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고 기어코 봄이 왔네요
지 생일날, 아들은 가재낚시를 하고 있다. 좋아하는 곤충채집가 유튜버 ‘에그박사’가 된 듯 신이 났다. 우리 집 유전자임을 증명하는 저 못 말리는 목청이 조용한 단양의 산속 마을 아침을 깨우고 있다. 호스트 아저씨가 마음껏 떠들어도 된다고는 하셨으나 아파트 속 구겨 살던 습성이 그리 쉽사리 펴지랴. 애가 우당탕탕 뛰고 으하하하 웃을 때마다 나는 자동으로 어깨가 올라가고 협박용 인상을 쓰게 된다.
아침에 눈을 뜨니 아들이 개구리 2마리와 통발에 걸린 삼색볼펜만 한 두께의 민물고기를 들이민다. 겨울잠에서 이제 막 깼는데 재수 없게 잡힌 개구리는 아직 비몽사몽인지 현관문에서 방을 향해 점프한 후 어리둥절했다. 어이 도망갈라믄 그 방향이 아녀.
생일을 핑계로 했지만 내심 이 여행의 숨은 목적은 격리였다. 속 시끄런 온갖 자극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내 몸과 정신이 조용한 쉼을 엄청나게 원했다. 그러나 애초에 탱탱볼 같은 10살 아들의 생기로움이란 고요함과 친구 할 수 없는 것. 끊임없이 웃고 말하고 뛰고 감격하고 아주 귀가 아플 지경이다. 이가 흔들려서 아프다고 짜증, 차에서는 멀미가 난다, 휴게소에서는 그림을 그린다, 휴게소를 막 떠났는데 쉬 마렵다, 식당에서는 배고프다, 된장국이 뜨겁다 맵다, 찬물을 들이키다 밥풀을 흘리고 오래된 장식 인형들이 무섭다, 아직 어린 몸의 온당한 표현인데도 짜증이 났다. 넌 왜 이리 난리법석인 거냐고 감정을 담아 내뱉고 말았다.
엄마는 또 화를 내... 아이의 눈이 깊어지고 물기가 핑 도는데 달래줄 기운도 없다. 만물에 봄이 밀려드는데 내 몸뚱이는 아직 겨울이다. 미안한데도 속으로 그 탓만 했다.
숙소로 예약한 집은 기대와는 달랐다. 1,2 층을 다 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작은 2층만 사용할 수 있었다. 다시 보니 1층을 관리동(?)을 제외하고 맘껏 쓰라는 말이었다. 건물의 1층이 모두 관리동이었다는 게 함정이었고. 남편은 장모 앞이라 나만 알도록 미세하게 삐진 얼굴로 짐을 풀었다.
그러든가 말든가 뜨끈해진 이층 방에 자빠져 잠시 눈을 감았다. 그랬는데 눈을 뜨니 벌써 푸르스름한 해거름 녘이었다. 그 새 아들은 고양이와 친해지고 도롱뇽을 2마리 잡았다. 남편은 혼자서 고기를 구우며 저녁밥상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동안 주인아저씨 내외분은 텃밭에서 뽑은 고구마를 통째 노릇하게 구워주셨다. 된장찌개, 딸기와 알밤채를 넣은 양배추 샐러드, 고소한 배추 전까지 주셨다. 푸짐한 밥상 앞에서 괜히 손해 본 기분은 사라지고 외려 쏠쏠한 이득을 본 기분이 됐다.
다음날, 가재를 잡을 수 있노라 호언장담하셨던 게 맘에 걸리셨는지 아저씨는 새벽부터 직접 가재낚싯대를 준비해서 계곡의 돌들을 일일이 뒤집어보며 아침나절을 놀아주셨다. 외할머니만 같이 와 서운했는데 본인 외할비보다 더 잘 놀아주는 할아버지를 만난 것이다. 골짜기에 환호성과 웃음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진다. 데리고 오길 잘했다. 뿌듯하다. 10살 아들 최고의 생일이다.
집주인아저씨가 아마추어 영혼을 갈아넣어 지으셨다는 이 집은 신기하게도 계곡 위에 돌을 괴어 수평을 맞춰 올렸다. 바깥에서 보면 동그란 눈처럼 두 개의 창문이 달려있다. 잠수함의 창문 같기도 한 그 두 눈 밑에는 수평으로 긴 창문이 있었다. 그 창문이 말하자면 이 집의 콘셉트를 잘 나타낸다. 계곡 위에 둥실 뜬 배, 그 선장이 된 기분으로 산 허리를 굽어볼 수 있게 한 거다. 이 풍경을 액자처럼 담은 창문 아래엔 긴 통나무 테이블이 붙어있고 그 옆으론 작은 책장이 있다. 마음에 드는 책은 선물로 가져가라는 메모도 붙어있다. 따끈한 바닥에 엉덩이를 지지고 있자니 하늘과 산이 닿는 데로 눈이 간다. 아직 잎이 나지 않은 나뭇가지들이 연한 하늘을 찌르듯 번져있다.
그날, 차고 무겁게 가라앉은 내 몸과 마음을 깨운 건 뭐였을까. 뜨끈한 온돌, 봄비 오는 밤의 습도였을까? 조그락조그락 계곡물소리와 빈 가지에 스며드는 빗소리였을까? 뭐였든지 그것들은 정교한 ASMR처럼 은근하고 완벽했다. 만성 불면증인 엄마도, 늦은 커피를 마셔버린 나도 사르륵 꿀같이 단잠을 잤다.
엄마! 이것 봐라~!
아침에 눈을 뜨니 아들이 자랑스레 수확물을 들이댔다. 투명 플라스틱 통 안에는 작은 발가락을 가진 도롱뇽, 1 급수에만 산다는 물고기, 가재가 들어있었다. 얘네들이 묵지근한 내 겨울잠을 기어코 깨워냈다.
아직 아무것도 없어 뵈는 흙밭에도 자세히 보면 겨울을 나 더 달콤해진 나물거리들이 숨었단다. 깨끗한 채소에 열광하는 엄마는 그 봄 것을 맘껏 캐 가라는 아저씨의 말씀에 놀이터에 온 아이처럼 쪼그려 앉아 흙을 뒤집고, 떠날 날이 다 되어서야 정신이 좀 든 나는 커피를 마시며 비로소 창 밖을 감상한다. 초록은 아직인 베이지 모노톤의 소백산. 그러나 자세히 보면 은밀하고도 소란한 봄기색이 느껴진다. 그렇게 달콤한 멍타임에 잠겨있는데 저만치 아들이 엄마 엄마를 외치며 달려온다. 흔들리던 이가 마침내 빠졌노라고.
그 귀여운 잇새로 싱그런 바람이 새어 나온다. 이제 진짜로 봄이 오나 보다. 아무도 막을 수 없는.
<게으름 부리느라, 이제 4월인데 3월의 글을 이제야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