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병원은 만성적인 인력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병원에 나 혼자 내버려 둘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우리 병원엔 병동이 달랑 하나 있었고 상주하는 당직의*도 없었다. 그런 와중에 액팅으로 조무사 하나 미드**로 달랑 넣어둔 것이 전부이니 일주일 전부터 심장이 조여왔다. 온 병원을 통틀어 의료인이 나 하나뿐이었다. 의료 면허를 딴다고 다 실력자인 것은 아니다. 이 점은 운전면허와 비슷하다. 자동차 면허를 딴 뒤에 지속적으로 연습을 해야만 베스트 드라이버가 될 수 있는 것처럼, 간호사 면허를 딴 뒤에 수많은 사례들을 겪어내야만 만능 간호사가 될 수 있다. 운전은 해야 느는 것이 맞지만, 그렇다고 초보운전자에게 당장 버스를 운행하라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럼에도 출근을 안 할 수는 없었다. 한참 부족한 나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야 나을 테니 말이다.
* 당직의사의 부재는 의료법 제41조의 위반이다. 콜 당직으로 대체할 수 없다.
** 미드는 주로 9시-5시 근무를 한다. 해당 병원의 근무인력 상, 미드가 있는 날의 이브닝 근무자는 약 5시간을 홀로 근무해야 했다. 조무사는 간호보조인력에 해당하며, 의료법상 의료인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주체적인 의료행위를 할 수 없다. 만약 20년 경력의 조무사와 신규 간호사가 근무를 한다면, 그 근무번에 대한 책임은 간호사가 진다.
감기만 걸려봐도 알겠지만, 열이 나면 상당히 고통스럽다. 아무런 약도 없이 40도까지 치솓는 열을 일주일이나 겪어야 한다면 반쯤 미쳐버릴지도 모른다. 유감스럽게도 그 반쯤 미치는 상황이 눈앞에서 펼쳐졌다. 환자는 열이 났고, 나는 약을 줄 수 없었다. 40도는 확실한 고열이고, 고열은 뇌 기능에 영향을 줄 수 있다. 항생제가 들어가고 있음에도 열이 뜬다면 무언가 확실하게 이상하지만, 희한하게도 퇴원시키지도 않고 그저 모두가 일주일째 관전하는 중이었다. 보통은 열이 나면 1차적으로 타이레놀을 쓰곤 한다. 그러나 하필이면 그날 아침 OT/PT(간수치)가 80대로 체크된 바람에 그나마 있던 약도 다 hold 되고 말았다. 전 날까지 버젓이 사용되던 타이레놀이고 파세타고 오늘부터는 쓸 수 없었다.
타이레놀이랑 부루펜이랑 교차복용 되는 것은 아시죠?
어느새 늘어난 보호자들이 불쾌한 시선으로 나를 훑었다. 그렇다고 한들 달라지는 것은 없다. 기껏 망가진 간수치가 더 아작이 나면 어떤 후폭풍이 닥칠지나는 모른다. 애초에 처방은 의사의 고유 권한이다. 내가 멋대로 판단해서 약을 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처방을 내줘야 할 양방의는 연락을 받지 않았다. 평상시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재택근무를 하던 사람이 하필이면 오늘따라 묵묵부답이었다. 개인 연락처로는 몇 번을 해도 받지 않았고, 메신저는 실시간으로 읽으면서도 답장이 없었다.
N/S 500 달고 1시간마다 recheck 해주세요.
한약엔 해열제가 없다. 그러니 한의사인 병원장이 독단적으로 판단하여 줄 수 있는 약은 없었을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환자를 대면하지도 않고 전화로만 한 마디씩 상황은 너무나도 얄미웠다. 열이 받은 보호자들이 '환자를 방치하는 것에 대해 소송을 걸겠다'라고 윽박을 질러도, 그 어디에도 증거를 남기지 않은 병원장에게는 '나는 그 정도로 보고받지 못했다'라며 빠져나갈 틈이 마련되어 있었다. 우리 병원에서는 줄 수 있는 약이 없었고, N/S만으로는 열을 내릴 수 없다. 그렇다면 감당 가능한 병원으로 보낼 수 있도록 전원의뢰서라도 작성하러 왔어야 했다.
제가 하는 말 하나도 빼먹지 않고 원장님한테 전달할 수 있어요?
환자는 잔뜩 화가 난 얼굴로 섭섭함을 이야기했다. 벌써 열 때문에 제 발로 응급실을 찾아간 것만 벌써 두 번째였다. 병원의 도움 없이 제 스스로 살길을 찾아 나서는 꼴을 보며 입원한 보람이 없다 느꼈을 터였다. 그러니 이번에는 죽든 말든 나는 병실에 있을 테니 알아서 해보라는 식이었다. 병원 관계자들이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꼴이 답답하다고 했다.
운이 좋게도, 나이트 인계를 넘길 시점부터 열이 떨어지며 어찌저찌 상황은 넘겼다. 그러나 나는 저 날 온갖 정이 다 떨어졌다. 읽지 않는 주치의, 읽어도 답장이 없는 양방의와 파트장, 점점 답장이 뜸해지는 병원장, 내 멋대로 할 수 있는 것이 단 하나도 없지만 오롯이 나만 욕받이가 되어야 하는 상황에 진절머리가 났다. 일주일이 지나고 나서야 '주치의는 퇴근하기 전 오더를 잘 내고 양방의는 전화를 잘 받자'라는 규칙 같지도 않은 규칙이 생겨났다. 이런 것조차 정립되지 않은 병원에서 대체 뭘 하겠는가. 무사히 지나갔으니 망정이지 만약 큰 응급상황이었으면 홀로 피를 볼 뻔하였다. 체계와 책임이 없는 병원에서는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다고 느꼈고, 나는 결국 퇴사를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