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의 그날이 왔다.
퇴근길 어둑어둑한 셔틀버스 안. 언제 추가했는지도 모르는 노래가 흘러나오던 중, 들리는 가사 한마디에 눈가가 뜨거워지고 참을 수 없이 눈물이 쏟아진다.
다시 내게 불어온 바람 잘 지낸단 대답이려나,
흐느끼는 내 어깨 위에 한참을 머물다 간다. 또다시 내 곁에 와줄까
그날의 기억
2016년 11월 15일 이른 새벽. 전화벨이 울리고 남편이 남동생한테 온 전화라며 건네준다.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캄캄한 새벽이다. 뭔가 모를 불안감과 함께 전화를 받았다.
"누나. 삐삐가.... 죽었어.."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였다.
분명 2주 전에 친정에 가서 건강한 삐삐를 내 눈으로 보고 왔는데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동생의 말로는 며칠 전부터 삐삐가 한쪽 눈을 잘 뜨지 못해 병원을 다니며 치료를 받았는데, 15살인 삐삐 몸에는 약이 너무 독했던 것 같다고 했다. 전화를 끊고 침대 옆 화장대 앞에 주저앉아 아이처럼 엉엉 울기 시작했다. 지금 이게 놀람인지 아픔인지, 슬픔인지 느낄 새도 없이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통곡과 같은 울음이 넘쳐 올라왔다. 깜짝 놀라 잠이 깬 남편이 나를 달래고, 거실에서는 내 소리에 놀란 보리 콩이가 어둠 속에서 멍멍 짖었다.
옷을 대충 걸쳐 입고, 차를 타고 친정으로 갔다. 문을 열어주는 가족들은 이미 눈이 퉁퉁 부어있었고, 나를 보자 엄마는 더욱 울었다. 동생이 가리키는 내방 침대 옆에 익숙한 분홍색 마약 방석, 그리고 그 위에 덮혀져 있는 담요 사이로 삐삐의 얼굴이 보였다. 조심스레 담요를 걷으니 짧은 털을 가진 우리 삐삐가 며칠 전 사준 분홍 조끼를 입고 누워있었다. 아직 따뜻했고, 부드러웠다. 삐삐 위에 엎드려 삐삐의 몸이 굳어버릴까 두려워 하염없이 쓰다듬고 볼을 비볐다.
믿을 수가 없었고, 믿고 싶지 않았다.
동생의 말에 의하면 전날 설사를 하고, 밥도 못 먹고 계속 기력이 없는데 힘들어하면서 앉지를 못했다고 했다. 저녁에 진료 다니던 병원에 데려갔더니 약이 독해서 그랬던 것 같다며 수액을 놔주고, "자고 나면 괜찮아질 거예요."라고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날 새벽 삐삐는 별이 되었다.
하염없이 삐삐를 쓰다듬어주었지만 삐삐의 몸은 천천히 굳어갔다.
우리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가까운 애견 장례식장에 연락하여 장례 시간을 잡았다.
애견 장례식장을 찾아가니 미리 보낸 삐삐의 사진을 스크린에 띄우고, 향을 피우고 국화를 꽂아놓고 추모의식을 할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었다.
지금 내 눈 앞의 삐삐는 정말 마지막이었다.
지금 삐삐를 보내고 나면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사실, 그리고 받아들이고 싶지 않지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너무 아팠다. 아니 '마음 아프다'라는 말 따위로는 내 슬픔을 백분의 일도 표현할 수 없었다.
마지막에 얼마나 괴롭고 아파하다 갔을지, 힘들어하는 자신을 어떻게 해주지 못하는 나와 가족들을 원망하지는 않았을지, 눈 감기 전에 가장 따르고 사랑했던 누나를 그리워하거나 기다리지는 않았을지.. 아니면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눈에 보이지 않게 날아다니며 애타게 우리 이름을 부르고 있는 건 아닌지.. 죄책감과 아쉬움과 안타까움, 막막함, 두려움.. 처음으로 느껴보는 수만 가지 감정이 목과 가슴을 후벼 팠다.
우리 집 막내의 15년
고등학생 때 친구네 집 개가 새끼를 낳아, 엄마에게 시험을 잘 보겠다며 졸라서 데려온 게 벌써 15년이었다. 처음 배변을 못 가리는 모습에 혼내던 엄마, 개랑 뽀뽀하면 병균 옮는다며 질색하던 아빠를 삐삐 바라기로 만들고 사랑둥이 막내아들 노릇을 톡톡히 했다.
말티즈 치고는 작지 않은 덩치였지만 뽀얗고 하얀 털에 새까만 눈과 코가 너무나도 이뻤던 얼굴. 모든 사람과 개들에게 너무 착하고 바보 같았던 내 동생. 잘 때는 우스꽝스러운 포즈와 표정으로 세상모르게 잠들고, 신나면 온 집안을 우다다 뛰어다니고, 싫어하는 발톱 깎기나 귀 청소를 할 때에는 꾹- 참다가 끝나고 나면 왕왕! 자기 괴롭혔다고 소심하게 뛰어다니며 화를 내서 온 가족을 웃겨주었다.
내가 결혼을 하고 독립한 후에는 내 빈자리를 채워주었고, 특히나 퇴직한 아빠는 어느새 삐삐의 1순위가 되어 아빠에게 유독 극진한 사랑과 애교를 퍼부었다. 그날 일 때문에 장례식에 오지 못한 아빠에게 영상 통화로 삐삐의 마지막 모습을 보여드렸고, 평생을 군인으로 살아오셨던 강인한 모습의 우리 아빠는 내 휴대폰 화면 속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닦으셨다.
그날이 지나고
삐삐가 아프기 시작한 후에 동생과 엄마는 참 많이 다퉜다.
동생은 병원에서 시키는 대로 병원에 내원해 침을 맞게 하고 주사를 맞히고 꼬박꼬박 약을 먹였고, 엄마는 집에서 잘 관리하면 되지 병원을 그렇게까지 다녀야 하냐, 그 독한 치료와 약을 애가 견딜 수 있겠냐는 입장이셨다. 양쪽 모두 이해는 갔지만 그래도 나와 동생은 엄마와 싸워가며 의사의 의견을 따랐다. 간혹 동생은 침을 맞기 싫어서 온몸으로 버티는 삐삐의 사진, 치료 중인 삐삐의 사진을 보내며 늙었는데도 이렇게 힘센 거 보면 한참 오래 살겠다며 웃었고, 나 역시 금방 치료가 끝나면 건강한 예전 모습으로 돌아올 줄 알았다.
병원에서 하라는 대로 했을 뿐인데 하루아침에 허망하게 막내동생을 보내야 했던 우리 가족은 분노했고, 병원에 수차례 항의했다. 병원에서는 '유감스럽게 생각하지만 삐삐의 사망 원인이 병원 치료 때문이라고 볼 수 없다'라고 주장했고, 결론적으로는 병원에서 삐삐의 장례비를 부담하는 선에서 종료되었다.
이야기가 마무리되기 전까지 일주일에 3~4번씩 삐삐를 데리고 병원을 다녔던 동생은 격렬하게 분노했다. 그리고 마지막 응급 진료를 받으러 갔을 때 괜찮다는 의사의 말을 믿고 삐삐를 두고 보았던 자신에게 더욱 분노했고 자책했다.
삐삐를 보낸 다음날 회사 출근길, 동생에게 온 전화에 나는 또 눈물을 쏟았다.
누나, 꿈에서 삐삐가 또 아팠는데.. 어떻게 해도 죽더라. 병원을 데려가도 죽고, 집에 있어도 죽고.. 어떻게 해도 죽는 걸로 꿈이 끝나..
그때 나는 삐삐가 죽어가는 줄 모르고 정말 자고 나면 괜찮아질 줄 알았어..
삐삐는 죽어가고 있었는데..
엄마와 병원 가는 것으로 꾸준히 의견 충돌이 있어왔기에 그날도 '한번 더 병원을 가볼까?' 하다가 엄마와 싸우기 싫어서 가지 않았는데, 그게 결론적으로 삐삐를 죽인 꼴이 되었다며 스스로를 자책하고 자책했다.
펫로스 증후군 중의 하나가 더 잘 돌봐주지 못했다는 자책감이라는데, 아마도 동생에게는 그 감정이 가장 크게 느껴졌던 것 같다.
괜찮아지는 방법
솔직히 괜찮아지는 방법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삐삐에게 편지를 쓰고, 함께 다니던 산책길에 유골을 뿌려주는 일련의 의식이 도움이 된 것도 같고.. 펫로스에 관련된 그림책을 사다 본 것도 꽤나 도움이 된 것도 같다.
가끔 전화를 받았던 그날처럼 어두운 새벽에 눈이 떠지면, 그날처럼 동생의 전화가 올 것만 같아 심장이 두근거리고 눈물이 난다. 회사를 다니고 일상생활을 하면서 이제 좀 잊고 살고 있는가 싶었던 어느 퇴근길 이문세의 '사랑도 지나고 나면' 노래 한 구절에 다시 무너지기도 한다.
그래도 읽었던 동화책에서의 내용처럼 '너무 슬퍼하면 강아지가 천국에 올라가지 못하고, 가족들이 모두 잘 있으면 안심하고 다시 천국에 올라간다'라고 믿고 견딘다. 착한 내 동생이 천국에서 우리 걱정하지 않고 마음 놓고 뛰어놀기를, 우리 가족을 해맑게 맞이해주기를..
다시 내게 불어온 바람 잘 지낸단 대답이길,
또다시 내 곁에 와주길.
*혹시 같은 아픔을 겪고 계시는 분들이 이 글을 보게 되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라며, 아래 동화책 관련 링크 남깁니다.
(네이버 캐스트 '그곳이 있길, 그곳에 있길'
http://navercast.naver.com/magazine_contents.nhn?rid=2737&contents_id=75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