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영이 자다 깨보니 작은 방 문 테두리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아마도 수영이 컴퓨터를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불안한 마음이 그를 작은 방으로 이끌었다. 그가 모니터를 비추려 설치했던 가느다란 조명이 켜져 있는 것은 맞았다. 다만 키보드 자리에 대신 책이 놓여 있고 컴퓨터 전원은 꺼져 있었다. 그만 자라는 말이 들리지 않는지 수영은 움직이지 않았다. 이럴 때 '일부러 그러는 거냐'로 시작해서 싸우던 시절도 있었지만 이제 그녀가 정말로 듣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공기의 저항을 느끼며 작은 방 문을 닫고 침대로 돌아갔다. 수영의 책 문제가 다시 시작된 것인가 싶어 가슴이 두근거렸고, 얕게 잠들었다 깨기를 반복하면서 그녀의 빈자리를 확인했다.
다음날 그는 빈자리 옆에서 일어나서 평소처럼 하루를 시작했다. 커튼을 젖히고 이불을 펴서 침대에 반듯하게 덮어 놓았다. 요거트에 재워놓은 오트밀을 꺼내고, 토마토와 치즈를 잘라 접시에 올렸다. 전동 그라인더로 원두를 간다고 드르륵 큰 소리를 내고 원두 가루 위로 끓인 물을 따랐다. 두 잔을 내려서 커피 향이 집안에 퍼질 때까지도 수영이 나오지 않자 그는 작은 방 문을 두드렸다.
수영은 책을 들고 나와서 식탁에 앉더니, 왼편의 책을 보면서 오른편의 오트밀을 퍼 먹었다. 그 모습을 보고서 진영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지만, 도중에 뭔가 탁 걸린 것처럼 답답했다. 그는 작은 방에 들어가 책상에 쌓여있는 새책들을 발견하고 숨길 곳을 찾았다. 책장의 책은 어찌할 도리가 없어도, 읽지 않은 책을 감추는 것만으로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다. 그는 하부장에 책을 집어넣기로 결정하고 열쇠로 잠가 두었다.
그리고 출근했다 돌아와 보니 수영이 여전히 식탁에서 고개를 빼들고 책을 읽고 있었다. 숨겨둔 책을 찾은 것 같지는 않았지만, 아직도 책을 파는 동네 서점이 인근에 남아 있으므로 쉽게 새책을 구했을 것이다. 그는 수영의 방전된 스마트폰부터 찾아서 충전기에 연결했다. 오트밀이 달라붙은 그릇을 물에 담가놓고 거의 아무 맛도 나지 않는 커피를 들이켰다. 침실에 방치돼 있는 이동형 TV를 주방으로 옮겨서 식사할 준비를 했다. 남긴 토마토를 넣은 파스타를 함께 먹으면서 또다시 그녀에게 실망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왜 평범하게, 다들 하듯이, 스마트폰이나 TV를 보면서 식사를 하지 않는 것일까.'
그는 책을 끊기 위해 치료를 받지 않으면 더 이상 그들이 함께 할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진영은 시청 근처에서 중독만 전문적으로 치료한다는 박사를 찾아냈다. 그가 두 차례 예약을 목전에 두고 취소했던 이유는 꼭 그맘때 수영이 독서를 줄인 모습을 보여주어서 마음이 약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1월 노벨 문학상 시즌에 그녀는 매일 같이 독서에 빠져들었고, 그 사이 다가온 세 번째 예약일은 수영도 더 이상 피할 수가 없었다. 나갈 준비를 하면서 진영은 가방에 슬쩍 필기도구와 세면도구를 챙겨 넣었지만, 수영은 박사에게 이만하면 괜찮다는 말을 듣고 돌아오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시청 앞의 대형서점에서 책을 한 아름 사서 돌아오는 것을 상상하니 외출이 그렇게 괴롭지 않았다. 보통 외출에 걸리는 시간을 결정하는 것이 수영이었기 때문에, 둘은 약속 시간에 늦지 않게 도착했다.
박사는 50대쯤 되어 보이는 남자였다. 체크무늬 니트 스웨터가 따뜻한 상담자 이미지에 어울리는 데 비해, 박사의 눈 밑이 퀭하고 머리숱이 적어 피곤해 보였다. 수영은 그렇게 보이지 않으려고 아침에 파운데이션 쿠션을 두드려 바르고 헤어롤을 말았었다.
"요즘은 책을 읽는 분들이 거의 없는데 책을 읽으시는군요? 언제부터 책을 읽었나요?"
그녀는 박사가 자신을 마치 미개한 사람을 바라보듯 한다고 느꼈다.
"제가 글을 좀 빨리 떼어서 만 세 살 때부터 책을 혼자 봤대요. 그때부터 시작이 된 것 같아요."
"저런, 그때는 세계를 온전히 오감을 통해 경험해야 할 때인데 일찍 문자 교육을 받다니 안타깝군요. 더 늦게 읽기 시작했더라면 학업 성취가 더 훌륭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나저나, 어떤 이유로 책을 많이 읽나요?"
"직업병인가 해요. 제가 글 쓰는 일을 하고 있어서, 글을 많이 읽을 필요가 있어요."
"그럴까요? 글을 잘 쓰려면 영상을 시청하면서 기본기를 쌓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지요. 웹툰이나 유튜브에 트렌드에 민감하고 창의적인 작품들이 많으니 그걸 빨리 받아들여 글로 쓰는 게 중요하지 않습니까?"
"저는 반대로 제가 오리지널리티 있는 글을 써서 웹툰이나 유튜브로 만들어지는 게 꿈인 걸요."
수영의 말에 박사와 진영이 서로 눈짓을 했지만 그녀는 알아채지 못했다.
"그렇더라도 게임 개발자가 게임 중독에 걸리는 게 도움 될 리가 없는 것처럼, 지나친 독서는 글쓰기에 방해가 돼 보입니다. 독서하는 문제 때문에 남편과 갈등을 겪지 않으셨나요?"
"당연히 싫어하지요. 남편은 그만 좀 읽으라고 하고, 몰래 읽다가 걸리면 다투게 돼요."
진영이 끼어들어 말했다.
“아내는 매일 책을 읽으려고 해요. 일주일에 한 번 정도면 제가 이러지 않았을 거예요. 지금은 제가 가사를 도맡아 하고 있습니다만, 저희가 자녀 계획이 있는데, 아이를 어떻게 같이 키워야 할지 암담해요. 아참, 그리고 책을 무리하게 읽길래 숨겨 놨더니 이 사람이 저한테 불같이 화를 낸 적도 있어요.”
“아니, 선생님, 하지만 그 책이 히가시노 게이고 소설이었다고요. 추리 소설을 읽고 있는데 책을 숨기면 버럭 하는 게 당연하지 않아요?”
"중독자 분들은 곧잘 다들 그렇지 않냐고 반문하시지만, 건강한 사람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중독이 심해지면서 금단 증상까지 나타났군요."
박사의 중재에 진영은 다시 입을 다물고 그들의 대화를 들었다.
"남편과 사이가 안 좋아졌고, 그 외에 다른 대인관계는 어떻습니까?"
"뭐...... 시간이 없어서 친구들을 많이 안 만나는 편입니다. 아, 독서모임 친구들을 매달 만나고 있네요. 줌을 통해서이기는 하지만."
"독서모임이라니,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니까 대신 책을 읽는 은둔형 외톨이들 모임 말입니까?"
"은둔형 외톨이...... 그 말 자체는 맞는 말 같기도 한데, 히키코모리 말씀하시는 거라면 아닙니다."
수영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항의를 표현하고자 해도 박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일에서도 대인관계에서도 습관성 과독으로 손해를 보고 있네요. 독서가 사회성 발달을 저해할 수도 있다는 것을 잘 모르는 분들이 많아요. 문자를 읽는 데만 숙달되면, 다른 사람의 표정과 같은 비언어적인 신호를 읽는데 미숙해지기 마련이지요. 그렇게 사회성이 미발달된 사람들이 자꾸 사람 대신 책을 찾게 돼서 악순환이 생깁니다. 사회적인 상황이야말로 가장 자극이 풍부하고, 우리 뇌에서 신속한 정보처리를 일으키며, 신경세포를 자라나게 만드는 건데요! 책은 사회적인 상호작용이 줄어들게 함으로써 오히려 인지 기능에 악영향을 미치는 면이 있어요. 독서가 치매 예방에 좋다는 기존 연구에는 이런 맹점이 있는 거지요."
"그래서였을까요? 왕따 경험 같은 건 한 번도 없지만 대인관계가 어렵거든요. 왜 상대가 화를 내는지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좀 있어요."
그녀는 슬픈 느낌을 받고 자신이 어쩌다가 책에 의지하게 되었는지 털어놓고 싶어졌다. 다른 사람들의 말과 표정은 모호하고 복잡하여 속내를 짐작하기 어려운 반면, 책의 내용은 명확하고 찬찬히 읽어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책을 마주하면 불안이 가시고 차분한 기분 상태가 되었다. 그녀는 책 속의 인물이나 작가와 간접적인 대인관계를 맺는 편이 위험하지 않게 느껴지고 편안했다. 하지만 박사는 그런 그녀의 마음 상태를 알아채지 못했는지, 다른 주제로 넘어가서 치료의 필요성을 설명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두 분 자녀 계획이 있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치료를 받지 않으면 임신하고 태교에서부터 문제가 생기기 쉽습니다. 많이 걷고 운동을 해야 하는데 임신한 상태에서 가만히 앉아서 책을 읽어대니 태아에게 해로울 수밖에 없지요. 아이를 양육하면서 문제는 더 커집니다. 부모가 책 중독이 있으면 자꾸 재미없는 도서관이나 박물관에 애들을 데리고 가요. 책 중독은 근본적으로는 문자에 중독이 되는 게 가장 크거든요. 키즈 카페, 워터파크, 눈썰매장, 뮤지컬 공연 같이 아이들을 진정 기쁘게 해줄 만한 곳을 피하고, 문자가 많이 씌어 있는 곳에 가고 싶어 합니다. 심지어 자기 전에도 만화 영화를 틀어주지 않고 본인이 읽고 싶은 욕심에 책을 읽어주지요. 결국 이렇게 이기적인 행동 때문에 아이와 애착 관계에 문제가 생기고 말아요. 서둘러 치료를 받으셔야 합니다."
"혹시, 개인적으로 부모에게 쌓인 울분이라도 있으신 건 아닌가요?"
"아, 여기가 저희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자리는 아니어서요."
"혹시 부모님 중에 책 중독인 분이 계셨어요?"
박사가 넌지시 싫은 내색을 했음에도 수영이 질문을 더 하자, 진영이 고개를 저으며 만류했다.
"다른 이야기를 해보지요. 수영 씨의 신체 건강 면에서도 염려되는 부작용이 많아요. 독서를 즐겨하는 분들은 근육량이 적고, 목 디스크와 허리 디스크가 잘 생기지요."
"앗, 맞아요, 작년에 교통사고가 나서 검사했을 때 목 디스크가 상당히 진행돼 있다고 들었어요. 책 중독의 해악에 대해 유익한 말씀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책을 줄이고, 사람을 더 만나려고 노력하겠습니다."
수영은 무심코 인정하는 말을 한 것을 후회하며 예의 바르게 그만 대화를 마치려고 했다. 하지만 박사는 진영을 쳐다보면서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이런 분들은 책 중독에 취약한 체질을 타고났기 때문에, 스스로 절제해 독서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책이 없는 공간에서 지내면서 책을 끊어야 합니다."
진영이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숙박 치료 프로그램 이야기를 하겠구나 기다리고 있는데 수영은 딴소리를 했다.
"그렇지만 소장한 책 중 절판된 것이 많아서 어디다 치웠다가 잃어버릴까 봐서요."
"걱정할 필요 없어요, 이 건물 2층부터 5층까지는 건강하게 생활할 수 있는 공간을 꾸며 놓았습니다. 이곳에 입소해서 한 달 정도 지내시면 되겠어요."
"제가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최대한 책을 정리하고 자주 상담을 오도록 할게요."
놀란 수정이 간청했지만 박사의 결정에 변함이 없었는지, 태블릿을 든 상담 실장은 1개월 숙박 패키지의 비용과 준비물 등을 안내해 주었다. 수영은 진영에게 잠시 따로 이야기를 하자면서 비용 문제를 꺼냈다.
"너무 비싸잖아. 그냥 집에서 나 혼자 하는 게 경제적이야. 아니면 그 돈이면 여행 한 달 다녀올게, 책 한 권도 안 챙겨 갈 거야."
"네 건강이 무엇보다 중요한 거니까 돈 걱정은 하지 마. 나도 그냥 상담만 받으면 될 줄 알았는데 이렇게 해야 나을 수 있다니 안타까워."
진영은 특유의 사회성을 발휘해서 수영이 듣기 좋은 쪽으로 사실과 다르게 이야기했다. 그녀는 그 말에 불만이 다소 누그러졌고, 그동안 가사를 떠맡긴 데 대해 남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박사의 권고가 자신에게 맞을 것인지 의문이 들었으나 한 번쯤 시도해 볼 가치는 있어 보였다.
"그럼 돌아갈 때까지 내 책 건드리지 않겠다고 약속해 줘. 내가 나중에 정리할 거니까."
진영은 그녀가 생각보다 빨리 받아들이는 것을 보고 더 일찍 데려오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 2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