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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구비 Oct 13. 2024

위화 <인생>을 읽고


서문 - 마음의 소리
(전략) 앞에서도 말했듯이 나는 현실과 긴장 관계에 있다. 좀 더 심각하게 말하자면, 나는 줄곧 현실을 적대적인 태도로 대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마음속의 분노가 점차 사그라지자, 나는 진정한 작가가 찾으려는 것은 진리, 즉 도덕적인 판단을 배격하는 진리라는 걸 깨달았다. 작가의 사명은 발설이나 고발 혹은 폭로가 아니다. 작가는 독자에게 고상함을 보여줘야 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고상함이란 단순한 아름다움이 아니라, 일체의 사물을 이해한 뒤에 오는 초연함, 선과 악을 차별하지 않는 마음, 그리고 동정의 눈으로 세상을 대하는 태도다. (중략) 이 소설에서 나는 사람이 고통을 감내하는 능력과 세상에 대한 낙관적인 태도에 관해 썼다. 글을 쓰는 과정에서 나는 깨달았다. 사람은 살아간다는 것 자체를 위해 살아가지, 그 이외의 어떤 것을 위해 살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내가 고상한 작품을 썼다고 생각한다.  



소설에 작가 서문이 있으면 독자가 자유롭게 작품을 해석하는 것을 제한하기 쉬울 텐데, 이 소설에는 떡하니 작가의 서문이 달려 있다. 그런데 작가 서문이 본문의 핵심에 너무 잘 맞아떨어져서, 이 책에서 단 하나를 발췌한다면 이 부분을 택하고 싶다. 작가는 푸구이의 인생을 초연한 태도로 써 내려간다. 선과 악 어느 한 편에 서서 사필귀정이나 부조리를 조명하지 않는다. 마지막 장면에서 푸구이는 살아간다는 것 자체를 위해 살아가는 모습을 완벽하게 보여준다. 다른 어떤 삶의 이유도 그에게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본문에서는 주인공의 구체적인 삶을 다루면서 관념적인 이야기를 좀처럼 하지 않는데, 서문에서 관념적인 해설을 이렇게 근사하게 하고 있다.  


주제를 드러내는 과정에서 작가가 등장인물에게 너무 가학적인 것이 아니냐는 원망도 들었다. 독자들 역시 등장인물과 함께 고통을 감내해야 했는데, 특히 유칭의 이야기는 좀 트라우마 경험에 가까운 느낌이 들 정도로 머릿속에 강렬하게 박혀서 괴로웠다. 다만 위화의 문체 느낌이 소박하고 해학적이어서 어느 정도 중화가 되는 것 같다. 날카롭고 비장하게 말하는 작가였다면 읽는 것이 더 힘들었을 것이다.


역사적 사건이 많이 등장하고 참혹한 느낌을 주는 소설보다는 동시대 개인의 삶을 보여주는 소설에 더 매력을 느끼곤 한다. 하지만 위화가 '고상함'에 대해 고민하고 만들어낸 특징에 대해서는 훌륭하다고 느껴, 기억해 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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