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장면이 내 꿈이라면, #1- 후쿠오카(장률 감독, 2020)
처음, 직접 다룬 꿈은 오래된 헌책방으로 가는 길로 시작한다. 그곳은 실재하며 나는 어린 시절부터 20년 넘게 그곳을 즐겨 찾았다.
집에서, 오래된 나의 집에서 걸어나와 큰 건널목을 하나 건너면 곧바로 진입하게 될 책방 거리와 그 헌책방에서 나는 쓸쓸함과 안락함을 동시에 느낀다. 책방의 이름은 유태인들의 신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 이름과 같다. 머리 희끗한 두 여성이 운영하는 책방 안에는 책이 가득하다. 사람이 다닐 수 있는 길은 최소한으로 남기고 모든 것을 책으로 채웠다.
헌책방은 책이 쌓여 있는 곳이다. 서점은 깨끗하고 빳빳한 상태를 유지해야 상품 가치를 유지할 수 있어서 책들을 바닥에 깔아두는 일 따위는 안 한다. 도서관은 보존 서고가 있어서 또한 그렇게 책을 다루지 않는다. 헌책방만이 책을 바닥에 깐다. 그 책도 팔아야 하는 것이지만 모두 서가에 꽂을 여유가 없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책들의 계급사회? 아니! 오히려 귀한 책은 맨 밑바닥에 있는 경우가 많다. 맨 아래 있는 책을 확인하기 위해선 무릎을 꿇고 고개를 힘들게 숙여야 한다. 탐서가들은 그 행위로 열정을 증명한다. 맨 밑에서 꼭대기까지 꼼꼼히 보지 않으면 미처 놓칠 보물 같은 책들이 있다. 그런 의미로 나는 헌책방을 열의와 차분함이 공존하며 생기를 북돋아주는 공간으로 이해한다.
장률의 영화 <후쿠오카> 속 첫 장면은 내 생각과는 상반되는 성격의 책방 분위기로 씬을 시작한다. 아니지. 내내가 성격 지은 헌책방의 캐릭터는 책을 사랑하는 사람에 한한 주관적 생각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 맞겠다. 지하의 헌책방 주인인 재문은 공간 안에 가득한 책들 사이에서 등받이 의자에 앉아 목을 뒤로 젖히고 코를 골며 잔다. 이것은 독서 후에 찾아든 몽상의 낮잠이 아니다. 모든 것에 흥미를 잃고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앉아있는 중년의 잠이다. 이런 장면에 더 잘 맞는 단어가 있다. 기절! 헌책방에 대한 개인적 정서와는 상반되지만 볕 좋은 날의 오후 3~4시가 되면 기운이 빠지고 졸음이 쏟아질 때가 있지. 그때의 나는 꼭 영화 속 재문과 닮아 있는 것 같아. 그런 생각도 든다.
한참 낮잠에 취한건지, 깨고 싶지가 않은건지 모를 재문을 깨우는 두 개의 목소리가 있다. 맨 먼저 교복 차림의 젊은 여성 소담. 그리고 음성으로만 들리는 대학 때 선배 해효의 일침. 그를 깨우는 각각의 인물들은 별개라고 해야할까? 단지 우연히 비슷한 시간에 일어난 별도의 사건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만약 해효의 목소리가 먼저 들리고, 소담이 들어왔다면 재문은 형의 목소리를 꿈 속 일로 치부했을 수 있다. 그렇다면 그는 더 깊이 잠들 수 있었을거다. 소담 이후에는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그 메마른 자기만의 시간 속에서 더 깊이 잠 속으로 몸을 웅크렸을 수 있지만 소담이 먼저 귀찮게 말을 걸어 그의 정신을 어느정도 돌려놨기 때문에 해효의 목소리가 깨어 있는 상태에서의 이상한 현상으로 그를 더 확실하게 일으켜 세운 것이다. 장률은 그의 오랜 영화 이력 안에서 잠과 꿈의 성격에 기초한 이야기를 종종 만들어왔는데 이 영화도 그 선상에 위치한다. <후쿠오카>는 잠과 깨어남이라는 은유를 통해 의식과 깨우침을 다룬다. 종교적 작품은 아니지만 불교나 힌두 철학에서 집중하던 주제와 통한다고 할 수 있겠다.
우리가 살면서, 한 사람 때문에 정신이 번쩍 들고 과거의 나와 결별하게 만드는 경험을 얼마나 할까? 이것을 따지고 정리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만남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의례히 할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스승이 없는 시대'라고 운운하기도 하는데, 그때의 스승을 꼭 사제관계 안에서만 이해할 것은 아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바뀌는 경험으로 나를 일깨우는 타인이 곧 스승이라면 이 영화에도 그런 인물이 있다. 헌책방에 조용히 찾아든 소담이다.
<후쿠오카>는 같은 감독의 전작 <군산>과 인물이나 구성적 요소 사이에 연결점이 있는 영화인데, <군산>에서 게스트 하우스 주인의 딸이었던 소담은 내성적이고 음산한 반면 <후쿠오카>의 갓 성인이 된 소담은 활기차고 도발적이다. 군산에서의 소담은 남자 주인공의 주변을 배회하는 반면 후쿠오카에서의 소담은 변칙과 기이한 능력으로 사라졌다 나타나기를 반복하며 남자 주인공(들)을 놀래킨다.
소담은 내내 경계를 우습게 여긴다. 기본적인 역할이나 지위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지리와 시간, 언어에서도 그녀는 막힘이 없다. “말 할거 같은데. 한국말 할 거 같은데.” 해효가 운영하는 후쿠오카의 선술집에 단골인 농아 아저씨를 보고 한 말이다. 재문과 해효는 모두 그녀의 말을 무시하지만 그녀는 당당하다. 그리고 곧 밝혀지듯이 농아는 말을 한다, 한국 말을. 소담이 모든 것을 아는 것은 아니지만 그녀가 말하거나 지적하는 것은 모두 맞는다. 소담은 정확히 알고 있는 것만 밝힌다. 그런 그녀의 기이한 능력이 서서히 그 우산을 펼치고 재문과 해효는 초기의 불신과 의심을 걷어내고 그녀가 이끄는대로 움직이게 된다.
그것을 신뢰라고 해야할까? 차라리 귀신에 홀렸다는 말이 맞겠다. 소담은 사람들을 후쿠오카로 오도록 부르는 귀신이다(이 점에서는 군산과 후쿠오카의 소담은 닮아있다). 후쿠오카는 소담으로 인해 귀신들의 도시처럼 보인다. 그녀는 앞서 말한대로 갑자기 공간을 이동하고, 시소 근처에서 울고 있는 중국인 여성과 서로의 모국어로 막힘없이 대화한다. 소담의 앞에 놓인 물리적 실재는 고체가 아니다. 그녀가 만지고 개입하는 단단한 현실은 휘어지고 뒤틀리는 데 아무 무리가 없다. ‘귀신에 홀렸다’고 하면 자기 주도권을 잃어버린다는 뜻이지만 후쿠오카에서 귀신에 홀리는 건 다른 세계의 가능성을 엿본다는 뜻이다. 그 안에서 끝까지 자기 인식의 장을 고집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이 영화적 세계 안에서 귀신에 홀린 두 남성 재문과 해효는 조금씩 그 유연한 현실에 녹아들기 시작한다.
소담은 초입에 재문을 잠에서 깨우고 도발적 제안을 하듯 한국에 있던 재문과 일본에 있는 해효를 화해시키고 공존하는 여지(여기서 이 영화가 한일관계를 은유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를 만든다. 그것을 소담의 존재 목적이라고 해야할까? 아니다. 소담은 소담의 인생이 있다. 그녀가 그 와중에 재문과 해효를 발견한 것일지, 재문과 해효가 소담을 발견했다고 할지 모르지만(사실은 둘 다 맞다고 말하려는 거다) 두 아저씨는 소담을 통했기에 다른 삶의 가능성에 들어서게 된다.
재문과 해효는 한국과 일본에서 가게를 운영하는 평범한 아저씨들이다. 평범한 아저씨는 어떤 아저씨일까? 추억에 젖어있고, 쎈 척 하면서 경험이 부족해 보이는 사람은 은근슬쩍(어떨땐 대놓고) 무시하는 사람? 그게 맞다면 그들은 평범한 아저씨들이다. 대학의 선후배 사이였던 그들은 아주 오래전 절교한 사이인데 서로 뭘 하며 살고 있는지는 알고 있던 것 같다. 그리고 왜 그렇게 살고 있는지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순이 때문에. 시인 윤동주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연정의 대상이었던 순이와 같은 이름의 그들의 첫사랑이자 끝사랑 순이의 폴리아모리가 그들 사이에 건널 수 없는 다리를 만들었고 20년이 지나도록 그들은 사라진 순이를 마음의 이상으로 붙잡고 자신의 순애보를 증명해야 한다는 듯이 순이의 고향인 후쿠오카에 적을 두었고, 순이가 자주 다니던 책방을 인수해 사장으로 남아 있던 것이다.
아저씨들은 과거를 안주삼아, 자기연민과 낭만 그리고 분노를 섞어 만든 자기상을 잃지 않기 위해 버둥거린다. 하지만 그건 다른 사람을 만났을 때나 가능한 일이고, 둘은 너무 닮아서 그렇게 마주 앉기가 거북하다. 아무리 괴롭고 속이 쓰려도 잠은 잘 잤는데, 이렇게 나타나서 존재 자체가 괴로움인 재문 때문에 해효는 화딱지가 난다. 재문은 그 후에도 다른 여자들과 잠은 잤다지만 "순이가 제일 좋았다"고 말하며 능글맞게 군다.
순이는 왜 갑자기 사라졌을까? 순이가 말없이, 비밀과 의문을 남기고 사라졌기 때문에 순이는 없지만 있다. 이미 말한대로 그들의 마음속에 지울 수 없는 절대자로 그녀는 있다. 두 남자는 큰 존재인 순이를 상실한 탓에 찾아드는 마음의 공허를 채우기 위해 상상의 순이를 만들어 그녀를 안다고, 사랑한다고, 영원히 기억할 것이라고 강조하며 살아오다 깊은 권태에 빠져버린 모습이다. 순이가 주는 심리적 무게는 너무나 크고 그렇게 그들은 가라앉아 있다. 지나치게 무거워지고 그 상태가 오래 유지되면 자연히 반대 급부로써 가벼움, 비상을 원하게 된다. 그러면서도 그걸 어떻게 가능한지 알 수가 없어 마음과 현실 사이의 간극은 더 벌어지고 그 사이에서 당사자는 고통스럽다. 그들이 권태는 고통의 권태이며, 간극의 슬픔이다.
결국, 소담의 즉흥적인 아이디어의 연속으로 벌어지는 상황들 속에서 재문과 해효는 차츰 풀어지고 솔직해지고 섞여들며 종국에는 나른한 햇빛 아래 길가에 털썩 주저앉아 자신들의 이야기를 한다. 실없이 웃기도 하고, 분노와 탓하기를 그만둔다. 그들은 어느덧 가벼워졌고, 상상의 순이를 등에 지지 않아도 될 정도가 된다.
여기에 절정이 있다면, 갑작스런 정전(停電) 이후 소담이 '나를 순이라고 생각하고 그때 못다한 대화를 나눠보자'고 제안하며 시작한 즉흥극 장면일 것이다. 아무런 치장이나 캐릭터에 대한 이해도 없이 소담이 "선배", "재문아"라고 하는 순간 표면적 상황은 바로 역전돼 두 남자의 마음속에 있던 순이를 즉시 호명한다. 홀로 불밝힌 양초가 조명이다. 그리움에 불타는 마음과 새로운 타협점을 찾아보고자 애쓰는 재문과 해효는 당장 무릎이라도 꿇을 태세다. 이게 내 꿈이라면, 나는 곧 재문이자 해효일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별말 없이 앉아있는 재문이지만 속으로는 또 혹여나, 순이가 그때처럼 사라져버릴까봐 무섭고 다급한 마음에 속에 있는 말을 있는 대로 꺼내며 떠나지 않겠다는 확약이라도 받아내고 싶어하는 해효가 내 솔직한 마음이다.
내가 기억하는 그 순이는 아니지만, 나의 과거를 알고 있는 한 사람이 기꺼이 자신을 순이라고 생각하고 이야기해보자고 제안하는 것은 반가운 아니 고마운 일이다. 물론 처음엔 의심할 것이다. 놀리는건가? 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순이이자 소담은 자신이 우리보다 우위에 있다고 지배하려 들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자존심이 상하지 않는다. 이런 대화가 가능한 것이 너무 좋다. 훅 불면 꺼질 촛불처럼 미약하다고 해도 이 순간을 온전히 느끼고 그걸 간직하고 싶다.
정전. 전기가 멈췄단다. 전기는 근대 이후 문명 사회의 두뇌를 관장한다. 정보의 흐름과 기술의 통제는 전기를 통해 유지된다. 그런 전기가 멈췄다. 문명이 생각하기를 멈췄다. 발전기가 돌아가지 않고 화이트 노이즈가 들리지 않는다. 완전한 정막이 찾아들었다. 재난은 꼭 어마어마한 것이 압도적으로 밀고 들어오면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 생활의 근간이 멈추어버리는 것도 재난이다. 그런 상황에서 나는 미약하구나. 당황하게 된다. 무섭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상황이기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그때 믿을 수 있는 건 자신밖에 없다. 일상에서도 종종 차분해지기 위해, 나를 잘 보기 위해 전자 제품을 멀리하곤 하는데 이때야말로 절호의 기회다. 정말 꿈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거야말로 무의식이 보내는 신호가 아닐까? 아주 미약하고 별볼일 없어 보이더라도 내 마음속 솔직한 이야기를 가감 없이, 핏대 세우지 말고 누가 들어주기나 할까 염려하거나 눈치보지 말고 편안하게 심호흡하듯이 하나씩 꺼내보라고. 이제는 그럴 때라고 말하는 강한 신호가 아닐까? 그럴 때 옆에서 "우리 그렇게 대화해보자"고 말하고 지지해주는 소담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장률의 영화를 좋아한다. 장률은 이렇게 모호한 영역으로 관객을 초대하고 그 안에서 관객을 앨리스와 장자로 만든다. 그의 영화적 장소에서 나는 한 편의 꿈을 꾸는 동시에 그 꿈을 해석한다. 장률은 그 장소들에 명확한 이름을 붙인다. 경주, 군산, 후쿠오카……. 그곳은 실재하는 곳이다. 지금 당장 내가 마음만 먹고 터미널로 간다면 2시간, 3시간 후에 도착할 수 있는 곳이다. 그곳에 가면 나도 영화적 인물들처럼 꿈을 꾸고 내가 결코 넘을 수 없다고 생각한 경계를 거미줄처럼 헤치고 건너갈 기회를 갖게 될 것만 같다. 그것은 꼭 내가 꿈을 구체적으로 다룰 때 경험하는 것이다. 그는 평범한 이름들을 특별하게 만들고, 그 안에 나를 포함시켜준다. 그래서 장률의 영화를 좋아한다.
장률은 점점 남하하는 중이다. 초기작인 <중경>과 <두만강>에서는 북쪽에 머물던 그가 <이리>, <경주>, <군산>을 따라 남쪽으로 오더니 이제는 바다를 건너 일본땅으로 옮겨갔다. 이제 그는 또 어느 방향으로 흘러갈까? 더 남쪽으로 갈까? 아니라면 좌로든, 우로든 방향을 조금 틀까? 어쩌면 왔던 길을 되짚어갈 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