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송 여행 뒤로 수영은 이동 반경을 더 줄이고 싶다고 했다.
"고속도로 여행을 가끔씩만 떠났으면 좋겠어. 가령 여름이나 겨울 휴가여행이라든지."
"알았어, 여행 경비를 줄이면 대신 돈을 많이 모을 수 있겠네."
진영은 차분하게 대답했지만, 대화를 마치고 부엌으로 가서 냉장고에 오랫동안 방치돼 있던 맥주 캔을 꺼내 들었다. 그것을 따는 소리가 집 안에 짧고 날카롭게 울렸다.
며칠 뒤 진영이 운동을 마치고 돌아와 주방에서 컵에 물을 따르고 있을 때였다. 등 뒤에서 서늘한 기운이 느껴져 돌아보니, 수영이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가까운 거리도 걷지 않고 꼭 차로 운전해 다니고, 우리 집 4층인데도 항상 엘리베이터 타고 다니잖아. 그러면서 왜 굳이 전력을 써서 러닝머신 위를 달려? 에너지 소비에 대한 생각이 전혀 없는 거지."
"무슨 소리야. 우리나라는 봄에는 미세먼지, 여름에는 폭염, 겨울에는 한파 때문에 야외에서 운동하는 게 어렵잖아."
진영은 숨을 고르고, 다른 할 말을 찾는 중인지 눈을 몇 차례 깜빡였다.
"그리고 말이야, 너한테 그렇게 환경보호가 최우선 가치라면, 난임 클리닉은 뭐 하러 다녀. 아이를 낳지 않는 게 에너지 소비와 쓰레기 배출을 가장 줄이는 길일 걸. 기저귀 쓰레기에, 대중교통 이용도 어렵고. 좀 크면 학교에서 준비물이며 행사며 물건 잔뜩 소비하고 버리겠지. 네가 그렇게 싫어하는 선물도 많이 사게 될 거고......"
"궤변 늘어놓지 마. 극단적으로 완벽하게 할 수 없다고, 노력하는 게 아무 소용도 없는 건 아니야."
탁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진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침대에 엎드려 손에 닿는 대로 책을 펼쳐 들었다가, 한 대목에 수영의 시선이 머물렀다.
[늑대 복원을 하면서 사슴 개체수가 줄어들었다. 그러자 풀숲이 무성해지면서 더 다양한 생태종이 살아가게 되었고 생태계 균형이 돌아왔다.]
지구에는 이미 인간들이 너무 많아 보였다. 인간 이외의 생물종은 하루에도 백여 종씩 멸종하고 있는 중이었다. 마치 사슴처럼 지금은 인간의 개체수가 줄어들어야 생태계 균형이 잡힐지도 모른다. 이 와중에 그녀가 인간을 또 한 명 더 보태는 것은 이기적인 행위가 아닐까? 그녀는 처음에 왜 아이를 갖고 싶어 했던 것인지 거슬러 올라가 생각해 보았으나 특별한 계기는 없었다.
미세먼지가 자욱했던 봄날에 수영은 한 번도 승용차를 타고 나가지 않았다. 주말에는 진영과 근린공원을 걸었고, 가끔 친구가 만나자고 하면 지하철을 타고 다녀왔다. 일주일에 두 번쯤 자전거를 타고 동네 마트에 가서 장을 보았다. 원래는 진영이 화요일과 금요일 밤에 인터넷으로 주문을 해서, 다음 날 밤새 달려온 트럭이 내려주는 식자재를 정리했었다. 그는 할 일이 줄었지만, 자기 전에 다음날 아침으로 먹을 우유나 달걀이 떨어졌다는 걸 깨달을 때면 불편했다.
"이런 식으로는 세상이 달라지지 않아. 무인 드론 배송 같은 기술 혁신이 일어나면 모를까."
"그럴지도...... 그런데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뭐라도 하는 거야."
수영은 혼잣말처럼 나지막하게 말했다.
며칠 동안 자꾸 나른하고 졸렸다. 오한 증상까지 더해지자, 수영은 감기약을 삼키려다 말고 임신 테스트기를 꺼내 들었다. 결과를 쳐다볼 때 멍해지면서 이명 같은 것이 잠깐 지나갔다. 자신의 삶을 살고 있는 중이 아니라, 그저 영상의 한 장면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비현실감 속에서 진영에게 연락을 했다.
진영은 꽃다발을 사러 갔다가, 오래가는 화분이 낫겠다 싶어 보라색 수국 화분을 골랐다. 플라스틱이 아닌 도자기로 된 화분에 담긴 것을 찾으려고 꽃집 몇 군데를 더 들러서 사 온 것이었다. 수영은 이야기를 듣고 웃으며 말했다.
"꽃다발이어도 괜찮아, 꽃은 금세 흙으로 돌아갈 테니까."
그녀는 입덧과 몸살에 시달리면서 더 이상 걸어 다니고 싶지 않았다. 혼탁한 냄새와 열기가 있는 지하철에 몸을 싣고 싶지도 않아서 하는 수 없이 운전을 다시 시작했다. 식당에서 배식받은 것을 깨끗이 비우지 못하고, 한 입만 먹고 기름진 튀김을 접시에 내려놓았다. 그녀는 식사를 마치고 남아 있는 음식 찌꺼기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울렁거림을 당장 가라앉히려고 텀블러가 없는데도 다급하게 카페에서 음료를 주문했다. 일회용 플라스틱 컵에 든 아이스 음료를 들이켜고 나서야, 조금만 참을 걸 그랬다며 후회를 했다.
자꾸만 복숭아를 먹고 싶어진 그녀는 새벽 배송 마감 직전에 주문 버튼을 눌렀다. 다음날 아침에 물기를 가득 머금은 복숭아를 한껏 먹어치우며 왠지 안도감이 들었다. 특정 음식을 향한 이상스러운 허기를 참아야 하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다는 것에.
진영은 음료가 남아 있는 플라스틱 통이 세척되지 않은 상태로 일반쓰레기봉투에 버려진 것을 발견했다. 입덧이 있을 때 먹기 좋다는 크래커 빈 봉지도 일반 쓰레기통에 들어가 있었다. 재활용 쓰레기함에는 부착된 스티커를 떼지 않고 버린 플라스틱 병이 쌓여 있었다. 진영은 수영이 또 맥없이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을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에 기름진 플라스틱 통을 씻고 쓰레기를 정확하게 분류해서 버렸다.
수영은 지긋지긋한 입덧이 사라지자, 태교 여행 비슷하게 나름의 여행을 가보고 싶어졌다. 기차를 타고 경주를 여행해 보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진영이 그럼 자전거를 타고 첨성대와 대릉원을 돌아보자고 했더니, 어이없다는 듯이 대꾸했다.
"다치면 어떡하려고, 렌터카로 다녀야지."
"그럼 버스 타지 뭐."
"버스 배차 간격이 길어서 오래 기다려야 된단 말이야. 오래 서있기 힘들어."
"기껏 기차 타고 가서 렌터카로 시내를 다닌다구? 환경오염에 대한 생각이 없는 사람 같이."
수영이 피식 웃는 것을 보고, 진영이 말했다.
"아무래도 아기가 있으니까 우선순위가 달라지지."
수영은 턱을 괴고 건너편 창문을 보다가 말했다.
"그런 게 싫어. 영화나 소설에, 자기와 아이만 잘 살면 그만인 인간으로 그려지는 어머니상 있잖아. 옥시토신이 높아지면 그런대. 돕는 행동이 늘어나지만 자기 사람들한테만 그런다는 거야, 남한테는 더 인색해진대.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은데...... 쉽지 않네."
"아이가 우리보다 오래 이 환경에서 살아갈 테니 더 노력할 수도 있지 않아?"
플랫폼에 기차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둘 다 벤치에서 일어섰다. 시원한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선로와 바퀴가 마찰하며 금속성 소음이 울렸다. 문이 열리고, 수영이 계단 위로 발을 내딛자 진영도 뒤따라 커다란 캐리어를 계단 위로 끌어올렸다. 캐리어에는 대용량 물통과 텀블러 두 개, 식당에서 음식이 남았을 때 담아 올 반찬통이 들어 있었다. 그들은 자리에 앉아 창밖을 쳐다보며 출발을 기다렸다. 수영의 두근거림에는, 새로운 곳에 가면서 느끼는 설렘과, 죄책감과 불안이 뒤섞여 있었다.
기차는 매끄럽게 속도를 높여서, 어두운 터널을 향해 나아갔다. 수영은 배 위로 전해지는 움직임을 느끼고 가만히 손바닥을 얹어 보았다. 창밖의 풍경이 사라지고 어둠 속에 그녀의 얼굴만 남았다. 그녀는 문득 죽음이란 이와 같은 어둠 속으로 잠겨드는 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생명이 자라나고 있는데도 죽음을 떠올리는 일이 이상하게 낯설지 않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