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귀자 장편소설《모순》은 큰 노력을 하지 않아도 손쉽게 만날 수 있었다. 1998년 1판으로 시작해 현재까지 소설 분야 베스트셀러로 자리 잡은 책이기에, 무려 25년 간 선택의 기회가 있었으니 '이제야' 만났다고 보는 게 더 알맞겠다.
이 책을 추천한 사람은 정말 많았다. 독서모임에서 만난 다독왕 멤버도, 찰진 리액션으로 인기를 끄는 유튜버도. 온오프라인에서 접한 모든 인연들이 이 책을 가리키고 있었다.
내가 두꺼운 장편 소설을 읽다니. 구매하면서도 기분이 좋았다(양장이라 더 풍족했다). 장편 소설은 세밀한 감정을 느긋한 템포로 표현하기에 단편소설보다 더 많이 찾는 편이다. 특히나 이 소설은 반드시 장편이었어야 했다. 만약 이 이야기를 함축적인 글로 접했다면 안진진의 시선을 체험하는 데에 시간이 부족했을 것이다. 그의 환경을 단편적으로 이해한다면 이 소설은 독자에게 설득되지 않았을 것이다.
주인공 안진진은 자신의 어머니와 일란성쌍둥이인 이모의 삶을 바라보며 자랐다. 같은 얼굴이지만 극명하게 다른 두 개의 삶을 밀접하게 탐구할 수 있었다. 얼핏 보면 비극과 희극이 극명하게 나뉜 것 같이 보이나, 그 삶을 면밀히 들여다볼수록 그 경계는 옅어진다.
안진진의 어머니는 정말이지 모진 남편을 만났다. 술을 먹으면 아내에게 신체적 언어적 폭력을 행사하고, 모은 돈을 다 갖고 집을 나가는 모진 남편의 모습이 있는가 하면, 딸 안진진에겐 가족 중 유일하게 정신적 교류가 가능한 가족이었다. 딸에게 사랑을 주었고 삶의 진실을 알려주었으며 해질녘에 드리우는 어둠을 따뜻하게 알려준 사람이다.
안진진의 가족 구성원 모두 아버지의 삶에 대해 아무런 지적을 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외로움에서 연민의 감정을 느끼고, 사랑을 대하는 자신의 모습에서 아버지의 폭력성을 발견하기도 한다. 부유하게 자라온 사촌 주리가 아버지의 잘못을 지적해도, 안진진은 굴하지 않고 아버지에게 배운 삶의 가치를 되새긴다.
그와 반대로 살아온 일란성쌍둥이 이모는 벌이가 좋은 남편과 결혼했다. 같은 얼굴을 한 안진진의 엄마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간다. 잠깐 만난 조카의 담임 선생님에게 꽃병을 선물할 수 있는 품위와 여유를 지닌 사람이 되었다. 그녀는 마지막에 자신의 삶을 아래와 같이 평가했다.
어려서도 평탄했고, 자라서도 평탄했으며,
한 남자를 만나 결혼한 이후에는 더욱 평탄해서
결핍이라곤 경험하지 못하게 철저히 가로막힌 이 지리멸렬한 삶.
- p.283, 이모의 편지
깜깜한 밤중에 밀려오는 파도를 마주한 기분이었다. 그 정도의 중압감이었다.소설의 마지막 줄을 다 읽었을 때 느낀 내 감정을 어떻게 정리해야할지 몰라 어색하게 책을 덮었다. 이내 작가의 해석이 너무 궁금해서 다시 책을 펴 본문 끝에 있는 양귀자 작가가 남긴 글을 읽었다.
행복과 불행, 삶과 죽음, 정신과 육체, 풍요와 빈곤. 소설 《모순》의 창작노트 곳곳에는 이런 복합어가 많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양극단에 서있는 듯한 저 단어들은 사실 일란성쌍둥이처럼 한 곳에 모여있다고 작가는 말했다. 어쩌면 불행이 삶을 유지시키기도 하고, 풍요가 죽음을 인도하기도 하는 것이 삶의 가장 큰 모순이다.
자녀의 유학을 앞두고 해맑게 살아갈 줄 알았던 이모는 이 지리멸렬한 삶 속에서 고통 없는 고통을 받았다. 편지에 의하면, 자신의 삶이 무덤처럼 평온했다고 표현했다. 소설 초반에 나왔던 이모의 혼란스러운 감정이 느껴지는 대목이 중간중간 있었다. 불행을 한 번이라도 느낀 사람이라면, 평탄한 삶을 산 이모의 감정을 절대 이해할 수 없을 거라는 심술 깃든 생각이 들었다. 괜히 이모의 삶이 배부르다고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모의 편지를 읽으면서는 감정 없이 회사와 집을 반복했던 때가 떠올랐다. 그땐 고통 없고 나도 없었다. 하루의 루틴을 성실히 돌다 보면 이모가 느낀 '결핍을 경험하지 못한 지리멸렬한 삶', 즉 '고통 없는 고통'이 느껴지기도 했다.
아무 일 없는 평탄한 하루였고, 맛있는 식당을 예약할 수 있을 정도로 통장 잔고도 부족하지 않았고, 그 누구도 나를 싫어하지 않았지만, 그 누구도 나에게 관심이 없었다. 삶의 그 어느 순간에도 사랑이 없었다. 그 하루가 삼일 정도 지속된 적이 있었는데, 그 무엇도 내 삶을 깎진 않았지만 밀려오는 외로움을 감당하지 못했을 때가 있다. 아무 일 없는 평탄함은 그 어떤 성취가 필요 없었다.
이모는 흘러가지 못한 물이다. 그는 물처럼 흘러가야 할 성질이지만, 생동감 없는 지리멸렬한 삶이 물길을 막았다.
반대로 안진진의 어머니의 삶은 정말이지 굴곡의 연속이었다. 남편의 폭력성에 못 이겨 악착같이 모은 돈을 내주었고, 살인미수로 끌려간 아들을 보러 면회를 다녔다. 그럼에도 일본 관광객에게 김치를 팔아 돈을 모으러 일본어 책을 펼치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삶의 굴곡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가사의한 활력으로 자신의 삶에 온 정신을 투자했다.
불가사의한 활력, 정말 이해할 수 없는 모순이다. 더 놀랐던 건 어머니의 삶을 보고 어떠한 개입도 하지 않는 안진진의 태도였다. 자고로 부모의 삶을 부모의 것만으로 볼 수 없는 것이 자식이다. 친할아버지의 제삿날에 기름 낀 부엌에서 혼자 전을 부치던 우리 엄마에게서도 안진진의 엄마가 가진 '볼가사의한 활력'을 보였다. 나는 그것을 참고 봐줄 수 없는 딸이었다. 간혹 엄마의 삶에서 불행의 씨앗을 발견할 때마다 매번 그것을 이야기해줬다. 그때마다 엄마는 꼭 슬픈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왜 그래, 내가 행복하다는데!"
가족이라 해도 타인의 삶을 해석할 자격이 있을까. 내 눈에 보이는 불행은 꼭 불행이 아닐 수도 있고, 그 불행이 삶의 버팀목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내가 정의내린 불행의 기준은 절대 남에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만약 이 책을 읽을 가장 적합한 시기를 고른다면, '힘들었던 지난날을 돌아보고 싶을 때' 읽으면 더 많은 감정을 느낄 것 같다. 지금의 나는 불행을 겪고 난 뒤에 더 단단한 사람이 되었다는 걸 다시 한번 새겼다. 예전엔 불행했던 순간을 도려내는 상상을 수없이 했다. 내 삶에 불행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또는 내 삶에 사랑을 놔둘 곳이 없다면 어땠을까? 어떻게든 다른 환경을 만들어 '행복하게 살아야 할 이유'를 찾고 있지 않았을까.
양귀자 장편소설《모순》
마케터 책 copy 연습장
* 지금 끝없는 불행의 터널을 걷고 있는 당신이 봐야 할 소설
* 숨차게 달려온 당신의 삶을 관통하는 단 하나의 모순
* 26년간 독자들이 선택한 이야기
* 20세, 30세, 40세, 50세 지나온 삶을 돌아보고 싶을 때 반드시 읽어야 할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