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블로 <당신의 조각들>을 읽고

by 은구비

타블로가 2008년에 냈던 <당신의 조각들>이라는 단편소설집의 첫 장에는 친필 서문이 실려 있다.


나는 마음이 닫혀 있었고, 이상할 정도로 자의식이 강했고 또 냉소적이었습니다. 이 소설은 그런 스무 살 전후의 흥분과 비밀의 조각들입니다. 하지만 내가 사랑하는 글 쓰는 시간을 통해 내가 갇혀 지내는 세상이 다가 아니라 더 아름다운 다른 세상이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모두가 올라가려고 발버둥 치는 사다리 따위는 걷어차고 당신 옆에 남겠습니다. 나는 당신의 외로움을 압니다. 나는 당신의 그림자를 압니다.

처음 책장을 펼쳤을 때, 상당히 감상적인 서문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별다른 기대 없이 타블로의 노래를 좋아하기 때문에 글을 읽어 내려갔는데, 다 읽고 나서 그대로 책장에 꽂아두지 않고 한 번 더 읽었다. 설명하기 어렵지만 전반적으로 마음을 끄는 감성적인 분위기가 있었고, 어떤 수준의 독자라도 즐길 만한 것이었다. 대체로 이해할 수 있는 비유와 은근하게 치고 빠지는 서술 방식에 매혹되었다.


단편들 중에서 <쉿>이라는 작품이 가장 마음에 남았는데, 스물 즈음의 그가 잘 그려낼 수 있었을 중요한 감정을 잘 골랐다고 느꼈다. 글을 읽으면서 정서적인 경험을 하게 되었고, 그 순간이 기억에 남았다. <쥐>에는 성적 유혹에 대면해 갈등하는 주인공에게 잘 어울리는 비유가 있었다. <안단테>에서 인물의 감정을 정확하게 짚어낸다 느꼈고,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도 매력적이었다. 청년기 자녀가 부모와 멀어지고 싶은 감정, 성공한 아버지를 둔 아들이 느낄 만한 감정이 잘 드러났다.


교수는 내게 속삭였다. 너에겐 네 아버지의 손가락이 있어.
나는 눈을 감고, 고통을 들었다.
(중략)
내가 아버지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무대 위나 피아노 옆에서 보아온 것이 전부였다. 주위를 둘러보며 나는 세상과 나란히 아버지를 공유하고 있을 뿐, 그는 나의 것이었던 적도 없었고, 결코 나의 것이 될 수도 없음을 깨달았다. 난 그들이 보고 있지 않는 무언가를 볼 수 없었고, 그들이 듣고 있지 않는 무언가를 들을 수도 없었다. 나는 나만이 가질 수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 간절했다.


<승리의 유리잔>은 독자를 완전히 주인공의 편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는 게 인상적이었다. <최후의 일격>은 비현실감이 있지만, 영화 스토리처럼 머릿속에 잘 그려지는 이야기였다.


훌륭하다고 인정하면서도 그 작가의 팬이 되지는 못하는 경우도 많이 있다. 그런데 타블로가 만들어낸 글들은 어딘가 내 감성을 건드리는 구석이 있었다. 이런 예술 작품의 특징은 뭘까 혼자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잘 발달한 감성을 이용해서 글을 쓰는 것일 수도 있고, 그 사람이 가진 인간적 매력, 이를테면 사회성의 영향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내가 거북하게 느끼는 요소가 없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인식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쩌면 피해의식, 증오와 무시, 어설픈 사회비판, 교조적 태도 같은 것이 아닐까 한다.

감상적이라고 생각했던 서문이 다시 보니 의미심장하게 보였다. 스물 무렵에 이런 글을 쓰는 사람이었다면, 사다리를 올라가는 것은 쉬웠을 것이다. 문단에서 호평받는 작가이자 대학 교수로서 살아가는 인생이 선택지가 되었을 것 같다. 그렇지만 타블로는 더 대중적으로 향유될 만한 예술을 하고 싶어 했다. 외로움을 잘 느끼는 사람에게 좀 더 어울리는 선택이라는 생각도 든다.

타블로의 노래 중에 <개화>의 가사를 좋아한다. 심상이 머릿속에 생생하게 그려지고, 정서 경험과 통찰이 있다. '내가 밟은 길을 잘 봐둬/ 언젠가는 너의 옆에 걷지 못할 거야/ 여기 발자국을 남겨둬'라고 말할 때 아이를 두고 떠나야 하는 마음에 공감하다가, '보고 피해'라는 예상을 벗어나는 말을 듣는다. '물음표처럼 구부러진 내 길은 / 그저 무수한 문제만 낳기에'에서 길의 심상이 이어지고, '어쩌면 출발을 알리던 총성은 내 등을 향한 거였어'라고 할 때 전해지는 비통한 느낌. '잘 들어 온 세상이 너를 환영해도/ 그 세상이 너를 버릴 테니', '갈채 쏟아질 때 취하지 마 때론 칭찬으로 너의 발을 묶을 거야'에서 비통한 사람의 세계관을 알게 된다. '레드카펫 깔아줘도 잊지 마라/ 그게 너의 피땀으로 붉게 물든 거야'에서 길의 심상이 다시 나타나고, ' 나를 보고 꿈꾸는 너의 그 꿈은 깨고 보니 악몽이 아니길' 바라면서 아이를 사랑하는 부모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생각으로 돌아온다. '네가 뭐가 되더라도 응원할게'. '나처럼 되지만 않으면 돼.'


이렇게 타블로의 시를 들을 수 있는 것으로도 감사하지만, 언젠가 두 번째 소설집이 나오기를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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