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선 대가리를 자르는 용기가 없다
새벽 한 시, 잠이 오지 않는다. 습관처럼 쿠팡을 열고 ‘로켓프레시’를 탐색한다. 화면 속에 세일 중인 시금치 한 단, 감동란, 2개들이 파프리카를 장바구니에 담는다. 화면 속 선명한 초록과 빨강의 채소들은 완벽해 보인다. 당연히 그 사진들이 내일 아침 우리 집 현관 앞에 배달될 그 채소의 얼굴은 아니지만, 일단 나는 쿠팡이라는 회사의 검수 시스템과 일련의 신뢰관계를 구축하고 있다. 쿠팡은 비 대면으로 상품을 골라주고 포장해서 내가 자는 동안 우리 집 앞까지 배달해 준다. 만약에 마음에 들지 않으면 군말 없이 가져가 환불도 해준다. 교통비도 필요없고, 무거운 장바구니나 상인들과의 실랑이도 없다. 일체의 감정 소모 없는 쇼핑, 처음부터 끝까지 아주 쾌적한 장보기가 가능한 세상에 나는 살고 있는 것이다.
엄마는 나를 데리고 종종 ‘전통시장’에 갔다. ‘적어도 좋은 재료를 고르는 법만큼은 알아둬야 한단다.’ 심드렁하게 뒤따르는 내게 엄마는 그렇게 말하곤 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자세한 방법을 들은 적이 별로 없다. 게다가 시장에만 가면 엄마는 내가 바짝 따라붙지 않으면 어디 홀린 사람처럼 어딘가로 사라지기 일쑤였다. 내가 그동안 미아가 안된 것이 신기할 정도다.
요리나 식재료에 대한 관심이 없던 때라, 빨간색 고무 대야나 플라스틱 채반에 올려둔 푸성귀, 양파니 감자 따위는 내 눈엔 그게 그거였다. 딱히 최상급의 감자 따위를 고르겠다는 의지가 없으므로 어슬렁거리며 호떡이나 깨강정, 떡볶이를 파는 곳이 어딘지가 더 관심사였다. 나는 ‘먹고살기 위한 것들’ 보다는 ‘먹고 산다는 게 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시장의 풍경이 더 재미있었다.
아니, 사실은 시장가는 게 썩 좋지는 않았다. 좌판을 늘어놓은 할머니들이 왠지 불쌍해 보였다. 새댁, 아가씨, 애기엄마, (절대 아줌마, 할머니라고 부르지 않는) 오늘 물건 좋아요.라고 끈질기게 혹은 소심하게 호객하는 상인들을 지나치는 게 미안했다. 특히 늦은 끼니를 때우는 모습, 알루미늄 쟁반에 놓인 밥 한 숟갈, 총각김치를 베어 먹다가 얼른 수저를 놓고 콩나물을 팔아야 하는 아주머니들을 보는 게 불편했다. 마음 편히 밥을 먹는 것보다, 길바닥에 앉아서 자기 밥그릇 속울 보여주는 것보다 물건을 하나라도 더 파는 게 더 중한 경우가 당연히 있다는 걸 알게 되는 게 즐겁지 않았다.
엄마는 평소 우울하다가도 시장에만 가면 즐거워 보였다. 틀림없이 재밌어하는 뒷모습이 내 눈엔 보였다. 엄마의 ‘좋은 재료를 고르는 법’에 대해서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래도 확실한 건 엄마가 반드시 가장 초라한 상인에게서 채소를 산다는 것이었다. 시장에도 목 좋은 데가 있기 마련인데 꼭 변변한 좌판도 없이 그냥 보자기 위에 못생긴 채소들을 담아 놓은 할머니 앞에서 엄마는 걸음을 멈추었다. 때깔 좋은 호박이나 배추들은 지나치고 꼭 벌레 먹고 울퉁불퉁하게 생긴 채소를 고르는 것이다. “이건 우리 식구 먹으려고 딴 건데”라는 아주머니의 중얼거림은 지갑을 여는 강력한 주문이었다. 보자기에 담긴 야채를 모조리 살 때도 있다. 그럴 때면 엄마는 마치 큰 비밀처럼 내게 귓속말로, ‘이런 거야말로 약 없이 기른 것이라 믿을 수 있단다’고 했다.
몇 바퀴씩 청과 골목을 도는 것은 그래도 낫다. 수산물 시장에 비하면! 입구부터 코를 찌르는 짠 비린내, 질척 질척한 바닥, 형광등 아래 펄떡대는 아직 살아있거나 막 죽은 생선들이 가지런히 놓여있는 걸 보는 게 나는 늘 끔찍했다. 얼음 위에 놓인 생선은 다 같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얼어붙어 있다. 커다란 나무 둥치를 잘라 만든 도마에 생선이 턱 올라가는 순간 순식간에 고무장갑을 낀 손이 ‘쾅, 쾅’ 도끼나 칼로 토막 낸다. 그 앞에 수북이 쌓인 생선대가리들, 원망하듯 여전히 번뜩이는 눈들과 마주치는 게 싫었다.
그나마 덜 젖은 바닥을 골라 밟으며 진저리 치는 나와는 달리 엄마의 눈빛은 마치 보물 사냥에 나선 탐험가처럼 반짝였다. 그것은 늘 나에게 기이한 느낌이었는데, 엄마야말로 고등어, 삼치, 꽁치, 가자미, 병어, 갈치 등의 물고기들을 싫어해야 마땅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평생 육고기를 입에도 대지 않는 아빠를 위해 엄마가 구운 고등어만 해도 몇 톤은 될 거라며, 그녀는 정말로 생선이 지겹노라고 입버릇처럼 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말로 싫기만 했을까?
그날도 TV에선 <인간시대>라는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이 방송되고 있었다. 인간 군상의 삶을 초 근접으로 찍어 감동적 서사로 풀어내는 휴먼다큐 미니시리즈. 주말이면 엄마는 신문지 위에 마늘이나 멸치를 수북이 쌓아놓고 다듬으며 <인간시대>를 보곤했다.
“엄마, 나는 저 프로가 싫더라.
왜 저걸 맨날 보는 거야?”
“왜 싫은데?”
“그냥... 사람들이 불쌍해서.”
“그건, 비겁한 거야.”
이해가 안 됐다. 그런 고통은 이미 우리 삶에 충분하지 않나? 세상에 우리보다 더 고생하고 더 불쌍한 사람들을 보는 게 재밌나? 내가 비겁하다니, 엄마가 무감각한 게 아니고? 나는 왠지 억울했지만 딱히 반박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나는 진짜로 비겁한 사람인가?
'난 좀 비겁한 사람일지도’라는 생각은, 그렇다고 깨끗한 수긍도 부인도 못한 채 늘 마음 한 켠에 있었다. 산다는 것의 치열함, 고통과 슬픔, 피와 땀 속에 엉긴 삶과 죽음의 원색적인 모습을 보는 게 난 늘 쉽지 않았으니까.
삶이 늘 동화 같을 리 없고 우리가 씹고 소화시키는 음식이란 것도 애초에 멸균 포장 상태일리 없는데도 애써 그 뒤에 있는 사실을 외면해 왔다. “불편하고 마음 아프고 미안하니까 못 보겠어요”라고 호소하는 딸에게 비겁자라는 냉정한 평가를 내리는 너무 정직한 엄마. 그때의 나는 그 골짜기의 간극을 건너갈 수 없었다. 마음속으로 “역시 그런가”라고 찜찜해 할 수밖에.
모든 게 덜 가공된 옛날에는 보고 싶지 않아도 보이는 것, 보아야 하는 것이 많았다. 우리는 점점 그걸 보지 않아도 되게끔 스스로의 눈을 가린다. 그런 쾌적한 세상에서 태어난 것은 축복일까 저주일까? 매끈한 포장지 속에 분홍빛 소시지, 어묵과 만두처럼 상표에 가려진 음식들, 그것들이 한때 촉촉한 눈빛의 생명이었음을 알면서도 알지 못한다. 그 생명이 어떻게 잘라지고 익히고 구워져 우리 몸속으로 들어오는지 알아도 모르고 싶다. 죽음이 생명의 먹이가 되고 생명은 죽음의 먹이가 되어 순환한다는 당연한 사실을 배우려면 일부러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일부러 시장에 가고, 애써 다큐멘터리를 봐야만 알 수 있는 세상. 그런 시대에 태어난 게 죄려나.
비겁자로서 말하자면 나는 용감한 사람들을 존경하지만, 그들도 때로 보고 싶지 않아서 고개를 돌리는 것이 있는 걸 이제 안다. 아니 애초에 고통과 희열, 피땀 어린 비열함과 역겨운 고상함이 한데 뒤엉켜있는 것이 지구 위의 삶이라는 걸, 과연 어린 인간에게 온전히 가르칠 수 있는가에 대해서도 얼마간 의문이다. 어떤 인간은 특별히 비위가 약하거나 감수성이 예민하고 비겁한 탓에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걸.
그래도 세월이 약인지 요즘의 나는 옛날보단 아주 조금쯤 용감해졌다. 흔한 고백일 수도 있는데, 애를 낳고 키우면서 달라졌다. 평소 같으면 쳐다보기도 역겨웠을 똥이나 토사물을 만지고 씻어내는데 이상하게도 그렇게 더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웃기게도 내 새끼 속에서 나온 거라고 생각하니 그랬다.
백 퍼센트의 어두움, 완벽한 밝음 같은 건 애초에 없음을 서서히 몸으로 배우면서 나는 비로소 죽음도 억지로 조금쯤 바라볼 수 있게 됐다. 옛날에 비하면 이제 수산시장도 제법 성큼 걸어 들어간다. 외할아버지를 닮았을까, 유난히 고등어구이를 좋아하는 아들 때문이다. 이제 나도 노르웨이 고등어와 제주 고등어, 생고등어와 냉동 고등어, 간고등어의 맛이 다르다는 것쯤은 배웠다.
그래도 아직 내 손으로 생선 대가리를 팍 잘라내는 것은 못 하지만, 이제 고등어를 즐겁게 굽는다. 싱싱한 고등어일수록 눈빛이 빛난다. 나는 그 분홍색 살에 거침없이 짠 소금을 뿌려 한나절을 재운다. 그것은 잔인하고도 달콤한 일, 그걸 구워주면 아주 맛나게 밥 한 공기 해치울 아들의 복숭앗빛 볼을 상상하면서 미소를 짓기까지 한다. 나는 무덤덤해진 걸까, 용감해진 걸까? 잘 모르겠다. 그러나 그렇게 죽음과 생명 사이 골짜기가 깊지 않음을 나는 매일 천천히 배워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