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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 May 21. 2024

절반만 믿어, 그러면 돼

실전에선 허세보단 기세

인도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항해에서 배운 것 하나. 배 안에서식당에서 목소리를 크게 내는 사람이 이긴다는 것. 사람 살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공간을 제공하는 배에서 스무 명 남짓한 선원들이 모만하고 이야기가 도는 곳이 식당이다.


식사 중 귀를 열고 잘 엿듣다 보면 그 안에서 벌어지는 온갖 모함과 허세, 편 가르기를 실시간 생중계로 들을 수 있다. 오랫동안 배를 타온 선원들의 경력과 썰은 서로 누가 누가 더 특별한 경험을 했는지, 어떤 대단한 일을 겪었는지 허풍과 허세로 번지기 십상이었고 그 경험들로 누군가 훈계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자기 서열을 높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변모했다. 식당에서 선장이 보는 누군가의 큰 목소리들은 그 자체로 근무평정이 되고, 동료들에 대한 인사평가로 발전했다. 


일등항해사가 3등 항해사를 굳이 사람많은 식당에서 또 굳이 큰 소리로 혼낼 수 있다면, 그리고 또 기죽어있는 3항사의 모습이 적절하게 연출된다면 그걸 듣는 선장은 능력 있고 똑똑한 일항사로 대우해 주게 된다. 이것도 일종의 허세고 퍼포먼스고.

한번은 나이 많은 조리장이 식재료가 자꾸 사라진다며 은근히 미얀마 선원들 탓을 해대며 식당에서 열을 올리는 바람에 조리시간 외에는 창고에 자물쇠가 채워졌고, 또 선장은 우리 조리장이 재료관리를 참 잘한다며 평가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어쩌면 그냥 이슬람교도가 아니라서 돼지고기 요리를 요구하는 미얀마 선원들이 얄미웠던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여기서 느그 서장을 찾는 건 허세일까, 기세일까


하여튼 식당에서 누가 돈을 얼마나 모았고, 투자에 성공했고, 운동을 하던 시절에 어떤 성적을 거두었고, 세계 곳곳의 자기를 기다리는 애인이 얼마나 많은지에 대한(허풍)을 듣다 보면 재밌고 웃기기도 했지만 그 특유의 으스대고 남들이 못해본 경험에 우쭐하는 이야기를 듣다 보면 나도 모르게 괜히 듣기에 피로하기도 했다.

바다위에서 하는 허세나 허풍은 검증할 길도 없고, 할 시간도 없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말라카해협을 지날 때쯤, 일기사님이 해주었던 말이 기억난다.


딱 절반만 믿어, 그러면 돼


허풍, 허세 다 들어주면 비교가 끝이 없다며 뱃사람들 말은 절반만 믿으라고.

그래 아무래도 그렇지.
-20억을 모았다고 자랑하면 한 10억 모으셨겠구나 하면 되고, 오? 근데 그래도 많이 모으셨네-
-왕년에 사업을 해서 잘 나갔다고 자랑하면 근데 왜 다시 배타러 오셨을까? 그래도, 대단하시네-
-3기사 실수로 보일러를 다 태워 먹었는데 10시간 만에 자기가 수습했다고 자랑하시면,
한 3-4시간 고생하셨겠네, 근데 3기사 의견도 들어보자
-다음 기항지에 자기를 기다리는 현지 애인이 있다고 메신저를 보여주며 자랑할 때면 그녀에게 과연 애인일까 아니면 손님인걸까.

이렇게 생각하니까 관계에서 우위를 점하려는 의도가 보이는 언어들을 하나씩 골라 잘라내가면서 그 허세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었다. 절반만 담아 듣는 태도, 배부르거나 역하지 않고 부담스럽지 않아지는 듣는 기술이 됐다.


수년간 파도를 타온 그들의 허풍과 허세는 어디서 오는 걸까. 절반만 들어줘야 하는 사정도 안타깝긴하다.

온갖 유언비어가 퍼지기 쉬운 그 좁은 공간 안에서 도태당하기 싫은 자기 방어일 수도 있고, 무언가 얻어내기 위해서 상대방에게 신뢰를 쌓아주거나 "나 이런 사람이야"를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겠지 싶었다. 아마도.

하지만 너무 강한 언어로 과시하는 모습이 오히려 이후에 일어날 수 있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닐까?


타인의 인정이 아닌 내가 원하는 바를 이루려면 나 자신을 믿어야 할 때도 있다. 그럼 그때 허세가 아니고 기세가 되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려면 근거가 있어야지. 보고서를 만들 때 관련근거를 제일 먼저 찾아 넣는 것처럼.


때론 기세가 위기로부터 나를 보호해 주는 장치가 되기도 한다.


허세와 기세는 단 한 끗 차이, "어딜 바라보냐"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최우식은 극중에서 눈 앞의 한 문제를 틀리는건 관심이 없고, 이 시험을 앞으로 치고 나가겠다는 기세만 가지라고 말한다. 실상이 없이 웅크린 상태로 현재 서있는 곳만 보고 낡은 모습만 뽐내려고 하면 허세. 원하는 걸 이루려고 내가 가진 점을 성찰해 보고 앞을 바라보면 그건 기세. 식당에서의 대화들을 상기하며 상대방이 나를 절반만 믿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도록 불편하지 않을 겸손한 기세를 갖추어야겠다고 생각하고있다.


한국까지 남은 일주일의 항해에 대비해 중간 유류 수급지인 싱가포르로 향하며 그 날도 선원으로써 적응을 한 단계 마쳐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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