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직원이 갈아입을 옷을 지급하는 즉시, 수영은 탈의실로 들어가 버렸다. 네이비색 낙낙한 바지에 몸을 집어넣다가 진영과 인사를 미처 나누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서둘러 바지를 추켜올리고 사물함 앞에 나머지 옷가지를 흩어 놓은 채, 입장 방향과 반대쪽으로 되돌아 나갔다.
"남편분 기다리시다가 막 귀가하셨어요. 들어가실 때 몇 번씩 막 부르셨는데."
그녀는 고개만 끄덕이고 돌아섰다. 누가 부르는 소리가 종종 의식의 수면까지 올라오지 않고 가라앉아 버리는 것이다. 청력 검사를 해본 적도 있었지만 물론 아무 문제가 없다고 했다. 그녀는 탈의실에 돌아가서 바지처럼 신축성 없는 소재로 된 브이넥 티셔츠로 갈아입었다. 합성 섬유가 섞여 있는지 목 언저리에 어딘지 까슬거리고 간지러운 느낌이 들었다.
출입문으로 입장할 때 그녀는 그동안 저지른 부주의한 실수에 대해 골똘히 생각했다. 창이 없고 형광등 불빛만 흐릿하게 비치는 통로 속에서 직원이 그녀의 주머니를 확인하고 금속탐지기로 몸을 훑었다. 탐지기는 고요한 상태로 불빛이 깜빡였고, 뒤이어 직원이 두 번째 문 앞에서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울렸다.
막연히 답답하고 어두운 공간에서 갇혀 지내게 될 것을 상상했지만, 내부에는 유리로 둘러싸인 중정이 있고 해가 설핏 비쳤다. 그녀와 같은 옷을 입은 사람 둘이 벤치에 앉아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눴고, 다른 한 사람은 이어폰을 낀 채 졸고 있는 건지 눈을 감고 있었다. 수영은 누구에게도 먼저 다가가거나 말을 걸지 않고 가만히 분위기를 살폈다. 그다음으로 중정에 눈길을 주었다. 실내인데도 올리브 나무가 제법 잘 자라고 있었고, 줄지어선 향나무는 테두리가 반듯하게 잘 다듬어진 상태였다.
저녁 식사 시간 안내 방송이 들려오자 각자 방에 있었던 사람들이 하나 둘 나오기 시작했다. 그녀는 사람들이 앉아있는 식탁과 비어있는 식탁 사이에서 고민하다 빈 식탁에 가서 앉았다. 곧 낯선 사람 둘이 다가와서 맞은편에 앉았다. 안경 쓴 남자가 한숨을 쉬며 말을 건넸다.
"오늘 오셨죠? 들어올 때 너무 굴욕적이잖아요."
수영은 영문을 몰라 미소만 지었다. 그녀가 실수 뒤에 무심히 지나쳐버린 구간이었다. 남자는 고개를 돌리더니 머리 희끗한 여자에게 회사 이야기를 꺼냈다. 그녀가 비슷한 주제를 다루는 책을 보게 되었다면 페이지를 빠르게 넘기거나 책을 덮었겠지만, 대인관계를 늘리라는 박사의 권고도 있고, 어차피 읽을 책도 없고 하여 이야기를 계속 들어보려고 노력했다.
"이 치료 때문에 한 달이나 병가를 냈다고요. 만회하려고 해 봐야 이번 분기는 고작 현상 유지일 거라는 데 짜증이 나요."
"이해가 되네요. 박사님이 저더러 한 달 직장을 떠나 있어도 일 년 동안 실적이 비슷할 거랍니다. 늘 맥시멈을 해내는 사람한테 프리라이더가 되라는 소리죠."
"제 업무 대행이 딱 그런 프리라이더예요. 지금쯤 제 메일함에 메일을 한가득 보냈을 걸요?"
"그러니까 걔네들처럼, 일은 대충 하고 칼퇴근해 저녁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거죠? 일주일씩 휴가내서 가족 여행 다니고 넷플릭스나 보면서."
그리고 작년 부서의 고과 배분이 정당했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졌는데, 수영이 딱히 끼어들어 말할 것이 없는 주제여서 그대로 듣기만 했다. 식사를 마치고 티타임까지 청취가 끝났을 때 그녀는 생각했다. '조금도 재미가 없다.' 어디가 마비된 것처럼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중정 주위 복도를 한 바퀴 가깝게 돌아서야 그녀에게 배정된 방이 나왔다. 1인실 안 침대 위에 반입된 세면도구, 필통 같은 것이 올려져 있었다. 그녀는 물건을 옆으로 밀어 두고 침대에 누워보았다. 처음에는 침대가 푹신한가 딱딱한가 느껴보려고 한 것이었지만, 씻지도 않고 그대로 잠에 들었다. 자기 전에 책을 잠깐이라도 읽는 것이 그녀의 오랜 습관이었음에도 - 어머니가 어릴 적에 그녀에게 매일 책을 읽어주고 재운 탓일 거라고 생각했다 - 그날 밤은 책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다음날 아침에 눈을 뜨는 동시에 책 생각이 났다. 버릇대로라면 이불속에서 전날 밤 읽다 만 책을 읽으며 꾸물럭거리다가 일어나야 했다. 아직 일어나고 싶지 않았지만 멍하니 누워 있기도 힘든 일이었다. 화장실 변기에 앉을 때 손에 들 책이 없고, 샤워할 때 스마트폰으로 전자책을 읽을 수 없었다. 아침 식사 시간에 고개를 푹 숙이고 책을 읽으면서 음식의 맛을 음미할 수 없는 것은 고역이었다.
점차 읽을거리 없이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거나 침대에 누워 있는 일이 고문 같이 느껴졌다. 초조감이 엄습해 왔고, 그녀는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했다. 하는 수 없이 서성이면서 침대 옆 협탁에 붙어 있는 생활 안내문을 읽다가, 욕실에 들어가서 샴푸와 클렌저 뒷면의 성분 표시와 주의사항을 읽으면서 버텼다. 시계를 자꾸 확인해 봐도 시간이 고작 몇 분도 흘러가 있지 않았다.
그날 저녁 식사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은 자신의 중독을 화제로 삼았다. 첫 날 만난 두 사람은 예상대로 모두 일 중독이었다. 그리고 또 다른 이들이 운동 중독, 쇼핑 중독으로 왔다고 알릴 때마다 나머지 사람들은 예의 바르게도 상대의 중독을 추켜세우는 반응을 했다. 이런 식이었다.
"저도 돈 많이 벌어서 정현 씨 같은 쇼핑 중독 좀 걸려 봤으면 좋겠어요."
"무슨 소리예요, 쇼핑 중독보다야 운동 중독이 건강에 훨씬 좋죠!"
수영은 빈 말을 하지 않는 편이라서 굳이 그들과 똑같은 반응을 하지는 않았다. 책 읽는 여가 시간을 근로에 조금도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운동 중독이라니, 상상만 해도 무릎 연골이 닳는 느낌이 들지 않는가. 쇼핑이란 퍼스널 쇼퍼라도 고용하고 싶을 만큼 지루하고 스트레스받는 활동이었다. 조금도 부럽지 않았고, 그들과 같이 고약한 중독에 걸리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그녀가 자신은 책 중독이라고 고백할 때 나머지 사람들이 아무 호응 없이 미소만 짓자, 거슬리는 느낌을 받았다.
'내가 책을 못 읽어서 예민해진 건가, 아니면 사람들이 날, 아니 책을 무시하는 걸까?'
밤에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기다려도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따뜻한 호박색 수면등을 켜고 바스락거리는 이불을 목까지 덮고서 책을 십 분만 읽을 수 있다면, 금세 눈꺼풀이 무거워지면서 쉽사리 잠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즉시 독서를 하고 싶은 강한 갈망을 느꼈다. 그녀는 뒤척거리다가 두 시간이 지나 겨우 잠들었지만, 그마저도 선잠으로 괴상한 꿈을 꾸다가 자주 깼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오고서 깜빡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오늘이 반납일이라는 문자가 온다거나, 고심 끝에 빌릴 책들을 골랐는데, 회원카드를 찍어보니 연체로 대출이 정지된 것과 같은 악몽이었다.
셋째 날 아침이 밝았을 때 수영은 한층 더 짜증스러워졌고, 마침 박사가 중독자들의 상태를 관찰하려고 돌아다니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화를 내고 싶은 충동을 느끼고 박사에게 다가갔다.
"지금 뭣들 하시는 거예요, 이제 더 이상 못 참겠다고요, 당장 저한테 책을......"
내용에 걸맞지 않게 책을 읽듯 단조로운 어조였다. 어색한 자기 목소리를 듣자 목소리가 더 작아지고 얼굴이 붉어졌다. 게다가 박사를 부르거나 눈 맞춤을 하지 않은 채로 말을 시작했기 때문에, 박사는 자기더러 하는 말인 줄 모르고 집게판에 두껍게 쌓여 있는 차트를 읽고 있었다. 그녀는 머쓱해져서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다행히 아무도 듣고 있지 않았다.
그때 반대편에서 어떤 사람이 절박한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고, 직원 한 명이 서둘러 카트를 끌고 나와 박사의 지시에 따라 믹스 커피 한 봉을 내밀었다. 주저앉은 사람은 곧바로 커피를 입에 털어 넣고, 얼굴을 찡그리더니 물을 찾았다. 수영은 보고 있다가 커피를 건넨 직원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저도 지금 힘든데 혹시 뭐 주실 게 있나요?"
"지금은 좀 기다리셔야 되세요."
직원은 짧게 잘라 말했다. 그녀가 카트 근처를 서성거리고 있는 사이 박사도 사라졌다. 직원은 그제야 전화 통화를 하고 카트 맨 아래에 있는 서랍에서 비닐에 싸인 책을 한 권 꺼내주었다. 그녀가 받아서 살펴보니 <책 중독>이라는 책이었다. 그리 두껍지 않은 책이었지만, 그녀는 기대치 않은 선물을 소중히 받아 들고 방으로 향했다.
- 3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