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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잡곡자매 Apr 05. 2018

#17. 어제 이야기

조금은 진지한 이야기

보리가 실외 배변을 하다 보니, 아기를 낳기 전까지는 비가 많이 오는 날을 빼고는 거의 매일을 산책했고, 지금도 매일은 못해주지만 웬만하면 매일 산책을 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산책을 나가면 말티즈, 시츄, 포메라니안, 슈나우저 등 대부분 사람들에게 익숙한 종의 개들이 산책을 나온다.


보리와 콩이는 6~7kg 정도 무게가 나가는 믹스견이다. 보리는 그래도 스피츠 과의 믹스견이라 가끔 종이 있는(이런 표현을 하고 싶지 않지만 적절한 표현을 찾지 못했다) 개로 봐주지만, 콩이는 항상 "얘는 무슨 종이예요?", "얘 집에서 키우는 개예요?" 등의 질문을 받곤 한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하이브리드 강아지들


보리와 콩이를 아는 주변 사람들은 귀여운 눈으로 바라봐주지만, 안타깝게도 모르는 사람들의 눈에는 [애완견 같지 않은 개], [집에서 키우기는 좀 큰 개] 등으로 보이는 모양이다.




어제 이야기

어제 남편이 아기를 보고, 나 혼자 개들을 데리고 산책을 나왔다. 나도 하루 종일 집에서만 아기와 단둘이 붙어있던 게 답답하기도 해서 남편이 퇴근하면 주로 내가 개들의 산책을 담당하는 편이다.

아파트에서 단지 내 산책로로 내려가려면 사람 2명이 지나갈 수 정도로 좁은 길을 잠깐 지나야 한다. 사람이 많이 다니는 길은 아니고, 가끔 사람을 마주치는 경우에는 개들과 기다렸다가 지나가곤 한다.


어제는 한 여자분이 멀리서 걸어오고 있어 앞으로 먼저 나가 있는 콩이의 끈을 살짝 당겼다. 콩이는 대부분 그렇게 부르면 잘 오는 편인데, 어제는 막 산책길에 나서 한창 달리고 싶었는지 온몸으로 오지 않겠다고 버팅겼다. 여자분은 점점 가까이 오고 콩이는 하네스가 벗겨질 것처럼 심하게 버팅기는 바람에 점점 마음은 급해지고, 결국 가까이 다가온 여자분이 멈춰 섰다.

콩이를 몇 번 더 당겨보다가 혹시 개를 무서워하시는 분인가 싶어 "죄송합니다. 순한애예요.", 그리고 다시 "잠시만요. 죄송합니다" 하고 줄을 조금씩 당겨 콩이를 안았다. 누군가 앞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그 짧은 순간이 얼마나 길게 느껴지던지. 한 손으로 콩이를 안고 보리를 바깥쪽으로 세운 후 "죄송합니다. 이제 지나가셔도 돼요"라고 이야기했다.

가만히 쳐다보고 서있던 여자분은 내 말에 아무런 대꾸 없이 휙 지나간다.


'아...'

멀어지는 여자분의 뒷모습을 보며 입술을 꽉 다문다.

내가 개들과 끙끙대는 모습을 무표정으로 훑어보는 시선, 연신 죄송하다는 내 말이 들리지 않은 것처럼 가버리는 모습에 또 한 번 마음이 속상하다. 좀 더 솔직히 표현하자면 쓸쓸하고 비참한 마음까지 든다.

보리와 콩이를 키우기 시작하면서 자주 겪는 일이고, 살면서 처음으로 느끼게 된 감정이다.


산책을 끝내고 돌아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아주머니 한 분이 1층으로 들어서셨다. "먼저 올라가세요"라고 말하고 개들과 뒤로 물러섰다. 그런데 난감하게도 엘리베이터가 도착한 동시에 1층 바깥에 아기 손을 잡은 엄마가 도착했다. 보리와 콩이를 보고는 들어오지 못하고 멈춰서 있다.

엘리베이터를 타야 하나, 이 자리에서 기다려야 하나, 바깥으로 다시 나가야 하나 고민하던 와중에 아주머니가 "같이 타세요. 몇 층이세요?" 하신다. 무표정으로 하시는 그 말 한마디가 오늘따라 너무 고마워 내리면서 "감사합니다" 한다.


집에 돌아와 남편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며 속상했다 털어놓았다. 남편은 우리가 피해를 주는 입장이니 어쩔 수 없지 않겠냐고, 우리도 그 사람들을 이해해야지 별 수없지 않냐며 나를 위로한다. 남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면서도 "개 키우면서 사는 게 피해를 주는 건 아니지 않아?"라고 나도 모르게 억울한 목소리로 대답하고 만다.

 


소심한 변명

안다. 내가 아무리 조심해도 개를 무서워하는 사람, 개를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우리가 불편한 존재인 것을.

하지만 개들은 원래 그렇다. 아기들이 많이 울고 엄마아빠말을 잘 안듣는 것처럼, 개들도 많이 짖고 컨트롤이 생각처럼 안되는 상황이 발생한다. 그래서 최대한 개를 키우는 사람들이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도 안다. 그런데도 가끔은 그 노력이 통하지 않는 상황, 혹은 노력이 아무 것도 아니게 되어버리는 상황 역시 생기고 만다.


최대한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살고 싶었고, 다른 사람이 보면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로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 노력과는 상관없이 나의 사랑하는 개들, 그리고 그 개들을 키우고 있는 내가 [존재]만으로도 누군가에게 피해가 된다는 사실이 좀 서글프게 와닿는 하루였다.


그래도 우리는 혼자 사는 존재가 아닌 것을, '이곳은 인간만 사는 지구가 아니다' 라고까지 거창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그냥 아기를 키우는 사람, 밤에 일하러 나가는 사람, 결혼하지 않고 함께 사는 사람들처럼 [개를 키우는 사람도 함께 살고 있는 곳] 정도로만이라도 이해받길 바란다면 큰 욕심일까.


유럽여행에 갔을 때 우리의 기준으로는 '조금 지저분한' 중대형견들이 카페에, 기차에 가족처럼 당연하게 함께 앉아있던, 그리고 그들을 아무도 이상하게 바라보지 않았던 그 모습이 참 부럽다.

우리에게도 그런 평범한 일상을 누릴 수 있는 날이 오길, 존재만으로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는 그 날이 오길-



그래도 꽃보다 이쁜 보리 콩




잡곡자매 인스타그램 : @vorrrrry_k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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