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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약사 Aug 06. 2016

파도처럼 밀려와줘요. 나를 찾아 헤엄치겠어요.

《빌라 아말리아 》 - 파스칼 키냐르






그것은 다른 시간이리라.
그 시간을 다른 여인이 살게 되리라.
그 시간은 다른 세계에 존재하리라.
그 세계가 다른 삶을 열어주리라.


서점에 들른 어느 날, 여느 날 처럼 베스트셀러 코너만 '피해서' 뒤적뒤적. 보통 책을 선택할 때 작가 소개, 프롤로그 등을 주의깊게 읽어보고 구매하는데, 이 책을 고른 이유는, 글세... "그냥─"이라는 표현이 맞을 듯.



끊임없이 떠나는 47세의 안. 정확히 표현하면, 충분히 사회적으로 살아오던 안이 불현듯 떠나기로 결심한다. 그리하여 그녀는 '자기자신'에게서 떠나서, '곳'에서 또다른 '곳'으로 ─ 계속 떠나기를 반복하다가 이스키아 섬의 "빌라 아말리아"에 정착하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사람'이 아니라 '장소'라는 것을. 그리고 그녀는 이스키아 섬에서,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인적 드문 곳에 위치한 빌라 아말리아를 사랑하게 된다는 것을.




그것은 풍경이 아니라 누군가였다.
사람은 아니고, 물론 신도 아니고, 한 존재였다.
특이한 시선.
어떤 사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구체적인 얼굴.



더이상 그녀에게 장소는 단순한 공간이 아니다. 공간적인 개념을 넘어선 하나의 존재가 된다. 그리고 그녀는 그 존재를 강박적으로 사랑한다. 그렇다고 그녀가 그 공간에 완전히 '머무르는 것'은 아니다. '떠나기'를 계속하는 그녀는, 빌라 아말리아를 중심으로 하루도 빠지지 않고 헤매이고, 탐닉하며, 여행한다. 그녀의 인생에 쾅 ─, 무언가가 내리찍기 전까지. 바로 어린 레아의 죽음.




이 때부터 우리는 알게 된다. 이 소설 전반에 스며들어 있는 죽음의 그림자를. 그리고 그 그림자는 어느 누구의 예외도 없이 퍼져 있다는 것을. 하지만 역시 죽음은 살아있는 사람들의 몫으로 남게 되고, 우리는 그 고통에 직면하면서도 또다시 일생을 여행하고 있다는 것을.



물론, 모든 문학들이 그렇듯, 독자에 따라 그 와닿는 느낌은 천차만별일 것이다. 나 역시 이 '난해한' 소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생각이 많이 들었다. 혹자는 안의 사고와 행동에 깊은 공감대를 형성할 수도 있겠다. ─ 하지만 나.는.아.니.었.다.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하는 안. 떠나는 순간을 즐기는 그녀. 하루를 정열로 가득 채운 그녀. 하지만 나는 부정하고 싶다. 비록 "수동적 고집의 본성"이 내 안에 있을지라도, 나는 그것이 "삶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그러한 수동적 고집의 본성 때문에 답답함을 느끼고, 그 수동적임을 벗어나 능동적인 주체가 될 때의 자유의 만끽하는 것에 있어서 어느정도의 행복을 얻을 수 있을 지라도,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 수동적 고집의 본성이 주는 소소하고 소중한 행복들을 놓치게 될 것이라고. 정열적인 자유도 아니고, 너무나도 소소해서 때론 따분해 보일지라도 그것이 불행은 아니라고.




"난 한번도 그 시절을 떠난 적이 없어.
줄곧 도망치면서도 현실에 없는 그곳을 결코 떠난 적이 없는 거야."




삶의 능동적 주체가 되어서 끊임없이 떠나지만, 사실 안의 아버지의 대사에서 느끼는 감정만 남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떠나기를 반복하지만, 결국은 '현실에 없는 그곳'을 떠나지 못한 채, 단지 진정한 현실에서 도망치는 것일 뿐이라고.




"중요한 건, 엄마, 내가 나 자신을 이해하는 거야."
...
"아무도 저 자신을 이해할 순 없단다, 엘리안"



뭔가 인생의 탐험자가 되어 자기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으로 생각하겠지만, 실상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채 물음표만 가득 껴안고서 방황하는 것은 아닐까. 그것은 어쩌면 방황을 위한 방황에 불과할 것이다.




이 소설은 한마디로 "난해하다" ─. 책을 읽는 중에는 그 아름다운 이스키아의 바닷물에 풍덩, 새하얗게 쏟아지는 뜨거운 태양에 다시 한번 풍덩, 그런 자유로움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내 안의 어느 부분 속에 숨어있는 '안'이 슬며시 나타나, 소설 속 '안'과 함께 바다를 수영하고, 산 속을 거닐며 흙을 밟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 막상 결말로 치달을 때 즈음엔, 머릿속이 복잡 난해해지고 만다. 그리하여 책을 덮고 나면 머릿 속에서 웅웅, 마치 이름모를 큰 벌레의 날개짓 소리마냥, 그렇게 머릿 속을 헤집어 놓을지도 모른다.










"나 혼자 있을 필요가 있었거든. 지금도 그렇고.

내 인생에서, 내 삶의 본질 안에서, 혼자이고 싶다는 욕구를 느껴."




사랑했던 것과 헤어지기란 어려운 일이다.

자신이나 자신의 이미지와 헤어지기란 훨씬 더 어렵다.




만일 운명이란 것이,

자신이 아니라 세상의 다른 장소에서 생겨난 충동이라면,

그래서 한 존재를 사로잡고,

그 존재가 충동의 본성을 한 순간도 깨닫지 못하면서

그것을 따르게 되는 것이라면,

그녀에겐 운명이 있었다.

자신의 운명을 자각한 그녀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지만 나는 결연히 그곳으로 달려간다.

어떤 것이 내게 결여된 그곳에서

내가 헤매고 싶어지리라는 느낌이 든다"




그녀는 자신이 어디에 있으며,

그곳이 어떤 장소인지를 설명했다.

그 장소가 얼마나 독자적인 동물인가를.

그 동물에게서 자신은 시작되는 봄을 발견했노라고.




왜냐하면 남녀간의 삶은 영원한 폭풍우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얼굴과 얼굴 사이의 공기는

나무나 돌들 사이의 공기보다 밀도가 더 높다.

(더 적대적이고, 더 전격적이다)

이따금, 드물게, 진짜로,

벼락이 실제로 내리쳐서,

실제로 우리를 죽인다.

그것이 사랑이다.




'떠나기'를 놓칠 수는 없었다.

떠나는 걸 좋아했으므로.

출발의 확신 상태에 있다는 것은

참으로 흥분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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