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살게 한 허벅지 1

당신의 첫 지퍼를 달아드려요

by 솜숨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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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밀했던 생의 한가운데를 주-욱 찢어 비집고 들어간다.

언제부턴가 나는 상처로 벌어진 틈새에 어떤 식으로든 지퍼를 달기 시작했다.




우리 할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로부터 집안 대대로 내려져온 유언이 하나 있다. 그리고 기이하게도 할머니는 나의 어머니가 아닌 내게 그 유언을 전했다.


"경계로 가거라. 그 경계에 가면 해답이 있으리."


죽음을 바로 앞둔 할머니의 목소리는 푸르른 빛으로 빗질을 한 듯이 한없이 신비롭고 촘촘했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할머니가 아닌 어느 낯선 여인의 섬세한 소리였다.


유언을 받은 내 위의 5명의 어머니들은 유언을 지키기 위해 하나같이 여행을 떠났다. 아니, 영원히 집을 떠났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합할지도 모르겠다. 돌아오지 않았으니까.

어느 날 갑자기 편지 한 장 달랑 남겨놓고 떠나간 어머니들. 몇 백 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비슷한 유전자로 비슷비슷한 얼굴과 몸매로 아무도 알지 못하는 공간으로 사라져간 5명의 여인들. 돌아오지 않았던 여인들과 집안에 남겨진 가족들은 그게 그저 업보인 것 마냥 남은 생을 보냈더랬다. 딸에서 딸로 이어내려오던 그 유언이 이번에는 희한하게도 아들인 나에게 전해졌다는 점은 매우 특이한 사항이었다.


약 400년의 세월동안 5명의 어머니들이 떠나가 돌아오지 않은 곳. 그녀들의 그 은밀한 장소. 어머니의 땅. 유언을 들은 후 나는 줄곧 그곳에 가게 될 것이다, 라는 알지 못할 예감에 몇날며칠을 시름시름 앓았다. 잠이 슬몃 들 때마다 낯선 여인의 섬세한 목소리가 내 맨몸을 더듬었고, 소스라치게 놀라 깨어보면 식은땀이 가득했다.


며칠 뒤 애인이 실종됐다. 나의 애인은 함께 몸을 섞곤 하던 우리의 낡은 집안, 편지 한 장을 남기고 사라졌다.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사랑은 아닌 것 같다는 죄책감이 언제부턴가 그녀의 새벽을 뒤덮곤 했다고. 권태의 시작. 두렵지는 않았냐고 그녀의 삐뚤빼뚤한 글씨가 나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두려움을 느끼는 순간 권태는 시작되었었지. 그녀와 나의 낡은 사랑이 계속해서 부스러기를 떨어뜨리기 시작했고 그때마다 우리는 허둥지둥 대곤했다. 벌어지는 빈틈이 두려워 더 이상은 닿을 수 없을 정도로 가까이, 조금만 더 가까이 하기 위해 서로를 안았다. 그때의 우리는 '조금만 더 가까이'를 버릇처럼 외쳤던 것 같다. 아마도 그게 점점 벌어지고 있는 삶 속의 작은 균열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확실히 애인의 실종은 나를 길 잃게 했다.


그곳에 가게 될 것이었다.

기차역에 이르렀고, 대합실에는 오로지 고양이 한 마리뿐이 난로 앞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주머니 속에서 기차표를 꺼내 물끄러미 들여다본다. 기차표에 적힌 출발지와 도착지는 그 과정이 과감하게 생략되어 있었다. 펜을 꺼내 낙서를 하기 시작함과 동시에 잠에서 깬 고양이가 야옹 하고 늘어지게 울더니 밖으로 잽싸게 뛰쳐나간다.


기차는 산허리를 따라 긴 곡선을 이루며 달리기 시작했다. 기차는 중심 속에 있었다. 계절의 한가운데를 달리고 있는 줄도 모르고 우리는 계속해서 달리기만 했다. 늘 중심 속에 서 있던 우리는 모르는 게 많아서 두려웠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기차가 목적지에 도착하기 직전, 나의 경계는 무너지고 있었다.


중심의 끝.

나는 실종된 애인을 생각하고 나의 죽은 할머니를 생각하고 사라진 나의 어머니들을 떠올린다. 기차는 중심과 중심을 가르며 떠나가고 있었고 나는 끝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 끝에는 실종된 애인과 나의 죽은 할머니와 사라진 나의 어머니들이 있을 것이었다.


여인들의 땅.

그곳에 이르면 나는 왠지 그녀들이 내뿜는 향에 혼곤해져 정신을 잃을 것 같다고 어렴풋하게 생각했다.


저 멀리서 물줄기가 흘러가는 소리 들려온다. 나는 눈이 아닌 소리에 의지해 걸어 나갔다. 보이는 것보다 들리는 것이 진실이라는, 본능 같은 것이 몸 속 깊은 곳에서 일었다. 고요한 일렁임. 희미한 물줄기가 이내 곧 귓가에 거대한 소리로 일렁이며 다가오기 시작했다.


눈을 떠보니,

바로 앞에 펼쳐진 거대한 강. 그 누구도 끊지 못할 힘줄 같은 물줄기들이 거칠게 흐르며 이 땅과 저 땅을 가르고 있었다. 나는 털썩 주저앉았다. 강 위를 힘차게 그리고 부드럽게 혹은 거칠게 흐르는 물줄기는, 나에게 이르기 위한 여인들의 근육과도 같았다. 계속해서 걷고 걸었던 그녀들의 다리 아니, 그 허벅지의 튼튼한 근육들이 강 위에서 건강하게 흘러넘치고 있었다. 아무도 쉽게 건드리지 못할 것만 같은 물줄기들이 강 위에서 한데 몸을 섞는다.


그녀들의 은밀한 땅, 척박할 줄로만 알았던 그 땅은 기름져 윤이 났다. 너무 눈이 부셔 눈을 질끈 감는다. 세계가 일렁이는 소리만이 들려온다. 경계에 가면 해답이 있으리라 했던 낯선 여인의 섬세한 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경계에는 중심이 있다. 그곳에서 나는 한없이 무너져 내렸다. 그녀들이 나를 떠나 간 경계에는 나에게 이르기 위한 중심이 있었다. 떠나간 어머니들도 죽은 할머니도 그리고 사랑했던 나의 애인도. 일렁인다. 질끈 감았던 눈을 뜨니, 거대한 강과 시린 겨울 하늘이 한데 섞여 넘실거린다. 그들을 갈라놓은 수평선이 일렁이며 하나의 빛으로 뒤섞였다. 나는 발밑에 있던 자갈 하나를 들어 물수제비 하나를 뜬다. 자갈 하나가 만들어 낸 경계는 이내 곧 사라졌다.




언제부턴가 나는 벌어진 틈새에 어떤 식으로든 지퍼를 달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이들의 비밀스런 경계엔 오로지 중심만이 외롭게 서 있었고, 중심을 잊고 경계로 향하는 당신에게 첫 지퍼를 달아주기 시작했다. 지퍼를 열면 출발지와 도착지 사이에 낙서된 기차표가 들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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