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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 May 30. 2024

닻(anchor)

우리가 멈추고 기다리는 방법 

앵커(Anchor)

이 단어, 많이 들어보셨나요? 아마 뉴스에서 많이 접해 보셨을 것 같습니다. 뉴스에선 기자와 앵커가 등장합니다. 사실만을 곧게 전달하는 기자와 달리, 뉴스 앵커는 그에 더해 자신의 소신과 관점을 곁들이고 스스로 출연하여 대중들에게 전달하는 뉴스의 꽃, 기준이 되는 사람. 그런 이들을 우리는 뉴스앵커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 앵커라는 단어는 본래 선박을 정해진 위치에 고정시키는 역할을 하는 선박의 장치를 뜻합니다. 우리말로 "닻"이라고도 합니다. 배는 망망대해를 떠돌다 목표한 곳에 다다르면 원하는 곳에 자리를 잡고 이 닻을 해저에 깊숙이 내려 박아 넣고 멈춥니다. 언제든 조류와 파도를 따라 원치 않는 곳으로 미끄러질 수 있는 바다 위에서 기준을 잡고 버틸 수 있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죠. 

배의 상징인 닻, 밧줄, 둥근 조종 타


많은 사람들이 배와 바다는 잘 몰라도 이 앵커라는 단어와 문양이 익숙할 겁니다. 실제로 앵커를 타투로 새기는 이들도 많으니까요. "드디어 어딘가에 정착했다, 할 것이다, 흔들리고 싶지 않다." 하는 의미입니다. 실제 배에 달려있는 앵커는 대형선박의 경우 약 10톤 정도 하지만, 겨우 이 무게로 10만 톤의 선박을 원하는 곳에 멈춰 세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도전과 모험을 원하면서도 언젠가는 원하는 곳에 정착하길 바라고 있을 겁니다. 그래서 앵커타투가 예로부터 사랑받는 이유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항해사가 닻줄을 내리는 결심을 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고려해야 할 항목들이 있습니다. 닻줄을 배 밑으로 일자로 쭈욱 내려와서 해저에 박히는 게 아니라 닻과 닻줄의 브레이크를 풀어 바다에 내던지고 나면, 수백 미터를 굉음을 내며 바다를 뚫고 해저에 도착해서, 이리저리 끌리다가 어느 한 지점에 파고 들어가서 고정된 다음 닻줄에 장력(tension)을 줍니다. 조금 늘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엄청난 장력을 받은 닻줄은 배를 원하는 범위 안에서만 떠다닐 수 있도록 합니다. 

멈춰있는 배들은 그냥 서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범위(anchor circle)을 고려하여 옹기종기 모여있습니다.


수심과 주변 배들과의 관계, 날씨와 위험요소, 그리고 해저의 지형은 어떤지, 선호하는 부드러운 진흙재질인지 판단한 항해사는 이윽고 원하는 위치에 배를 가져다 놓은 다음, 갑판 선원들에게 명령을 합니다. 


"Let go anchor, and Walk back!"


힘찬 명령이 선내에 퍼지고 닻을 고정한 브레이크가 풀리면 수백 미터를 내려간 닻이 해저에 닿게 됩니다. 

해저에 닿은 것만으로 처음부터 고정되진 않습니다. 첫 지점에서 조금 더 끌려가서 알맞은 곳에 고정되면 그제야 제대로 기준점이 되어 선박을 잡아줍니다. 


이렇게 닻을 내리고 배가 멈추는 과정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만큼이나 중요합니다. 원하는 곳이 있다면 기준점을 만들고 닻을 내려 박아 넣은 다음, 잠시 멈춰서 앵커써클 안에서 활동하는 것이 나아가지도 않으면서 그저 흔들어대는 파도나 조류에 휩쓸리며 돌아다니는 것보다 의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배도 그걸 원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항상 닻을 내리고 있는 배를 보며 기다림, 정착, 멈춤, 버팀을 떠올렸습니다. 원하는 바를 위해 잠시 멈추는 것은 그 자체로 재촉받고 떠밀려야 할 때가 아니라 어쩌면 가장 필요한 순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닻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배의 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얼마 전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람의 글에서 발견한 일부. 기다림에 이유와 믿음이 있어서 닻 같은 마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작년 글쓰기 수업에서 내년의 목표를 묻기에 '나는 나를 기다려주는 것'이라고 답했다. 
내가 기다리겠다고 한 이유는 나와 내가 좋아하는 것을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것을 알고 찾으려고 방황하기를 선택했다. 시간이 걸려서 나는 그걸 알게 됐고 이제야 내 마음에 심어두었다. 그걸 그냥 잘 보고 싶어서 나는 기다린다. 바라보면서 할 거 하면서 기다린다. 

작년에 좋아서 매일 한 건 식물 돌보기와 요리였다. 좋은 재료를 만나려면 그 재료의 제철을 기다려줘야 한다. 하나의 음식을 만들려면 이런 한 그릇 요리도 다 때려 넣으면 될 것 같지만 양파가 익으려면 양파의 타이밍과 온도가, 닭가슴살이 익으려면 그만의 시간과 조리법이, 합쳐지는 건 그다음이다. 

기다려야 한다. 익지 않은 걸 먹을 수 없고, 식물이 오늘 갑자기 다 자랄 수는 없다. 
여전히 나는 2024년의 나는 기다리는 사람이 되고 싶다.  

-2024년 조은 작가의 일기 中-

매일이 내가 기다려온, 이제야 도착한 미래라고 하는 작가님은 오늘도 잠시 멈춰서 좋은 날이 온다고 확신하며 굳고 단단하게 닻을 내리고 실력을 키우고 있습니다. 


우리의 소신과 믿음이 흔들릴 수 있는 환경에서 버틸 수 있도록 어느 순간 잠시 멈춰서 각자의 닻을 내리고 좋은 날을 기다리는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길 바랍니다.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

마지막으로 제가 가장 좋아하는 것을 또 하나 꺼내 보여드리려고 합니다. 스물다섯 스물하나의 희도엄마는 후배 기자이자 미래의 앵커가 될 백이진이 선배님의 꿈은 무엇이냐. 하고 물을 때 이렇게 답합니다. 


내 꿈? 내가 진행하는 뉴스가 재밌는 거, 그게 내 꿈이지. 
그 모든 것보다 내 뉴스가 보고 싶었으면 좋겠어, 하던걸 멈추고 티비를 틀었으면 좋겠어.  

 

"내가 진행하는 뉴스"라는 말이 인상 깊었던 건, 앵커라는 단어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어서였던 것 같습니다. 또 그 뉴스가 사람들의 사랑을 받게 하고 싶다는 꿈을 당당히 이야기하는 극 중 희도엄마의 솔직한 소신 그 자체로 혼란스러운 사회에서 기준점을 원하는 바다 위의 시청자들을 자기 기준의 닻으로 정착시켜 줄 수 있는 앵커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각자의 앵커가 올바른 기준점에 닿아서 고정될 수 있길 바라며 

모두 Bon-voyage!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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