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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반경(1)

by 은구비

비행기가 이륙하면서 귀가 먹먹해졌다. 그때 반사적으로 수영은 비행기 추락사고 장면을 상상했다. 어차피 사고란 좀처럼 일어나지 않고, 일어난다 해도 순간일 테니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아이가 곁에 있었더라면 지금보다 더 공포스러웠을 테니, 얼마 전에 시작한 난임치료에 아무런 성과가 없다는 게 오히려 다행으로 느껴졌다.

죽음에 대한 불안이 채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이번에는 '비행기는 오존층 가까이에서 배기가스를 내뿜기 때문에 오존층 파괴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이 불쑥 떠올랐다. 배운 뒤로 한참 동안 그저 잠자고 있던 기억이었다. 수영은 지구 환경을 파괴하는 데 일조하고 싶지 않았다.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포식이라면 얼마간의 파괴가 용인될지 모르지만, 그녀는 생일 즈음 이국적인 도시의 저렴하면서 안락한 리조트에서 머물고 싶었을 뿐이었다.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해외여행을 떠났으므로 그녀 역시 별생각 없이 따라 했던 것이다. 그런데 되돌이킬 수 없는 끔찍한 선택을 한 것처럼 속이 메스꺼웠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집에는 수영의 생일 선물 택배가 쌓여 있었다. 그녀가 메신저에 만들어 놓았던 위시리스트 속 선물이었던 머그컵과 책. 흔한 단골 선물인 립밤이나 핸드크림, 바디로션, 샴푸. 안타깝게도 그녀는 평소 애용하는 화장품이 있었고, 간혹 선물 받은 제품을 사용했지만 현재 속도대로면 유통기한 내로 다 쓰기 어려울 것이다. 모자는 그전에 선물로는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것이었다. 그녀는 모자를 쓰고 거울을 쳐다보았다. 모자챙을 눌러서 몇 번 고쳐 써보았지만 역시 어색해 보였다.

그녀의 생일을 기억하고 수고스럽게 선물을 골라서 보내왔다는 사실은 고마웠다. 다만 갑자기 그 모든 낭비가 아깝게 느껴지고, 불필요한 물건을 소유하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게다가 수영은 그에 대한 보답으로 상대의 생일이 다가오면 또 별 필요 없는 물건을 사서 보낼 예정이었다. 늘 그랬듯이 그녀는 진영에게 하소연을 했다.

"선물을 주고받을 땐 꼭 중간에 손실이 생겨. 상대가 필요치 않은 물건을 고르고, 선물이니까 과한 양을 담고, 고급스럽게 포장을 하면서 줄줄 새어나가는 거야. 서로 거리가 먼 사이라면 더더욱."

"그렇다고 필요한 것만 받는 건 재미없지 않아? 새로운 물건을 써보고 좋아하게 될 수도 있는 건데."

"난 점점 선물을 받는 게 즐겁지 않아. 다음에 갚아야 할 빚을 진 듯한 느낌 때문에 오히려 마음이 무거워. 남에게 선물을 주는 게 미안할 정도야. "

진영은 선물 문화에 대해 거부감이 없었지만, 수영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며 반박하지 않았다. 그는 튀지 않고 모두가 흔히 하는 대로 행동하는 편이었고, 다른 이들과 부딪치는 일도 별로 없었다.


수영은 택배 상자의 테이프와 스티커를 빠짐없이 떼어내서 일반 쓰레기봉투에 버리고서 종이 상자만 접어서 쌓았다. 스티로폼 완충재와 비닐 뽁뽁이를 분류해서 다른 재활용 쓰레기 주머니에 넣었다. 화장품 선물상자의 완충재는 옥수수로 만들어서 환경에 좋다고 광고하는 것이었는데, AI에게 물어본 끝에 그녀는 그것을 일반 쓰레기봉투에 버리기로 결정했다. 일주일 동안 모은 재활용 쓰레기 주머니를 양손에 들고, 접은 종이상자들은 옆구리에 끼고 아파트의 쓰레기장에 가다가 여러 번 종이 상자를 떨어뜨려서 주섬주섬 주웠다. 15층짜리 아파트 두 동이 함께 쓰는 재활용 쓰레기장에는 이미 발 디딜 틈 없이 쓰레기 더미가 쌓여 있었다. 수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주말마다 승용차를 끌고 지방 소도시를 여행하고, 겨울과 여름휴가에 비행기를 타는 것이 그들의 루틴이었다. 지난번 해외여행 뒤로 수영이 비행기를 타지 못하겠다고 했기 때문에 루틴을 바꾸어야 했다. 겨울 휴가지로 이미 제주도의 리조트를 예약해 놓은 상태였다. 루틴을 바꾸고 계획이 취소되는 것, 진영이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지만 내심 무척 거슬려하는 일이었다. 결국 두 사람은 밤에 목포에서 출발하는 여객선을 타고 원래 계획대로 제주도로 떠났다.

첫날은 제주도 날씨로는 드물게 구름 한 점 없고 바람조차 잠잠했다. 진영이 “날씨가 너무 좋다”라고 하는 말에 수영이 무심코 하늘을 올려다보자, 리조트 굴뚝에서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흰 연기가 눈에 들어왔다. 이튿날, 야외 수영장에 몸을 담갔을 때 또 한 번 비슷한 기분이 스쳐 지나갔다. 수면 위로 자욱하게 김이 번지며 노천 온천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러나 따뜻한 물에 몸이 풀리기보다는, 수온을 유지하기 위해 타들어가는 연료를 생각하며 몸이 가볍게 떨렸다.


제주도 다음 주말 여행지는 청송이었다. 미세먼지로 희뿌연 날에 세 시간 가까이 차를 타고 달리다 보니 수영은 다시금 자책에 빠져들었다. 안 그래도 난방을 하느라 미세먼지가 높아지는 시기에, 주말마다 먼 길을 이동하느라 화석연료를 소비하고 세상에 먼지를 더 늘리고 있었다. 집 근처에도 관광 명소가 제법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먼 지역에서 새로운 볼거리를 찾고 있는 자신이 이해되지 않았다.

집에서는 일주일에 한 번 화장실 청소를 하고 한 달에 한 번 침대 시트와 이불을 세탁하는 정도였다. 그에 비해 여행에서는 단 하루의 쾌적함을 위해 누군가 숙소를 매일매일 청소하고 침구를 교체하고 있었다. 그녀가 만들어낸 이 모든 공해가 죄스럽게 느껴졌다.

이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순간,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차가 금방이라도 전복될 것 같이 아슬아슬한 불안이 몰려왔다. 어두운 터널에 진입하자 숨이 막힐 것 같이 답답하고 손발이 차갑게 저려왔다.


- 2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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