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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잡곡자매 Oct 26. 2017

#1. 엄마 아빠가 생겨써오

공고번호 2015-00601번이 보리가 되던 날

결혼에 대한 로망과 개


결혼 전, 유기견 보호소에 몇 차례 봉사를 갔었다.

외딴 곳에 위치한 야외 보호소의 환경은 정말 열악하고 참담했다. 경사진 곳에 견사가 지어져 있어 비가 오면 흙과 물이 함께 흘러내리고, 그늘진 곳 견사는 바닥이 마르질 않아 개들은 피부병을 달고 살았다. 중성화 수술로 개체수 조절을 하고 있다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셀 수도 없이 많이 들어오는 아이들로 또다시 새끼가 생겨, 한쪽 견사에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새끼 강아지들이 앙앙대며 뛰어놀았다. 야외 견사이기 때문에 여름엔 무더위와, 겨울엔 칼바람과 싸우며 살아남아야 했고, 그나마 후원으로 들어오는 사료도 반은 쥐들이 훔쳐먹는다고 했다.


보호소에서 눈에 담았던 수많은 개들을 모두 내 품에 안고 돌아오고 싶었지만, 가족들과 살고 있는 집에는 이미 삐삐가 있었고 특히 집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 내가 아니었기에 가족들을 설득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봉사가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안타깝고 속상한 마음이 들 때면 굳게 결심을 했다.


결혼을 하면 꼭 유기견을 입양해야지


웃기게 들릴 수도 있지만 그 결심은 나에겐 결혼에 대한 가장 큰 로망이었다.


결혼을 한 직후, 남편에게 매일매일 유기견 어플과 커뮤니티에 있는 개들의 사진을 수십 장씩 보냈다. 남편은 어릴 적 잠깐 푸들을 키워본 경험이 전부였고 그 때는 너무 어려서 어머님이 거의 돌보셨다고, 본인도 개를 키워보고 싶은 마음이 있다고 긍정적으로 답했다.

예상외로 남편을 설득하는 일은 쉬웠는데 무언가 모를 부담이 자꾸 나 스스로를 망설이게 했다.

- 맞벌이 부부인 우리 집에 강아지가 혼자 있을 일이 너무 많지 않을까. 집을 비울 땐 어떻게 해야 할까.. 여행을 갈 땐 또 어디에 맡기지?

- 최소한 데려오면 10년 이상은 살 텐데.. 당장 1년 후의 일도 모르는 우리가 얘를 10년 이상 책임질 수 있을까

- 아픈 애를 데려와서 돈을 엄청 쓰게 되는 건 아닐까? 집에 상주하는 사람이 없는데 간호가 가능할까?

- 나중에 아기를 낳으면 같이 키우는데 힘든 점은  없을까?


강아지를 위한 고민도 있었지만,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하지만 미래에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우리의 현실적인 걱정을 하느라 두 달,세 달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유기견 공고 리스트를 들여다보고 남편에게 사진을 보내는 것만은 하루도 멈추지 않았다.

남편과 많은 고민과 대화 끝에, 어차피 이렇게 결론이 안 날 얘기를 계속하느니 "일단 한번 보러나 가보고 결정하자"라는 결론을 내렸다. 한 유기견 어플에서 연계되어 있는 근처 동물병원을 찾고, 예약 후 방문하기로 했다.


총 3마리의 강아지를 보게 되었다.

첫 번째 아이, 스피츠 아이였는데 뒷다리에 살짝 문제가 있다고 하면서 보여주셨다. 털이 참 하얗고 이뻤다.

두 번째 아이, 벌써 기억이 잘 안 난다. 첫 번째 아이보다는 좀 작았던 것 같다.

세 번째 아이, 오기 전에 이미 가장 맘에 들어한 아이였는데, 우리 부부 모두 보자마자 탄성을 질렀다.

조금 꼬질꼬질하긴 했지만, 유기견 어플에서 본 사진처럼 복슬복슬한 아이보리색 털과 새까만 눈과 코, 토실토실한 발, 한쪽만 접힌 귀. 어느 한 군데 이쁘지 않은 곳이 없었다. 다만 강아지를 안고 있는 선생님의 까만 가운에.. 방금 묻은 거라곤 믿을 수 없을 만큼의 엄청난 털 뭉탱이들이 붙어있었다.. 하지만 보고 싶지 않았다. 사실 부정하고 싶었다..ㅎㅎ

공고번호 2015-00601번 - 세번째 아이의 입양 공고사진


가장 어리고 이쁜 아이였고, 그래서인지 이미 입양 신청한 사람들이 몇 명 있다고 했다. 대기자들이 예약 날짜에 입양을 하지 않으면 우리 차례가 돌아온다고 말씀해주셨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연락을 기다리기로 했다.




우리 보리(부제: 김칫국 부부)


집에 돌아와서 우린.. 세 번째 아이의 이름을 지었다.

미색이 도는 털 색과 순둥순둥한 얼굴과 어울린다며 남편이 '보리'라고 짓자고 제안했고, 나는 이미지가 딱 맞다며 맞장구를 쳤다. 우리는 이미 입양이 확정된 것처럼 설레어했고, 앞선 대기자들이 우리 '보리'를 입양해갈까 며칠을 조바심 내며 기다렸다.


며칠 후, 대기자들이 모두 입양을 포기했다는 연락을 받았고, 우리는 '보리'를 데리러 갔다.

의사 선생님께 "왜 다들 안 데려갔을까요?" 하고 여쭤보니 "생각하신 것보다 애가 큰가 봐요. 이 정도면 작은 건데.."하셨다. (당시 보리는 3개월 추정, 2.73kg이었다)


선생님이 웃으시며 "얘 착해요"라고 하며 넘겨주셨다. 작고 부들부들한 생명체가 내게 몸을 한껏 기댔다.

그리고 부들부들한 털이 내 옷에 엄청나게 붙었지만, 나는 또 못 본척했다.. 그딴 건 지금 나한테 중요하지 않았다. 우리 보리가 정말 우리 보리가 되었다.


입양 절차에 따라 내장 칩을 인식하고, 입양 계약서를 작성했다.

뭔가 엄청난 일을 해낸 느낌이었다.

보리 입양 시 작성했던  동물등록 신청서


이렇게 우리는 '보리'의 엄마 아빠가 되었다.




나 이재 보리래오. 쪼금 무서워서 기대써오.


엄마아빠가 생긴거가태오. 조아오.

https://bit.ly/2PDVVA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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