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나에게 뭔가를 했다…?
영어 한 마디의 오해

by 재미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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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는 내게 늘 미지의 섬이었다.
발음, 억양, 문법의 파도를 헤쳐 나가는 것도 모험인데,가끔은 한 마디 말이 예상치 못한 폭풍을 몰고 오기도 했다.미국 유학 시절, 내 순진한 자신감이 만들어낸 가장 기억에 남는 해프닝의 키워드는 바로 이것이다.

“He did something to me.”

그날 저녁, 나는 외출 준비로 분주했다. 거울 앞에 서서 머리를 만지고 있는데, 룸메이트가 툭 하고 물었다.

“오늘 어디 가?”
“아, XX 만나러! 같이 저녁 먹기로 했어.”

XX는 같은 조별 과제를 하며 나를 많이 도와준 친구였다.영어가 서툴던 나는 리서치 페이퍼 하나 찾는 데도 애를 먹었고,그 친구는 내게 정말 큰 도움이 됐다. 고마운 마음에 저녁을 한번 사기로 했고, 오늘이 바로 그날이었다.룸메이트가 다시 물었다.

“왜? 무슨 날이야?”
나는 별생각 없이, 한국식 정서를 담아 대답했다.

“Because he did something to me.”
(내가 신세를 졌어… 적어도 내 입장에서는.)

내 머릿속엔 단순했다.
“그 친구가 나한테 뭔가 해줬다, 그래서 고마운 마음에 밥을 산다.”
그런 의미였다. 하지만 방 안에는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다음 순간, 룸메이트의 표정이 급격히 변했다.
심각해진 눈빛, 굳은 입매, 그리고…

그녀는 갑자기 내 손을 덥석 잡았다.

“Wait… What? Are you okay? What did he do to you?”

그 목소리는 진심이었다. 눈가가 살짝 촉촉해진 것 같기도 했고, 표정엔 걱정이 가득했다.

나는 순간 얼어붙었다.
‘잠깐… 내가 뭐라고 한 거지?’

그제야 퍼즐이 맞춰졌다. 내가 던진 그 한마디,
**“He did something to me”**는
한국어로 말하자면 “그가 나를 건드렸다”는 식의, 상당히 심각한 상황에서나 쓰이는 표현이었던 것이다. 도움을 받았다는 뜻으로 쓴 말이,상처를 입었다는 말로 들린 거다.

“아니야, 아니야! 그냥 과제 도와준 거야!”
나는 당황해서 진땀을 흘리며 설명했다.룸메이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더니,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하… 진짜 놀랐잖아. 그런 말은 그렇게 쓰는 거 아니야!”

그제야 나도 웃음이 났지만, 얼굴은 화끈거렸다. 영어에 존댓말이 없다고 철석같이 믿었던 나였지만, 또 한 번, 뉘앙스라는 깊은 바다에 빠져 허우적댄 셈이었다. 그날 나는 뼈저리게 배웠다. 의도가 아무리 순수해도, 표현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 그 후로는 누군가에게 고마움을 전할 땐 한 번 더 생각하게 됐다.

“He helped me out a lot.”
“I owe him dinner.”
이런 말들이 훨씬 안전하다는 걸.
“He did something to me”는… 정말, 다시는 쓰지 않기로 했다. ��‍♀️

지금 돌이켜보면, 그날의 해프닝은 어쩌면 가장 따뜻한 오해였다. 내 말 한마디에 진심으로 걱정해주던 룸메이트의 손길과 눈빛. 그 모든 순간을 통해 나는 배웠다. 언어는 단순한 단어의 조합이 아니라, 감정과 문화의 총합이라는 걸.요즘도 누군가 내게 친절을 베풀면, 나는 조용히 생각한다.

“He helped me out.”
그리고 속으로 살짝 웃는다.
“…not in that way, though.”

그 커다란 오해와 작은 웃음은 내 유학 시절의 소중한 항해 기록으로 남아 있다.


그나저나,그때 내 손을 꼭 잡고 울먹이던 Kate는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아마도 그 빨간 머리 남자친구와 결혼했겠지. (아니면 말고) 지금쯤은 그녀를 꼭 닮은 아이들의 엄마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 따뜻하고 다정했던 오해가, 오늘따라 유난히 그리워진다.

화, 목,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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