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는 앎의 기쁨을 준다고들 한다. 그러나 그것은 극히 일부로 국한되며, 우리가 독서를 통해 새로운 것을 알기란 대단히 어렵다. 보통은 아는 것만 보일 뿐이다. 우리는 이미 체험으로 습득한 지식을 책을 통해 재발견하고, 자꾸만 이미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말해주는 책을 찾는다. 우리는 독서를 통해 점점 완고한 사람이 되어간다.]
이 부분을 읽고 수영은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되었고, 자신이 알고 있었던 사실이라고 생각했다. 그 점에서 그 책에 끌리는 자신을 발견했다.
[간접 경험을 늘려준다는 것이 독서의 장점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나는 책 중독 때문에 직접 경험을 하지 않고 간접 경험만 하려는 사람들을 본다. 유능한 전문직 종사자가 나오는 소설을 즐겨 보지만 자신은 취업준비를 미룬다. 로맨스 소설을 즐겨 보면서 실제 연애 상대가 될 만한 사람들을 외면한다. 이와 같은 대리충족은 장기적으로 더 큰 결핍을 낳게 된다.]
이 부분을 읽고서 책날개를 뒤져 보니 저자에 박사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그녀는 자신이 추구하는 간접 경험은 무엇인가 생각했다.
[진정한 앎이란 삶의 변화로 이어지는 앎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흔히 책을 읽고 '머리로만 안다'라고 하는 인식 상태는 감정이 따라오지 않아서 행동으로 이어지지 못할 때가 많다. 나의 부모는 육아서를 탐독했지만, 나를 통제하려고 하고 뜻대로 되지 않으면 분통을 터뜨리기 일쑤였다. 책을 아무리 읽어도 우리는 좀처럼 변화하지 않는다.]
이 대목이 그녀의 마음에 들었다. 박사와 한층 가까워진 느낌이 들어서였을까, 그녀는 이 페이지 귀퉁이에 '간접경험?'이라고 메모했다.
독서의 해악을 알려주는 책과 함께 일주일을 버티자 그녀는 더 이상 금단 증상에 시달리지 않았다. 그저 삶이 무료하다는 것이 문제였다. 이 시설에는 중독이 생길 만한 웬만한 물건은 비치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할 일이 부족했다. 책을 비롯해서 컴퓨터, 스마트폰, TV, 게임기가 없었고, 커피와 수면제와 담배가 없었다. 이곳으로 택배를 배송시켜서는 안 됐고, 가족이 달콤한 간식을 보내주어서도 안 됐다.
"중독될 만한 게 없다는 건 삶의 낙이 없는 곳이라는 거예요, 박사님. 너무 지루하고 따분해서 이만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지금 일상에 돌아가서 책을 멀리 하려면 큰 노력을 기울여야 겁니다. 이곳에서 조금만 더 버티면 수월해져요. 중독을 극복하려는 사람들과 가깝게 지내보세요. 대인관계야 말로 인생의 진정한 즐거움 아니겠습니까?"
"그런가요? 박사님은 주말이면 친구들과 어울려서 골프를 치거나 술을 마시면서 인생의 진정한 즐거움을 느끼세요?"
박사는 안경 너머로 그녀를 흘긋 보더니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 책 7장에서 대인관계를 다루고 있으니 한 번 읽어보시죠."
"7장에 그런 내용이 있었던가요? 이곳에 저 같은 중독은 아무도 없어요. 함께 이야기를 나눠도 하나도 즐겁지가 않던 걸요."
"똑같이 책 중독인 사람들이랑 책 얘기하고 나중에 북카페에서 만나 책이나 진탕 읽으면 서로 무슨 도움이 될 건지...... 다른 중독을 가진 사람들이랑 대화를 하면, 서로가 좀 더 도움 받을 건데요."
수영은 박사가 모니터 모퉁이에 나오는 시계를 흘끔거리며 마우스를 자꾸 클릭하는 모습을 보았다. 문득, 박사가 책을 쓸 때와 달리 말을 할 때는 비문이 되게 말하는 것, 말꼬리를 흐리는 것이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책에서는 자기 사적인 이야기를 공개하면서 면담할 때는 감추는 것도 못마땅했다. 그녀는 면담이 더 길어지지 않도록 박사 말에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중독은 이차적인 문제일 때가 많다. 책에 중독된 근본적인 원인을 치료하지 않으면 치료가 효과적일 수 없다. 나의 임상 경험에 따르면 책 중독에서 자주 관찰되는 문제는 사회성의 문제였다.
책 중독자들은 사람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습성이 있다. 독자적으로 사고하여 선택하겠다며 남의 행동을 좀처럼 따라 하지 않는다. 소외감을 느끼게 되면, 자기 방어적으로 대인관계에 냉소적인 태도를 취한다.
말보다는 표정과 행동을 살필 것, 남들이 하는 대로 따라 할 것, 타인을 폄하하기 전에 본인의 미숙한 사회기술을 개선하고자 노력할 것을 당부하는 바이다.]
수영은 7장에서 자신에게 해당되는 문제가 별로 없어 보이길래 줄을 치지 않고 넘겼다.
퇴원 날이 점점 다가오자 수영은 <책 중독>의 마지막 부분을 되풀이해서 읽었다.
[한 번의 입원으로 치료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분명 재발하는 순간이 오겠지만, 포기하지 말고 빨리 치료를 재개하라.]
소리 내 읽으면 '치료를 재개하라'라는 짤막한 표현에서 힘이 느껴졌다. 어쩐지 그래야 할 날이 꼭 올 것만 같았으며, 그때 바로 이 문장이 그녀에게 힘을 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퇴원 뒤 석 달 정도는 독서를 끊은 상태가 잘 유지되었다. 과거에는 책을 도중에 덮기 어려워서 밤낮이 바뀔 때가 잦았는데, 규칙적으로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났다. 구부정했던 자세가 반듯해졌고, 운동량이 늘었으며, 뻑뻑했던 눈이 편안해졌다. 자주 머리가 지끈거렸던 것이 없어지고 머리가 맑아졌다. 즉각적인 텍스트 자극을 추구하는 것이 줄어드니까 스스로 사유를 하게 되었다. 그래서 전보다 글을 더 많이 쓸 수 있었다.
그녀는 새로운 즐거운 활동을 찾는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생전 처음으로 콘솔 게임기를 손에 쥔 순간부터, 책 속 세상보다 더 또렷하고 생생한 가상공간에 빠져들었다. 은행을 털고 경찰차를 따돌리며, 남의 차를 빼앗아 질주하는 GTA의 세계가 그렇게 짜릿할 줄은 몰랐다. 진영은 퇴근해 문을 열었을 때, 그녀가 열심히 총을 쏘고 운전하는 화면이 보이면 안도했다. 책 중독 치료를 받도록 한 보람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예견대로, 100일이 지났을 즈음 수영의 병은 재발했다. 짧은 단편 하나만 읽으려고 했는데, '우울과 몽상'과 같이 두꺼운 단편집을 골랐다는 게 실수였다. 단편을 연달아 읽은 뒤에, 어차피 단편 여러 편은 장편보다 길기 때문에 다를 바가 없다며, 장편도 읽기 시작했다. 급기야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까지 읽는 지경으로 악화되고 말았다. 오랜만에 책을 읽는 맛이 달았으나, 그녀는 '치료를 재개하라.'는 문장을 떠올렸다.
다음날 다시 중독 센터에 찾아가서 다급하게 문을 열었을 때, 박사가 홀로 책상에 앉아 있었다.
"아니, 앞에 입간판 못 보셨습니까? 수요일은 휴무입니다."
그녀는 죄송하다고 고개 숙여 사과를 했다. 박사의 책상 위에 책 한 권이 펼쳐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난치 케이스가 있어서 최신 동향을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수영은 책에서 배운 대로 박사의 표정을 살펴보았는데, 눈동자가 좌우로 멈칫하며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 특이하게 보였다. 박사가 고개를 돌리고 뒤표지가 보이도록 책을 덮었다. 구매하고 나서 상당히 세월이 흐른 듯 옆면이 거뭇거뭇하고 책장이 부풀어 올라 있었다. 수영은 박사와 마주 앉아 대화를 하는 것보다, 그가 쓴 책을 집에 가서 읽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시청의 대형 서점에서 가서 <책중독> 2판 증보 개정판을 구입했다. 띠지에는 굵은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책중독 치료를 재개하라'. 그녀는 치료를 재개하기 위해 곧장 책을 펼쳐 들었다. 그리고 역시나 <책 중독>에 있는 글귀가 맞았다는 것을 깊이 깨달았다. '책을 아무리 읽어도 우리는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 그녀는 그 문장을 외우듯 곱씹으며, 다시 책 속으로 천천히 빠져 들어갔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