 한 구절도 놓치고 싶은 구절이 없다고. 그리하여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마치 숨막히는 곳에서 방금 빠져나온 듯, 휘몰아치는 물속에서 한참을 허우적대다 물길이 잦아 들었을 때 느낄 법한, 기진맥진하면서도 행복한 피곤함과, 뿌듯하면서도 허무한 느낌을 모두 느끼게 될 것이다.













p21.

나는 내가 웬일인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아마 다만 여름 때문인지도 모르겠어요. 나는 이 풍요와 포식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지금 자연 속에는 아무런 그리움도 없는 정지의 상태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p28.

내가 의식을 잃기 시작한 순간처럼 삶을 강렬하게, 그처럼 집중되어서, 끔찍하게, 아름답게 느낀 때는 없어요.

왜 나에게는 그처럼 감각하는 힘이 없는가? 왜 나는 어두운 지하실에 앉아서 부드러운 종말을 기다리는가? 드디어 정말로 살아 보려고는 안하고?




p37.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는 사랑은 언제나 기다림과 연결되어 있었어. ...(중략)... ㅡ 아, 맙소사 그것은 기다림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었어.



p39.

나는 일생 동안 한 번도 정말로 사랑하지 않았어. 한 번도 진짜가 아니었어. 나는 한번도 한 남자 때문에 정말로 불행하지 않았어. 나는 사랑한다는 게 무엇인지를 몰랐어. 그러나 지금은 그걸 알고 있어.



p40.

산다는 건 나에게 있어서는 아는 것, 무섭게 많이 아는 것과 생각하는 것과 모든 것에 파고 드는 것이었어. 그 외엔 아무것도 아니었어.



p43.

우리는 무한히 행복할 때만 죽어도 좋은 것인지도 몰라. 그렇지만 그것은 결국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비겁한 일일 거야.



p50.

생 한가운데 다시 내던져졌어. 나는 몹시도 나 자신이 부끄러웠었어. 위대할 기회가 지나가 버렸다는 것을 알았고 다른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야.



p52.

나는 어떤 힘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는 것일까?내 이성은 매일매일 암초에 부딪히고 파산하고 있다. 이처럼 해서 나는 자연에게 세금을 바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p59.

나는 우리가 마치 밤이 필요한 것처럼 비밀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



p67.

행복은 우리가 언제나 생기를 지니는 데에, 언제나 마치 광인이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듯 무슨 일에 몰두하고 있는 가운데 있는 것 같아.



p68.

우리가 알았다고 생각하면 할수록 더 몰라지는 거야. 그리고 우리는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괭이처럼 사는 것을 배우게 돼. 점점 더 소리없이, 점점 더 필연성없이 ㅡ 그것이 늙은 징조야. 나는 늙어가는 것이 기뻐.



p68.

누구든지 의욕하기를 그치면 늙기 시작하는 거야.



p69.

인생은 끝없는 풀밭이 아니라 그 속에서 우리가 최선을 다해야 하는 네 개의 벽이 있누 공간이야.



p76.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이 될 수 있다고 적어도 믿고 있어. 그렇지만 우리는 이 수많은 자기 중에서 다만 하나만, 미리 정해진 특정의 하나만을 택할 수 있을 뿐이야.

그래, 라고 나는 말했다. 그런데 때때로 우리는 선택을 잘못한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되지. 어떤 때, 아주 혼자 있을 때, 고독할 때 우리는 자신의 다른 모습이 어둠에서 떠오르는 것을 보고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는 슬픔에 가득 찬 마음으로 손짓을 하고 말하는거야. 너무 늦었다고.



p83.

그것에 관해서 기록하는 것은 나에게 힘든 일이다. 왜냐하면 기록한다는 것은 사정없는 날카로움을 가지고 상기하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p92.

차를 따를 때 그 여자의 팔은 나에게 잠깐 닿았었다. 순간은 지나가 버렸다. 다시 오지 않게 잃어 버려지고 말았다.



p102.

아무것도 할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나에게는 불가능해.



p105.

나는 마치 몇 달이나 계속된 가뭄 뒤에 첫번째 빗방울이 죽은 줄 알았던 싹 위에 떨어지는 건을 본 농부의 아직 의심스러운, 긴장된 환희와도 비슷한 나의 기쁨 속에 잠겨 있고 싶다. 너무나 오랜, 희망 없었던 기다림 위에 딱딱하게 떨어진 아픈 기쁨이었다.



p107.

나는 그 모든 것을 내던질 수가 없어요. 내가 한 번 인수한 것이니까. 그걸 놓고 달아난다면 내가 나 자신에 대해서 무가치하게 보일 것이에요.



p110.

보다 강하게 감동되어 있는 사람은 언제나 손해다. 그의 감정이 어디서나 방해가 되어서 그의 정열에 걸려서 넘어지고 패배할 때마다 자기를 웃음거리로 만든다. 그의 찬스는 번번이 더 적어지고 그의 감정은 그와 반비례되게 커간다.




p117.

벌써 잊어 버렸어요. 한 번 쓴 것은 잊어 버려요. 그건 벌써 나와는 상관없는 것이니까요. 그건 벌써 지나 버린 무엇을 말하고 있을 뿐이에요. 나는 그 동안에 또 나이를 먹었는데.



p122.

사람이 속을 털면 털수록 그 사람과 가까워진다고 믿는 것은 환상입니다. 사람과 사람이 가까워지는 데는 침묵 속의 공감이라는 방법밖에는 다른 방법은 없는 것 같습니다.



p127.

니나는 갑자기 얘기를 시작했다. 언니,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운명이 없어. 그리고 그것은 그들의 잘못이야. 그들은 운명을 가지려고 하지 않아. 커다란 단 한 번의 충격을 피하고 그 대신 수백 개의 작은 충격을 받아들이고 있어. 그러나 커다란 충격만이 우리들 앞으로 날아가는 거야. 작은 충격은 우리를 점점 비참 속에 몰아넣고. 그러나 그건 아프지 않거든. 타락은 편한 일이니까. 내 생각으로는 그건 마치 파탄 직전에 있는 상인이 파산을 감추기 위해 여기저기서 돈을 빌리고 일생 동안 이자를 갚아가는 공포에 싸인 소상인으로 그치는 것과 같다고 생각돼. 나는 언제나 파산을 선언하고는 다시 처음부터 개시하는 편을 택하고 싶어.




p147.

우리는 영웅이 아니야. 다만 때때로 영웅 노릇을 해 볼 뿐이지. 우리는 모두 약간 비겁하고 계산빠르고 이기적이고 위대함에서는 먼 존재야. 그리고 나는 바로 그걸 그리고 싶었어. 우리가 동시에 선량하고 또 악하고 영웅적이고도 비겁하고 인색하고도 관대하다는 것, 모든 것이 밀접하게 서로 붙어 있어서 구분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한 사람에게 나쁜 짓이건 좋은 짓이건 어떤 행동을 하도록 한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그리고 싶었어. 모든 것이 그렇게 무섭고 복잡하고 혼란한데 모든 것을 다 간단하게 만들려는 인간이 나는 싫어.




p158.

몹시 아름다운 아침이었고 내가 보통 때라면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시간이었다. 인간에게 호의를 갖고 있지 않은 쌀쌀하고 유리와도 같고 차고 엄격한 시간, 해뜨기 직전의 휴식시간이었다. 그것은 자연이 호흡을 중지한 것 같은 무시무시한 시간이었고 아무 소리도 생기를 전하고 있지 않은, 시간보다는 영원에 속해 있는 시간이었다.





p222

지금 나는 잃어 버린 무엇을 한탄하는 편이 한 번도 갖지 않았던 것보다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처음으로 나는 고통도 또한 재산임을 알았다.




p227.

사람이 완전히 고독하게 앉아서 결코 다시는 사랑할 수 없다는 것, 영원히 다시는 한 사람과 만날 수 없으리라는 것을 느끼는 것이 지옥일 거야.

그리고 다시는 사랑을 받지 않으리라는 것도, 라고 나는 덧붙여 말했다.

니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건 중요하지 않아. 우리가 다시는 사랑할 수가 없어지는 것, 그것이 문제야.




p290.

그렇지만 나를 도와준 것은 그가 아니었어.

그럼 누구였니?

나 자신이야.




p293.

내가 여태까지 살아보았던가요? 나는 살고 싶어요.

생의 전부를 사랑해요.




p330.

나보고 사는 것을 그만두란 말이세요? 내가 여태까지 살아 보았던가요? 나는 살고 싶어요. 생의 전부를 사랑해요. 그렇지만 나의 이런 마음을 당신은 이해 못하실 거예요. 당신은 한 번도 살아 본 적이 없으니까요. 당신은 생을 피해 갔어요. 당신은 한 번도 위험을 무릅쓴 일이 없어요. 그래서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잃기만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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