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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융쏘 Nov 08. 2022

번역불가한 단어

너가 가장 좋아하는 단어는 뭐야?

    외국어 공부를 하면서 느끼는 소소한 행복 중에 하나가 그 나라 언어에만 존재하는 특이한 단어나 문구들을 찾아내는 것인데, 예를 들어 스페인어에서는 Te amo(I love you) 대신 Te quiero(I want you와 비슷하지만 약간 다른 nuance)라는 표현을 정말 좋아한다. 한국어를 예로 들자면 '정' 정도가 있겠다.  독일어에도 이런 단어들이 몇몇 있는데, 예를 들어 'Schadenfreude(다른 사람의 불행을 보고 은근한 행복을 느끼는 것)', 그리고 지겹도록 독문학 연구에서 등장하는 'Weltschmerz(이상과 다른 인간의 모습 또는 세계의 모습에서 느끼는 우울감과 고통)'등이 있다. 

    어쩌면 오지랖일수도 있겠지만, 내가 열마디라도 할 줄 아는 외국어를 모국어로 하는 친구를 만나면 꼭 자신있게 "나 그 언어 할 줄 알아!"라고 말하고 어떻게든 몇마디라도 나누려고 시도하는 편이다. 특히 내가 정말 애정을 가진 언어인 독일어면 더욱 그런 것 같다. 오늘도 어김없이 새로 만난 친구가 스위스+오스트리아 사람이라고 해서 "Ich kann Deutsch!"라고 외치고 많이 녹슨 독일어 실력이지만 오랜만에 독일어로 이야기를 나눴는데, 처음 듣는 질문을 했다. 바로, "Was ist dein Lieblingswort auf Deutsch?(너가 제일 좋아하는 독일어 단어가 뭐야?)"라는 질문이었다. 오래 고민하고 대답해야 할 질문 같지만 나는 3초도 안 걸려서 바로 대답했는데, 바로 이 단어였다.


Vorfreude

: Freude auf etwas Kommendes (Duden)


    한국어로는 "포어프로이데" 비슷하게 발음하는데 내가 정말 좋아하고 나에게 의미가 깊은 단어이다. Duden 독일어 사전에는 '다가올 무언가에 대한 기쁨'이라고 정말 간략하게 정의되어 있지만, 이보다는 훨씬 복잡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Vorfreude는 단순한 기대의 감정과는 다르다. 다가올 일 그 자체보다는 다가올 기쁜 일들을 상상하고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그리며 느끼는 행복을 의미하는 것이다. 


   Vorfreude가 주로 독일어에서 쓰일 때는 'Vorfreude auf Weihnachten'처럼 크리스마스(Weihnachten) 등의 큰 행사 이전에 이를 준비하면서 사람들이 느끼는 즐겁고 몽글몽글한 기분을 나타낼 때 쓰인다. 크리스마스 시즌을 생각하면 모두 조금씩은 들떠있지 않은가. 막상 크리스마스 날에 엄청난 일을 하지 않아도 그 날을 세면서 기다리는 감정 자체가 어쩌면 더 큰 행복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감정이 바로 Vorfreude이다. 




    이 단어는 사실 고등학교 3학년 거의 1년간 내 메신저 상태메세지였다. 다들 오글거리지만 고등학교 시절 하나씩 문구를 마음에 새기고 부적처럼 어딘가에 써놓은 기억이 있으리라고 생각하는데, 나에게는 저 단어가 딱 좋은 문구였다. "대학을 꼭 가야지, 대학에 입학한 나는 너무너무 행복할거야!!"라는 의미도 물론 있었지만, 하루하루 살아가기 가끔 버거웠던 하루 끝에 이 단어를 보면 새롭게 다가올 행복이 존재한다는 생각에 조금이라도 힘이 나곤 했다. 


   큰 기대 끝에 꼭 엄청난 결과물이 있는 것은 아니듯 (마치 크리스마스 날처럼), 입시가 끝나고 엄청난 기쁨의 감정이 휘몰아치지는 않았다. 여느 날과 같은 일상이 반복되었고, 조금은 허무하기도 했다. 하지만 고등학교 3학년 내내 마지막 결과가 나오는 순간을 기다리면서 끝은 알 수 없었지만 노력하는 내 모습, 그 과정이 힘들지만 즐거웠고, 설렜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정확한 끝은 알 수 없지만 또 하루하루를 살아가며 나에게 다가올 다음 행복을 기대하는 편이다. 


   Vorfreude를 좋아한다는 것이 꼭 지금의 현실에는 만족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나는 현재를 너무 사랑하고 최대한 즐기려고 노력하는 편이니까. 하지만 곧 금새 다가올 미래에 행복하고 아름다운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은 삶을 더 활기차고 기분 좋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큰 원동력이 아닐까. Vorfreude가 항상 행복만이 가득 차있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큰 행복을 앞둔 사람일지라도 슬픈 날, 힘든 날도 있으니까!하지만 언제나 내일은 어떤 사람을 만날지, 무엇을 새로 배울지, 어떤 새로운 냄새와 맛을 경험할 수 있을 지, 어떤 꿈을 실현할 수 있을 지. 즐거움을 기다리는 마음은 정말 소중하고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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