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이 나를 읽는다-『그림책의 힘』(가와이 하야오 외 지음, 마고북스)
한 자리에 가만히 앉아서 진득하게 독서를 하는 게 언제부터인가 어렵습니다. 마음의 여유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 같아요. 한편으로는 멍 때리며 생각이 흘러가는 것을 보다 의미있는 한 뭉치의 아이디어를 낚아채는 내면의 낚시 활동에 재미를 붙여서 그런 것일 수도 있겠지만요. 한동안 목 매듯 읽었던 인문서들에서 헛헛함을 느끼고 손을 놓으면서 독서가 일상이 아닌 이벤트로 변해버린 것도 같아요. 그 이유가 뭐가 됐든 이제는 책을 집중해서 파지는 않게 된 저를 보게 되네요. 그러던 차에 발견한 것이 그림책이에요. 작년 남원 여행의 마지막 날 온라인으로 듣게 된 북큐레이팅 수업이 그 시발점이 되어 그림책을 읽는 재미도 알게 되고, 그림책의 역할도 알게 되고, 그림책을 읽어야 하는 의미도 알게 됐던 차에 이 책 <그림책의 힘>을 찾아 읽었어요.
책상 앞에 앉으면 좀처럼 집중이 되지 않아서 손에만 들고 있었는데, 이번에 부산을 다녀올 일이 있어 기차에서 책을 열었을 때는 딴짓할 것들이 덜어져 책을 몇장이나마 넘겨볼 수 있었고 그 양이 좀 쌓이니 연신 '아하'하며 그 속에 빠져 읽게 됐어요. 늘 그렇죠. 임계점의 법칙같은 거예요. 처음부터 사로잡혀도 좋지만, 조금만 참고 따라가다보면 새로운 알이 하나 부화하듯이 탁하니, 눈이 트이고 알아가는 재미, 공감을 주고받는 환희를 경험하면서 그것을 좋아하게 되네요. 언제부턴가 여행길은 이렇게, 한 권의 책에 제대로 들어가는 시간을 선물해주는 독서 입문의 자리가 되었어요.
<그림책의 힘>은 분석심리학자 가와이 하야오, 편집자 마츠이 다다시, 논픽션 작가 야나기다 구니오가 그림책을 주제로 한 강연을 전반부에 배치하고 세 사람의 대담을 후반부에 배치한 구성으로 돼 있어요. 입말을 활자로 옮긴 것이기 때문에 저작물로써의 밀도 높은 구성력은 약하지만 가벼운 인상부터 개별적인 체험을 회고하는 것까지 오히려 그림책에 대한 애정을 높일 수 있는 내용이 군데군데 박힌 따뜻한 책이었어요. 가와이 하야오는 익히 그의 저작도 다수 번역돼 있어서 알고 있었지만 다른 두 사람은 여기서 처음 만났는데, 오히려 그들의 이야기가 더 흥미진진했어요. 큰 아들의 자살 이후 상실감의 끝에서 그림책을 다시 읽게 됐다는 야나기다 구니오의 이야기에는 특히 울림이 있었고, 머리 희끗한 남자(야니기다 구니오)가 전철에서 그림책을 읽고 있으면 사람들이 이상한 눈빛으로 힐끗 거린다는 부분에서는 웃음도 나왔지만 평화로운 햇빛 아래 펼쳐지는 따뜻함의 정경 또한 자연스럽게 그려져서 저도 그림책을 만들 수 있다면 그 장면을 시각화해서 이야기를 펼쳐보고 싶어지더라고요.
여러가지 이야기가 나오지만, 이 책을 소개한다면 저는 '그림책은 결국 누군가와 같이 읽는 것이다'라는 한 문장으로 정리할 거예요. 마츠이 다다시는 말하길 그림책은 한 사람이 아이일 때 최초로 접하는 책이고 그것은 대체로 부모같은 양육자/어른이 읽어주는 것을 통해서 라는 것이죠. 그러다가 혼자 글을 읽을 수 있게 되면 소리 내지 않고 자기만의 세계에서 책을 읽게 되겠지만 그것은 별도의 영역이고 그림책은 무조건 그 말과 그림을 공유하며 함께 읽어야 한다고까지 말해요. 최초의 체험이 단지 아직 글을 읽을 수 없기 때문에 도움을 받아야 하는 수준에서의 체험이 아니라 그림책 자체에 부합하는 본래의 모습이라고 말하더라고요. 인간이기에 가능한 말이라는 소통의 매체를 어떻게 풍부히 경험하며 그 경험을 통해 자기 존재를 넓히고 깊이 할 수 있을까에 대해 거듭 관심을 가져온 입장에서 마츠이 씨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예요.
"문제는 요즘 어린이들은 말의 체험이 너무 빈약하다는 점이에요. 사람의 말을 귀로 받아들이는 일, 목소리를 통해 받아들이는 일이 별로 없죠. (...) 저는 아이들이 일찍 글을 깨우치는 것에 동의하지 않아요. 글이라는 것은 매우 한정된 것이고,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 한정된 말속에 혼자 들어갈 수 있다는 뜻이죠. 반면에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은, 글을 읽어 주는 사람과 공간을 함께 나누는 체험을 뜻해요. 그런 의미에서도 나는 그림책 읽기를 권장하고 싶어요. 타인과 한 공간을 공유하는 인간적 체험을 풍부히 쌓고, 목소리를 듣고 말의 세계로 자유롭게 들어갈 수 있는 힘을 기른 어린이가 글 읽는 기술을 터득한다면, 독서가 가능하겠죠. 하지만 요즘 아이들은 글 읽는 기술만 배울 뿐이에요. 그런 상태로는 진정한 독서를 할 수 없어요."(172면)
아마 제가 작년부터 그림책에 열중하게 되어서 여기서 세 사람의 강연자들이 말하는 그림책의 힘에 공감하고 자주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특히나, 야나기다 구니오가 그림책이 죽음과 상실을 다루는 경우들을 쭉 소개해주는 내용은 뭉클했어요. 때이르게 죽음을 맞이한 동생을 잘 떠나보내고 죽음을 편견 없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고심 끝에 그림책을 읽어준 의사의 에피소드라든가, 임종 직전 할머니의 모습과 그 떠남 후의 빈 자리를 사진으로 담아 만든 그림책같은 것은 말만 들어도 어떤 분위기를 담아내고 있을지 상상이 되더라고요. 그런 식으로 이들이 소개하는 책들을 다 찾아보고 싶지만 어떤 것은 번역이 되지 않았고, 또 어떤 것은 절판이 되어서 도서관을 가보거나 외국 원서를 찾아 봐야할것 같아요.
이 책을 읽고나니, 그림책 중심으로 해보고 싶은 활동들이 또 몇 개 떠오르더라고요. 그림책 읽기 모임은 계속 염두하던 것인데 이 책 이후에 그 동기 부여가 더 강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겠네요. 또 하나는 그것이 어떤 내용의 모임이든 간에 그날의 주제나 분위기에 맞춰 모임을 마무리할 때 그림책을 한권 같이 읽는 시간으로 맺는 것이 좋겠다는 것, 클럽하우스같은 음성 기반 플랫폼에서 그림책을 말로써 표현하며 소개하고 타인이 말로 소개하는 그림책이 내 마음에 어떤 이미지들을 만들어내는지를 이야기해보기 같은 것도 생각했어요. 이 책을 통해 다시 그림책의 시즌이 저에게 찾아왔네요.
"인간 마음의 심층과 그림책은 깊은 관계가 있어요. 임상심리학을 하는 동료들 중에는 그림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주 많아요. 상담하러 올 때 자신이 좋아하는 그림책을 들고오는 분들도 많고요. 이게 다 그림책이 마음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는 증거예요. 인간의 심층에는 사실로서는 이야기할 수 없는 것들이 많아요. 그렇다면 어떻게 얘기할 것인가? 대답은 이미지밖에 없죠. 이미지는 많은 이야기를 내포하고 있거든요. 그런 의미에서도 나는 어른들이 그림책을 읽는 의미는 매우 크다고 생각해요. 앞에서 야나기다씨도 '영혼'이라는 말을 했지만, 그림책은 영혼의 현실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매체일지도 모르죠."(15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