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당신이 사랑하는 동안에(Wicker park)》
* 제 리뷰에는 스포일이 담겨있습니다. *
아주 오랜만의 밀린 영화 리뷰. 한동안 브런치라는 공간에 들락날락, 서랍장 안에만 쓸 거리들의 단편들을 주섬주섬 담아놓고만 지내다가, 문득, 더이상 이러면 안되겠다 ─ 라는 결심이 섰다.
그런 날들이 있다. 책도 안 읽어지고 영화도 안 봐지는 그런 날들─. 그런 날들이면, 평소 좋아하던 영화나 책들조차 스스륵, 눈동자 표현에서그저 미끄러져 내려버리고 만다. 그런 날들 속에서, 우연히, 아주 예기치 못하게, 어떤 책이나 영화를 만나게 되고, 그것에서 눈을 뗄 수 없는 그런 경험 ─ 다들 한번씩은 있지 않은가.
이 영화가 바로 그 영화였다.
조쉬 하트넷.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그렇게 애착을 갖는 배우는 아니다. 미남 배우라고는 하는데, 그다지 내 눈에는 좋아하지도 않는 배우이다. 다이앤 크루거 역시, 어디서 본 적 있는 배우 (내 눈에는 <내셔널 트레져>의 니콜라스 케이지 부인으로 각인되어 있을 뿐) 정도일까. 솔직히 관심 밖의 배우들과 관심밖의 영화였다.
그런 종류의 영화를 우연한 기회에 접하게 되고, 생각보다 그 흡입력이 굉장할 때 ─ 아, 이 영화 매력있네, 라는 생각을 하게된다.
초반부의 흡입력은 꽤 놀랍다. 흥미로운 소재거리를 무심한듯 툭 던지고는, 관객이 궁금해서 견딜수 없게 만들고 만다. 여자친구 부모님을 만나는 어느 레스토랑에서 매튜(조쉬 하트넷)은 과거의 연인 리사(다이앤 크루거)의 흔적을 느낀다. 그리고 매우 집요한 방법과 우연의 도움으로 그녀의 자취를 쫓기 시작한다. 매우 범법적이고 스토커적인 방법과 과정들이 난무하지만 그정도는 영화의 로맨스를 위하여 너무 현실적으로 다가가지 않기로 하자. 단지 관객이 궁금한 것은 ─ 왜, 어째서, 어떤 사람이길래 그토록 그가 애타게 찾아 헤매는지, 그리고 그가 지금 쫓고 있는 그녀가 정말 그녀가 맞는지, 그 뒤의 이야기일 것이다.
그리고 영화의 잘 짜여진 구성력으로, 우리는 2년여간의 시공간을 넘나들면서 그 내막을 하나씩 알아나가게 된다. 2여년 전, 비디오 가게에서 일하던 매튜는 고객이 맡긴 비디오에 담긴 한 여자에게 첫눈에 반하고 만다.
바로 그녀가 지금 그가 그토록 찾아헤매는 '리사'이다.
여기서 또다시 매튜는 2년 전에도 스토커 기질이 다분했구나 ─ 라는 관객의 실소를 불러 일으키지만, 이 역시 영화의 스토리를 위해서 가뿐히 넘어가주기로 한다.
그렇다. 2년전, 그는 단순히 비디오 속 그녀에게 첫눈에 반해서 그녀가 가는 곳을 따라다니며 그녀를 엿본다. 그리고 친구가 일하는 한 구두가게에서 그녀에게 드디어 말을 걸수 있게 된다.
그것에 매튜와 리사의 첫 만남이었다. 그리고 '아주 다행스럽게도' ─ 내가 이러한 표현을 쓰는것은 앞으로의 스토리를 보면 더욱 납득이 될 것이다 ─ 리사 역시 매튜에게 호감을 갖게 되고, 그 둘은 그렇게 행복한 사랑을 하게 된다.
여기까지는 분명히 아름다운 로맨스 이야기 일것이다. 첫눈에 반한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아주 동화같고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 딱 로맨스 영화에 어울리는 기분좋은 감정.
하지만 무슨 이유인지 모르게, 매튜가 함께 살자고 말한 바로 그 다음날, 리사는 행방을 감추어 버린다. 아무런 메시지도 없이. 그녀는 유럽에 댄스공연을 위해 그저 떠나버리고 만다. 오직 매튜만을 남겨둔 채.
그렇게 갑작스런 이별을 맞은 매튜는 절망감게 사로잡히게 되고, 바로 그 '리사'가 2년이 지나 매튜의 주변에 나타난 것이다. 너무나 가슴아픈 이별을 맞이했던 매튜이지만, 리사의 조그마한 흔적에도 2년전 그 감정을 불러일으키고야 마는 매튜. 그의 곁에는 미래를 약속한 약혼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몇일간 오직 리사만을 찾아 해맨다.
매튜가 리사의 집이라고 확신한 그곳. 하지만, 역시 기대는 무참히 무너져 내린다. 그곳에는 리사가 아닌, 리사라는 이름을 가진 전혀 다른 여자가 있었다. 분명 '이 리사'는 '그 리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매튜는 묘한 찝찝함이 버려지지 않았다.
결국 그는 모든것을 버리려던 마지막 순간, 다시 확인을 해보게 되고. 결국 모든 진실이 드러난다.
사랑에 빠지면 뭐든지 하게 돼요
리사인척 연기를 했던 그녀는, 또하나의 매튜였다. 매튜가 리사에게 반해서 그녀를 쫓아다녔던 것처럼, 그녀 역시 매튜에게 한눈에 반해서 홀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 그리고 그녀(알렉스)와 리사가 친구라는 묘한 인연까지.
영화의 후반부, 리사인 척 연기를 했던 알렉스는 무대 뒤에서 분장이 지워질 정도로 눈물을 흘린다. ─ 지난 2년여간에 끌어왔던 그녀의 가면이 벗어지는 과정이었을까. 눈물로 지워지는 그녀의 분장은, 꽤나 두껍지만 결국엔 그녀의 본래의 모습을 드러내고야 만다.
당신이 사랑하는 동안에
나도 당신을 사랑했어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한다면, 아무 문제가 없을것이다. 그리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내가 사랑할수 있다면, 그 역시 행복하겠지. 하지만 우리들의 인간의 사랑은 그렇게 단순하고 명료하지만은 않았다. 나도 모르는 사이 누군가는 나를 사랑하고, 나도 모르는 사이 그에게 상처를 줄수 있는 것이 인간관계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랑'이라는 변명만으로 모든것이 용서될 것인가 ─. 나는 결코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랑이라는 합리화로 거짓이 용서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은 '진실'에 기반해야 할 테니까.
사랑과 우정에 대한, 그 인간들의 내밀한 감정관계를 꽤 잘 묘사해낸 영화. 철학적이거나 현학적으로 빠지지 않고, 현실에 기반을 두고서 예리하게 표현해 낸 영화. 단순한 '사랑영화'라기엔, 남자들끼리의 우정과 여자들끼리의 우정 사이에서의 묘한 긴장감과 회색빛 거짓말들, 인간의 내면에 숨겨진 심리묘사까지 아주 잘 우려낸 영화가 아닐까 싶다.
그러하기에, 한번쯤 볼만한 영화. 누군가에겐 큰 울림이 될 테고, 누군가에겐 참 싫은 영화라는 딱지가 붙을지도 모르겠지만. 잘 만들어진 영화임은 틀림없을 것 같다. 물론, 거짓으로 점철된 2년간의 기간에 ─ 마지막 순간 왠지 모를 찝찝한 기분이 드는 것은 관객의 몫이 되고야 말테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