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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약사 Oct 11. 2017

시대의 소음 위로 들려오는 피아노 선율의 아이러니

《시대의 소음》 ㅡ 줄리언 반스





예술은 모두의 것이면서 누구의 것도 아니다.
예술은 모든 시대의 것이고 어느 시대의 것도 아니다.
예술은 그것을 창조하고 향유하는 이들의 것이다.






 고등학교와 대학시절 나에게, 로맹가리 ─ 혹은 에밀 아자르 ─가 있었다면, 최근 몇 년은 '줄리언 반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몇 년 전 무심코 읽었던 그의 소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의 충격적 반전에 머리가 쭈뼛서는 전율과 희열을 느낀 이후로, 내 뇌리 한 켠에 쿵, 하고 굵직한 발자국을 아로새긴, 요즘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 바로 "줄리언 반스". 그의 신간이라는데 손을 어떻게 뻗지 않을 수 있겠는가. ─ 그리고 그는 역시, 결코 실망시키는 법이 없었다.





아이러니는
─ 어쩌면 가끔씩은, 그는 그러기를 바랐다 ─
 시대의 소음이 유리창을 박살낼 정도로 커질 때조차 ─
자신이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을 지킬 수 있게 해줄지도 모른다.





 드미트리 드미트리에비치 쇼스타코비치. 클래식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알고 있을 이름. 클래식에 전혀 관심없는 사람들에게도 꽤나 익숙한 이름. 바로 소련의 유명한 피아니스트이자 음악가 쇼스타코비치. 바로 그가 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그렇다. 이 소설은 역사적 인물을 바탕으로, 작가의 상상력이 가미되어 역사를 재구성하고 그 역사적 인물의 이야기를 풀어놓은 소설이다. 특히 이 소설은 어떠한 역사적인 '스토리'를 말하기 보단, 쇼스타코비치의 '내면 묘사'에 중점을 두고 있다는 점이 더욱 매력적이다. 



                                                         

 서머셋 몸의 <달과 6펜스> 이후 오랜만에 만난, 실존인물과 역사적 사실을 재구성한 소설. 굳이 둘을 비교하자면 조금 더 스토리에 집중된 쪽은 <달과 6펜스>라고 할 수 있을 것 같고, 줄리언 반스의 이 소설은  좀더 다큐적이면서도 인간의 고뇌와 심리에 무게를 두었달까. 어쩌면 그런 면에서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 중의 하나인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과 닮아있을지도 모르겠다.




 배경은 냉전시대의 소련. 예술이 권력에 혀가 묶이는 것을 목도하던 시절이다. 사람들은 항상 충분히 자기 자신이 되지 못할 위험에 처해 있었던 시절. 사람들을 충분히 공포에 몰아놓고, 그들은 결국 뭔가 다른 것, 축소되고 줄어든 무언가가 될 수 밖에 없었던 시절. 단지 생존하기 위한 기술로서의 자기 자신만 남아 있던 시절. 바로 그 시절을 살아간 쇼스타코비치의 이야기다. 




 12년을 주기로, 쇼스타코비치에는 3가지의 큰 이벤트가 있었다. 바로 그 3번의 사건들 전후로 느끼고 생각하는 쇼스타코비치의 내면묘사를, 반스는 마치 바로 옆에서 지켜보는 것처럼 완벽한 상상력과 치밀한 분석으로 이루어냈다. 




지나고서 보면 비극은 소극처럼 보인다.





 1936년, 1948년, 1960년. 권력자들은 그렇게 12년마다 쇼스타코비치를 찾아와 그를 옴짝 못하게 만들었다. 단지 '생존'을 위해 실제의 자기자신과는 다른 모습을 허락하해야 하는 상황, 적어도 겉으로는 그렇게 보여야만 하는 것, 굴복하는 것 처럼 보여야 하는 것. ─ 그것이 위대한 음악가 쇼스타코비치의 삶이었다. 겉과 속이 다르다는 자기자신만의 '아이러니'에 의지하여 어떻게든 실제의 자신이 아닌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 




 혹자는 비겁하다고 손가락질 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용기있게 권력에 대항하라고, 왜 그러지 못했냐고, 그러지 못하는 예술가는 인정할수 없다고 목소리 높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작 그런 목소리를 내는 그 사람은 완벽한 안전지대에 있는 경우가 대다수다. 그 안전지대에서 목소리로만 용기를 외치는 것은 아닌가. 그들은 공포에 굴복한 사람들에게 순교자가 되어 피를 흘리라고 소리친다. 정작 본인은 절대 그 안전지대에서 나오지 않으면서.





p248.

그는 평생을 아이러니에 의지했다. 그는 아이러니가 일상적인 장소에서 태어났다고 상상했다. 우리가 삶이 이러할 것이라고 상상하거나 가정하거나 바라는 것과 실제 삶 사이의 간격에서. 그래서 아이러니는 자아와 영혼을 지켜주는 수단이 되고, 우리가 매일 숨 쉴 수 있게 해준다.





 모든 역사의 뭇매를 맞고, 권력에 사지가 꽁꽁 묶여 굴복해야만 하는 시대에서도, 그는 음악을 했다. 살아서 음악을 하기 위해 살았다. 어쩌면 소련도 그가 음악하게 하기 위해 살려두었던 걸지도 모른다. 차라리 권력에 의해 어쩔수 없이 희생되어야 했더라면 마음이 편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권력은 그를 살려두고 철저히 이용하기를 멈추지 않았고, 그는 스스로를 내던질만큼 강한 사람도 아니었다. 아니, 스스로를 내던지는 것이 꼭 강한 것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 억압과 공포의 시대 속에서도, 속으로는 조금도 굴복하지 않은 채, 주옥같은 음악들을 남기면서도 꾸역꾸역 살아가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강함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줄리언 반스는 우리에게 분명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시대의 소음이 마음의 창을 산산조각 내는 시대를 살았던 어느 한 음악가의 내면을 상상해 보면서, ─ 그것의 진실여부에 관한 논쟁은 중요한 것이 아닐 것이다 ─ 음악은 결국 음악의 것이라는 것. 진리는 변하지 않는다는 것. 억압과 독재와 권력 앞에 무너지지 않는 절대 진리라는 것은 후세에게 전해진다는 것. 그러한 절대 가치의 산물은 그 누구도 죽일 수 없는 생명력을 가지고 스스로 살아나갈 것이라는 것. 





 세상과 사회를 향해 분명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시대의 소음이 인간의 심장을 옭아매던 시절의 이야기 ─ 아, 역시 줄리언 반스다.











p55.

이것이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방식이다 ㅡ 두려움 없이, 장벽 없이, 내일 따위는 생각지도 않고. 그리고 나중에도 후회없이.



p135.

예술은 시대의 소음 위로 들려오는 역사의 속삭임이다.




p135.

그는 모든 이들을 위해 작곡을 했고, 누구를 위해서도 작곡하지 않았다. 그는 사회적 출신과 무관하게 자신이 만든 음악을 가장 잘 즐겨주는 이들을 위해서 작곡을 했다. 들을 수 있는 귀들을 위해 작곡을 했다. 그래서 그는 예술의 참된 정의는 편재하는 것이며, 예술의 거짓된 정의는 어느 한 특정 기능에 부여되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p158.

이 친구를 자칭하는 자들은 자기들이 권력층과 얼마나 닮았는지는 깨닫지 못했다. 아무리 많이 주어도 더 원했다. 모두들 항상 그가 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그에게서 원했다. 그러나 그가 그들에게 주고 싶었던 것은 오직 음악뿐이었다.




p171.

어쩌면 용기는 아름다움과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아름다운 여인도 나이를 먹는다. 그녀에게는 사라져버린 것만 보인다. 다른 이들 눈에는 남은 것만 보인다. 어떤 이들은 그에게 잘 버텨냈다고, 굴복하지 않았다고, 신경질적인 겉모습 아래 굳은 심지가 있었다고 축하했다. 그에게는 사라진 것만 보였다.




p224.

영혼 속 깊숙이 뭔가가 사라져버렸고, 남은 것은ㅡ뭘까?ㅡ어떤 전략적인 교활함, 세상물정 모르는 예술가인 척할 수 있는 능력, 어떤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자신의 음악과 가족을 보호하겠다는 결심뿐이었다. 그는 드디어 이렇게 생각했다 ㅡ 생기와 결의가 다 빠져나가버려서 기분이라고 할 수도 없을 정도의 기분으로 ㅡ 어쩌면 이게 오늘 치러야 할 대가인지도 모른다.




p226.

그러니까 그는 겁쟁이였다. 그래서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제자리를 빙빙 돈다. 그래서 그는 남은 용기를 모두 자기 음악에, 비겁함은 자신의 삶에 쏟았다.




p227.

그러나 겁쟁이가 되기도 쉽지 않았다. 겁쟁이가 되기보다는 영웅이 되기가 훨씬 더 쉬웠다. 영웅이 되려면 잠시 용감해지기만 하면 되었다...(중략)... 그러나 겁쟁이가 된다는 것은 평생토록 이어지게 될 길에 발을 들이는 것이었다. 한순간도 쉴 수가 없었다. 스스로에게 변명을 하고, 머뭇거리고, 움츠러들고, 고무장화의 맛, 자신의 타락한, 비천한 상태를 새삼 깨닫게 될 다음 순간을 기다려야만 했다. 겁쟁이가 되려면 불굴의 의지와 인내, 변화에 대한 거부가 필요했다ㅡ 이런 것들은 어떤 면에서는 일종의 용기이기도 했다. 그는 혼자 미소를 지으며 새 담배에 불을 붙였다. 아이러니의 즐거움은 아직 그를 버리지 않았다.




p233.

늙어서 젊은 시절에는 가장 경멸했을 모습이 되는 것이 우리의 운명이다.



p240.

삶은 앵무새 꼬리를 잡아 계단을 질질 끌고 내려가는 고양이였다. 계단을 하나씩 내려갈 때마다 그의 머리가 부딪쳐 쿵쿵 튀어 올랐다.




p254.

이는 어쩌면 그에 대해 그들이 최종적으로 거둔 승리였다. 그들은 그를 죽이는 대신 살려놓고, 살려둠으로써 그를 죽였다. 이는 그의 삶에서 최후의, 대답할 수 없는 아이러니였다. 그들이 그가 살도록 허락함으로써 그를 죽였다.




p255.

어째서 후세가 음악이 만들어진 시대의 사람들보다 더 나은 평가 자격을 가질 수 있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또한 그런 데 환멸을 느꼈다. 후세는 그들을 승인할 것을 승인할 것이다. 그는 작곡가들의 평판이 높아졌다가 가라앉는 법이며, 부당하게 잊혀지는 이들도 있고 기이하게 불멸의 명성을 누리는 이들도 있음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p257.

그가 바랐던 것은 죽음이 그의 음악을 해방시켜주는 것, 그의 삶으로부터 해방시켜주는 것이었다. 시간이 흐를 것이고, 음악학자들의 논쟁을 계속한다 해도 그의 음악은 자기 힘으로 서기 시작할 것이다.



p257.

음악은 결국 음악의 것이니까. 당신이 할 수 있는 말, 바랄 수 있는 것은 그게 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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