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직한 말 복서와 인지 부조화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정치 풍자 이야기는 무엇일까요? 아마 많은 분들이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을 떠올리실 거라 생각합니다.
현재로부터 그리 멀지도, 그렇다고 너무 가깝지도 않은 1945년에 출간된 동물농장은 우리 기억 속의 근대사와 맞물려 실제 역사 속 사건들과 비교하며 읽는 재미가 쏠쏠한 소설인데요.
인간이 운영하던 농장에 살던 동물들은 인간의 착취에 더는 참지 못하고 충동적으로 들고 일어납니다.
혁명은 얼떨결에 성공하고, 모든 동물이 평등한 농장을 만들자는 이상 아래 그들 중 가장 똑똑한 돼지들이 다른 동물들을 이끌게 됩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위대한 이상은 변질되고, 권력을 쥔 돼지들은 점차 인간처럼 타락합니다. 나머지 동물들은 오히려 혁명 이전보다 더 억압된 삶을 살게 되죠.
동물농장에 등장하는 다양한 동물들은 각기 다른 인간 군상을 상징합니다.
그중 이번 글에서는 우직한 말로 묘사되는 복서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복서는 육체적으로 강인해 여러 마리의 몫을 해내지만, 지능은 그리 높지 않은 말입니다. 동물농장 내에서는 없어선 안돼는 노동자이죠.
동물농장 체제에 대한 그의 믿음 또한 우직한데요, 그는 어렴풋이 상황이 이상하다는 것을 감지하지만 결코 체제나 리더인 돼지 '나폴레옹'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나폴레옹은 언제나 옳아"
이 말은 그의 좌우명이 되고 그는 모든 혼란을 받아들이며 스스로를 다그칩니다.
"내가 더 열심히 할 것이다!"
이렇게 충실한 노동자였던 그의 결말을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가 끝내 도착한 곳은 바로 도살장이었습니다.
가장 성실했던 복서의 마지막이 가장 비참했다는 사실은, 소설의 가장 인상 깊은 부분 중 하나입니다.
그는 왜 그렇게 동물농장을 믿고자 했을까요?
오늘은 복서의 심리 상태를 인지부조화(Cognitive Dissonance)라는 관점으로 살펴보려 합니다.
인지부조화(Cognitive Dissonance)는 자신이 믿는 가치와 눈앞의 현실이 충돌할 때, 그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생각이나 행동을 조정하려는 심리적 반응입니다.
복서의 예시를 볼까요? 그도 때때로 질문을 던집니다. 이는 그가 현실과 그에게 약속된 상황이 다르다는 불편함을 인지한 것이죠.
하지만 복서는 그 불편함을 체제나 지도자를 의심하는 방향이 아니라, 자기 신념을 더 굳게 붙드는 방식으로 해소합니다.
“내가 더 열심히 하면 괜찮아질 거야.”
그렇게 그는, 현실을 바꾸는 대신 스스로를 다그치며 믿음을 강화합니다.
이처럼 인지부조화를 잘못된 방식으로 해소하면, 여러 심리적 문제가 발생합니다.
동물농장 속에서도 그 부작용이 매우 선명하게 드러나죠.
1. 자기기만과 현실 회피
불편한 현실을 인정하지 않고 믿음을 강화하면, 현실을 정확히 바라보지 못하게 됩니다.
복서처럼 점점 더 상황이 나빠지는데도, “내가 더 열심히 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자신의 감각과 판단을 무시하게 되죠.
2. 잘못된 선택의 고착 – 매몰비용 오류
“지금까지 내가 해온 걸 부정할 수 없다”는 심리는 이미 틀렸다는 걸 알면서도 그 선택을 유지하게 만듭니다.
과거를 버리지 못해 미래까지 붙잡히는 거죠. 복서도 체제가 잘못됐다는 걸 느끼면서도 그동안 쌓아온 충성과 노력을 버리지 못하고 끝까지 그 길을 가게 됩니다.
3. 감정 억압 – 분노와 실망의 축적
불편함을 해소하는 데만 집중하면 감정을 말하지 않고 외면하게 됩니다. 분노, 실망, 상처 같은 감정이 제때 표현되지 않고 마음속에 쌓이게 되죠.
이는 언젠가 더 큰 무너짐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4. 배움과 성찰의 기회를 잃는다
인지부조화는 사실 자기 성찰과 성장으로 이어질 수 있는 출발점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복서처럼 불편함을 억누르기만 하면 자신을 돌아보고 의미를 새롭게 재구성할 기회를 놓치게 되죠.
5. 부조리에 순응하게 된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잘못된 체제나 권력을 비판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현실을 바꾸는 일은 고통스럽고 어렵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그냥 내가 더 잘하면 되겠지”라는 식의 자기비난으로 그 불편함을 눌러버리곤 합니다.
복서처럼, 체제를 의심하기보다는 스스로를 더 다그치고, 더 열심히 일하며 자기 자신을 서서히 소모하게 되는 것이죠.
게다가 현실을 비판하려면 내가 지켜온 신념을 먼저 내려놓아야 하는데, 그건 곧 내 선택이 잘못되었고 이는 나 자신이 무너지는 것과 같다 느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은 더 쉽게 순응을 택하게 됩니다.
결국, 인지부조화는 마음을 보호하려는 자연스러운 심리 반응이지만,
그 불편함을 회피하는 방식으로만 반응하다 보면 부조리에 익숙해지고, 자기 판단력과 감정마저 마비되는 결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복서는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요?
바로 그렇게 사는 것이 덜 아프기 때문이죠.
다행이 인지부조화는 누구나 겪는 감정입니다. 그걸 건강하게 해소하는 방법도 존재하고요.
1. 감정을 인정하기
“이상하다”, “속이 답답하다”, “무언가가 어긋난 것 같다.” 내가 받는 느낌은 틀린 것이 아닙니다.
불편함을 억누르기보다, 그 감정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모든 변화의 시작이 됩니다.
2. 신념과 현실을 나란히 놓고 바라보기
“내가 믿고 있는 것”과 “지금 보이는 것”이 어떻게 다른지 천천히 비교해보는 시간을 가져볼까요?
당장 신념을 버리는 것이 아닌 그 신념이 지금의 나에게 여전히 유효한지 되묻는 것입니다.
3. 멈춰 서는 용기
복서는 끝내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잠깐 의심했지만, 바로 다음 날 더 일찍 일어나 일을 했습니다.
하지만 진짜 용기는, 모순 앞에서 잠시 멈추는 것일지 모릅니다.
확신이 없을 땐, 말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저 멈추어 자신을 다시 바라보는 것으로도 충분합니다.
4. 나 혼자만의 감정이 아니라는 걸 아는 것
모든 생각을 혼자 끌어안으면, 믿음은 더 단단해지고 현실은 더 불편해집니다.
감정을 나눌 수 있는 사람, 나와 다른 시각을 가진 사람과의 대화는 무너지는 대신 더 넓어지는 길이 될 수 있습니다.
믿음을 바꾸는 일은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믿음을 더 정직하게 지켜내는 방법일 수도 있습니다.
복서는 끝까지 신념을 놓지 않았습니다.
불평등한 현실에서 고통받았지만 그는 그 불편함을 감당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더 다그쳤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 그는 자신이 지켜온 체제에 의해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버려졌죠.
인지부조화는 마음을 지키기 위한 본능이지만, 끝까지 외면하면 진실뿐 아니라 나 자신까지 잃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저 더 열심히가 아니라, 지금 이 방향이 맞는가를 묻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그 질문 하나가, 나를 지키는 첫 걸음이 될 수 있으니까요.
매주 목요일 고전 속 심리에 대해 연재하고 있습니다.
다음엔 어떤 인물의 마음을 들여다 볼까요? 여러분에게 작은 위로와 통찰을 주는 글을 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