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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 Jun 16. 2024

노인과 커피와 바다

멋진 노인이 되겠다는 생각

지구 사람들이 날로 잘 먹고 건강해지면서 많이 듣는 말이 있다. (물론 모두가 그렇진 않지만)

"여러분 곧 평균수명 100세 시대가 옵니다!"

수명이 늘어난다. 축하일까, 재앙일까. 일단은 축하처럼 들린다. 오래 살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있을 테니까.

그런데 점점 이 축하가,


"근데 은퇴하시면 어떻게 사실 건가요?"
 죽을 때까진 진짜 진짜! 한~참 남았거든요


이렇게 들리기도 한다. 나는 이 생각을 처음 승선할 때부터 했다. 워낙에 우려와 걱정하는 게 유난이기도 한 내 성격을 가진 탓에 해양경찰이 된 지금도 정년퇴직 한 다음에는 어떻게 살지, 하고 고민한다.

내가 승선을 시작할 2017년도 정도에 YOLO(you only live once)라는 슬로건이 유행했다. 한번뿐인 인생이니까 인상 깊게 멋지게 살아야 할 테고, 사람은 생각보다 쉽게 죽지 않으니 나도 별일 없으면 100세까지 살 테고, 그러면 퇴직 이후에 어떻게 살지 당연히 준비해야겠네. 그래서 내가 내린 결론은 "예쁜 노인이 되자"


내가 태평양에서 3년을 함께했던 47년생 할아버지, 당시 75세이셨던 좋은 풍채의 기관장님이 계셨다.

젊은 선원도 몰아치는 파도 위에서, 온통 딱딱한 철판으로 된 선박 위에서 몇 개월 동안 생활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한 번 바다에 나오면 어디가 아플 때 병원에 가는 것도 무리다. 안 된다고 봐야 한다.

이런 환경에서 75세의 노인이 외항선의 기관장(Cheif Engineer)으로 승선하고 계셨던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그만한 연세에도 1억이 훌쩍 넘는 연봉을 받으시면서 바다를 즐기시던 나의 두 번째 기관장님의 일과는,


-아침 식사를 하시고 바다뷰를 보면서 갑판 한 바퀴 산책
-한국에서 온 뉴스를 보시면서 핸드드립 커피를 내려 수평선을 보면서 느긋하기
-점심식사를 준비하는 조리장을 도와 요리 (요리를 진짜 잘하셨다)
-낮잠을 주무시다가 기관실에 내려와서 스파이더 카드놀이를 켜고 게임
-목욕을 하시고 온몸에 모락모락 김을 피우시며 달빛 수평선 보면서 또 커피  

사모님도 계시고, 아들 딸도 장성하고, 카카오톡 프로필도 항상 손녀손주들로 가득한 할아버지가(기관장님이) 왜 집에서 쉬지 않으시고 바다에 나오셨을까? 하는 생각과 궁금함이 생길 때쯤,

여느 날처럼 기관장님방에 쪼르르 들어가 커피를 마시고 옛날 부산 영도 풍경이야기를 들으면서 시간을 보내는 중에 연세도 있으신데 바다에 있는 거 힘드시지 않으세요? 하고 여쭤봤다.

나는 바다 위에선 평생 현역이니까.
여전히 날 필요로 한다는 게 좋아서 오는 거야


내 질문을 들으시곤 하셨던 이 말씀이 오늘 갑자기 생각났다.


하긴,

기관장님의 하루 일과만 보면 그냥 바다랑 배에 둥실둥실 떠있는 사람 같지만 잘 보면 (머리가 하얗게 된) 대마법사 같았다. 지하 3층까지 뻗은 복잡한 기관실 안에서 어떤 문제가 생기거나 직원들이 허둥지둥하면 스파이더 카드놀이를 하다가도 쓱 가셔서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방에서 핸드드립 커피를 드시다가 아무도 못 들은 작은 소음을 들으시고선 나를 살짝 불러서 공기탱크 쪽에 문제가 있는 것 같으니 살펴보라고 툭- 쳐서 보내셨다. 갑판을 한 바퀴 산책하시고서는 파이프가 터진 곳을 찾아내셔서 직원들에게 수리법을 알려주시고는 다시 방에 들어가 낮잠을 주무시는 그런.. 음 무언가에 통달한 사람처럼 말이다.


우리 배가 바다에서 앞으로 나아가고, 정지하는 데는 기관장님이 꼭 필요했다. 배가 움직이는데 필요한 모든 시스템을 꿰뚫고 마치 의사가 진단하는 것처럼 진단을 내려주셨으니까. 그리고 밤에는 커피를 그렇게 내리시며 수평선을 보면서 낭만을 즐기시는. 한국에 돌아가면 조그만 손녀손주들이 할머니랑 아빠 손 잡고 할아버지를 기다리며 항구에 마중 나와있는 그런 힙한 기관장님이었다.


내가 예쁘게 늙는다면 그렇게 늙고 싶었다. 우선은 건강하고 돈 때문에 생길 걱정 없이 살고, 향긋한 냄새와 커피 향이 가득한 그런 방에서 좋아하는 풍경을 보고 사는 거. 그리고 내 능력이 나이가 들어도 다른 사람으로 대체되지 않아서 누군가 필요로 하는 그런 사람. 일회성이 아닌 오래가는 지긋한 전문성을 지닌 사람.


오늘 받은 질문에서 본 7. 갑자기 생각난 옛사람이 있나요?


바다 위에서 나는 평생 현역이라는 멋진 말을 하신 기관장님은 아직도 그 배에 승선하며 여전한 동료들과 태평양을 가르고 계신다. 부산에 입항할 때면 영도구에 있는 늘 가시던 원두가게에서 늘 사는 콜롬비아산 원두를 사가지고 오시던 모습이 늘 기억나는 할아버지다. 가족과 바다와 커피를 사랑하시는 기관장님. 쭉 건강하시고 늘 안전항해하시길! Bon-voyage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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