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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약사 Oct 16. 2017

가슴 깊이 가라앉은 고독, 그럼에도 살아가는 용기

《혼자 있기 좋은 날》 ㅡ 아오야마 나나에






 갓 스무살의, 처음으로 동경으로 상경한 여자아이와 70대 노인의 동거 ─ 라는 간단한 시놉시스를 눈길로 훑었을 때 내가 기대했던 쪽은 뮈리엘 바르베리의 <고슴도치의 우아함>과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한 관계를 기대하고 펼쳤던 이 소설은 조금 그러한 모습과는 빗나가 있었다. 어쩌면 소설의 분위기나 인물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특유의 삐딱함과 고독은 <쇼코의 미소>를 좀더 연상케하는 느낌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스무살의 지즈가 나의 예상보다도 더 삐뚤어져 있는 기분이어서, 어쩐지 조금은 불편했던 것 같다. 내가 필요 이상으로 '바른' 것에 대해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역시나 그녀는 나에게는 조금 이해가 되지 않는 불편한 존재였다. 어쩌면 그것은 바꾸어 말하면, 나의 가치관에 있어서는 절대로 하지 않으려고 할 법한 일들을 스스럼없이 해버리는, 꽤 얄미운 존재였을지도 모르겠다. 





가끔 전철에 타고 있는 사람이 굉장히 부럽게 느껴져.
전철을 타고 어딘가에 갈 용건이 있다는 게.




 하지만 ─ 왠지 어딘지 삐뚤어져 있는 지즈를 불편한 눈길로 흘겨보다가, 서서히, 젋은 날의 그녀가 가질 법한 고독과 방황과 서투름과 분노가 조금씩 이해가 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무조건 삐뚤어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주변을 제대로 관찰하고 있는 그녀의 시선에 동감하게 된다. 



 70대의 친척할머니. 단한번도 본적 없는 할머니 댁에 얹혀 살면서 시작되는 그녀의 동경생활. 그 생활을 생각보다 녹록치 않다. 아르바이트를 열심히 해서 당장이라도 백만엔을 모을것 같지만 생각보다 돈도 모이지 않는다. 꽤 오랜 기간 이어져 온 그녀의 연애는, 영화에서나 볼 법할 장면을 눈앞에서 목격한 채 비참한 심정으로 끝이 나 버리고, 다시 찾아온 연애도 어딘지 모르게 김 새듯이 빠져나가 버린다. 그녀의 삶은 고독과 이별이 항상 따라 붙어 있다. 



 그런 그녀를 말없이 배려해주는 사람이 바로 긴코 할머니다. 그런데 그녀의 배려라는 것이 참 노련하다. 지즈와 긴코할머니의 첫만남은, 오히려 의아할 정도로 고요했다. 혼자살다가 젊은 사람이 왔다는 기쁨으로 부산하지도 않고, 노인 특유의 집요함으로 젊은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마치 원래 거기 있었던 것처럼, 오히려 환영받지 않는건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그저 그렇게 젖어들게 해준다. 



 오히려 관찰하는 쪽은 지즈가 되어 간다. 현재의 지즈 나이대는 물론이거니와 그후 50년이란 시간을 더 헤쳐나갔을 긴코할머니의 생활은, 지즈에게 때로는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얄미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그녀는 이유없는 짜증을 쏟아내기도 한다. 





젊은 시절이 정말 좋은 때일까요?
매사에 끙끙 앓고 비관적이라 피곤할 뿐인데.
젊을 때는 무작정 손을 뻗어 대니 그렇지.
나처럼 나이가 들면 뻗을 수 있는 손도 점점 줄어들어."






 50년. 짐작조차 가지 않는 그 긴 기간을 버텨낸 그 과정에 무엇이 있었을까. 어떻게 하면 저 나이가 되도록 자기자신을 반듯하게 세우고 살아갈 수 있을까. ─ 작가 아오야마 나나에는 결코 알려주는 법이 없다. 긴코 할머니의 인생은 여전히 베일에 감추어두었다. 지즈 역시 그녀의 인생이 궁금은 하지만 결코 묻지 않는다. 그것은 지즈 나름대로의 또 하나의 배려일 것이다.





쫓을 것도 없고,
하나같이 다 떠나 버리는 것 같은데도
내 마음은 왠지 초조했다.






 많은 것을 할수 있기에 번뇌와 방황을 반복하는 지즈와, 할 수 있는 것이 줄어듦으로 인해 고독과 허무가 공종하는 긴코할머니의 삶. 젊음은 우리를 젊음이라는 활력 속에 가두어 놓고는 무엇이든 해보라고 지켜보지만, 정작 그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할 뿐이다. 뭔가를 해야하고, 뭐라도 되어야 할 것 같은데, 정작 그게 뭔지 모르겠다. 남들은 다들 해나가는 것 같은데 나만 뒤쳐지는 것만 같다. 심지어 70대 노인보다도 못난 것만 같다. 그러한 초조함이 또다시 미운 성격으로 드러나버린다. 짜증난다. ─ 이 소설에서 보여지는 지즈, 아니 우리 젊은이들의 초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한 우리들에게 긴코할머니는 나즈막히 말해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 용기를 갖고 즐겁게 살아나가면 그만이라고. 세상 밖에 대해 두려워 할 것도 없다고. 당장 눈앞에 즐거운 일이 없는 것 같아도, 정성을 다해 떠올리면 언젠가 즐거운 일이 나타날 것이라고. 지나치게 자기자신을 채찍질 하면서 무리할 필요는 없다고.




출발. ─ 어쩌면 이 소설은 출발에 관한 책일지도 모르겠다. 세상에 '안'과 '밖'은 없는 것이지만, 그래도 사회로 나가기 전, 자기자신을 정립하는 시기에 관한 소설. 이제부터는 응석부릴 할머니도 고양이도 없다. 내 두 발로 뚜벅뚜벅 걸어나갈 수밖에 없는 시기. 그러한 출발. 



그리고 이 소설에 덧붙여 있는 또 하나의 단편 소설 역시 '출발'이다. 그것은 현재 자기자신의 위치를 재인식 함으로써 나태와 권태에 찌들어버린 자기자신의 마음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는 ─ 그런 출발.




 실제로 내가 밖으로 나는 것이든, 나의 내면에서 나의 위치를 견고히 하여 새롭게 출발하는 것이든, 출발은 언제나 두려움과 설렘을 동반한다. 그리고 그 때의 나이가 어리면 어릴 수록, 불안할지도 모른다. 지금의 삶에 조바심이 나는 사람에게, 혹은 지금의 삶이 어딘지 모르게 무료해지고 눅눅해지는 기분 뿐인 사람에게, 나는 이 책을 조심스럽게 권하고 싶다. 어쩌면 그러한 조바심을 잠재울 방법을 찾거나, 본인의 무료한 삶을 활력있게 다시 살게되는 교훈을 얻게 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할머니, 세상 밖은 험난하겠죠?
나 같은 건 금세 뒤처지고 말겠죠?
"세상에 안이고 밖이고 하는 건 없어.
이 세상은 하나뿐이야."














p45.

이쪽으로 눈길 한 번 안 주고 지나쳐 가는 사람들은 연필로 그린 그림처럼 보였다. 미지근한 바람을 타고 금방이라도 팔랑팔랑 날아가 버릴 것 같았다. 그런데 별것도 아닌 그런 종이 쪼가리가 나도 모르는 새에 내 살갗에 살짝살짝 생채기를 내는 것이다.




p139.

"떠올린다고 해서 즐거움이 돌아오진 않잖아요"

"그렇지 않아. 정성을 다해 떠올리면 돌아오게 마련이야."



p162.

"인간은 변한다는 것도요. 그것도 변하지 않길 바라는 부분이. 그리고 변했으면 하고 바라는 부분은 변하질 않죠. 그게 반대로 되는 지혜를 얻고 싶은데."

"그건 무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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