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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이d Feb 28. 2022

뒤바뀐 아이를 찾아서

이 장면이 내 꿈이라면, #5- 카페 뤼미에르(허오 샤오시엔, 2005)

당신이라면" 좋아할거예요

여기 하나의 장소가 있다. 서울의 어느 선술집. 겨울이었고, 길은 어둡고 좁았다. 주택가에 자리한 반지하의 아담한 술집에서 따뜻한 술과 가벼운 안주를 앞에 두고 우리는 앉아 있었다. 거기 하나의 대화가 있다. 여성과 남성의 대화. 취향에 입각한 그다지 수다스럽지는 않은 시냇물처럼 흐르는 대화였다. 주고받은 말보다, 내 옆의 타인에 대한 인상보다 추위와 어둠에 대비되어 은은하게 빛나며 실내에 고루 퍼져있는 온기의 장소가 기억의 배관을 타고 막힘없이 터져나온다. 열기구처럼 천천히 부풀어오르는 그날의 행복한 대화가 내용도 없이 이렇게 남아 있는데, 적어도 하나의 말만은 분명하게 활자화할 수 있다. '그 작품은 분명 너라면 좋아할거야'. 그것은 강요나 확신 따위가 아니었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평생, 안정적으로 알고 그 앎으로 대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만 어느 시점에 눈빛, 말, 느낌에서도 독기나 애씀 하나 없이 '그러그러한' 방식으로 알것 같아 자연스럽게 뭔가를 건네게 될 때가 있는데 내가 그때 받은 한 편의 영화 추천이 그랬다. 긴 우정은 내게도 드문 일이지만, 그런 경험이 한번 있고 나면 멀어지고 나서도 그 사람은 그날의 일로 기억되고 그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늘 한켠에 남겨두게 된다. 그녀의 말처럼, 나는 그 영화를 정말 좋아하게 됐다. 그건 마크 포스터 감독의 <스트레인저 댄 픽션>(2007)이었다.


 그와 같은 일이 세 번, 아니 정확하게는 네 번 있었다. '너라면', '당신이라면', '형이라면' 분명 좋아할거야. 내 옆에 서서 한치의 떨림도 없이 그들이 손가락을 들어 달을 가리키듯 나에게 아직 보지 못해 희미하게 깜박이지만 빛을 내고 있는 미지의 작품들을 하나씩 추천했고 그 영화들은 모두 공히 추천자들의 말을 배반하지 않았다. 그 네 편의 영화가 유달리 특별할 수는 없다. 그와 같은 울림을 주는 영화들은 많이 있었고, 어떤 것은 그것을 능히 상회하고도 남는다. 그렇지만 그것들이 더 특별한 건 누군가가 추천했다는 데 있다. 내 귓가에서 발화하는 사적인 말 속에 담긴 추천의 말은 선물이나 마찬가지다. 의미는 그것이 지극히 사적인 것일 때 완성되기 마련이다.

 

 <카페 뤼미에르>는 앞서 말한 네 편에 포함되지만 그 중에서도 독보적이다. 다른 작품들과 달리 이 영화는 그 한 편에서 그치지 않고 감독의 이름을 기억하고 그의 신작을 기다리며 과거의 다른 작품들을 거듭 찾아보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대만 출신의 허우 샤오시엔은 일본의 오즈 야스지로 감독 탄생 100주년 기념작을 의뢰받았고 그렇게 <카페 뤼미에르>는 나왔다. 오즈라는 거장이 지겹도록 반복한 주제와 소재를 가지고 허우 샤오시엔은 자신의 영화를 만들었다. 오즈적 세계 또는 그의 조국에서 허우 샤오시엔은 그만의 호흡으로 놀았다.


 이 영화에서 나에게 남는 것은 세 가지다. 체인질링, 아버지의 근심 그리고 철도.


 풍경을 따라 신화적 이미지를 만나다

마지막 장면부터 얘기해보자. 두 남녀 주인공인 요코와 하지메. 어느 전철 안에서 만난 그들은 한 역에서 내린 후에도 대화는 일절 없고 눈짓조차 희미하다. 하지메가 취미 활동을 하고 있어서 요코는 말을 걸 수 없고 옆에서 우두커니 서서 그의 녹음 마이크가 꺼지길 기다리는 중이다. 두 철로  위에서 마주 오는 열차들과 그 너머로 가려졌다 보이기를 반복하는 두 남녀. 그들은 서두르는 법 없이, 끝낼 기미도 없이-소리는 계속되니까-그 속에 서 있다. 영화는 그렇게 어지로운 도쿄의 전철들 사이에 놓여 있는 젊은 두 남녀를 방해하지 않고 내버려둔 채 끝난다.


 <카페 뤼미에르>는 철도에서 시작해 거기서 끝난다. 경전철 한 대가 어둠을 가르며 저쪽에서 이쪽으로 넘어오는데, 거기엔 누가 타고 있는 것일까? 뒤이어 요코가 나오고 대만 여행 후 짐을 풀고 정리하는 그녀의 모습으로 볼 때, 공항에서 돌아오는 요코를 태운 차였을까? 그렇다고 한다면 영화 안에서는 나오지 않지만 가려져 있는 실질적인 출발점은 대만일 것이다. 요코가 경전철에 탄다는 과정을 가능하게 한 출발점인 대만. 그리고 영화의 중심 이야기들은 전부 그녀가 대만에서 가져온 것들을 풀어가는 방식으로 펼쳐지는 걸로 볼 때도 시작으로 대만은 중요하다. 꿈을 볼 때도 그렇다. 기억나지 않는 부분이 있기 마련인데 기억하고 있는 장면의 앞과 뒤가 뿌옇게 남아 있어서 도통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알고 싶다. 그럴땐 상상을 해본다. 꿈에서 왜 이런 상황이 됐는지, 그 전후 관계를 추측하다보면 이야기가 구체성을 갖게 되고 논점이 명확해진다.


 시작과 끝이, 비유하자면 머리와 꼬리가 똑같이 생긴 전철은 원형적 상징 중 하나인 우로보로스와 닮았다. 제 꼬리를 물고 있는 뱀. 하나의 방향으로 갈 때는 머리였던 칸이 반대 방향으로 움직일 때는 꼬리가 된다. 이대로 시간이 영원하다면 한치의 어긋남도 없이 하나의 길을 평생 오갈 수 있는 것이 전철이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지옥철'은 출퇴근길에 그 안에서 서로 낑겨대는 직장인들의 애환과 통증의 현상을 말하는 동시에 이런 식의 무의미한 생활을 영원에 가깝도록 반복해야 하는 것에 대한 우울함을 상징하는 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상징의 영역에서 우로보로스는 우주적 차원의 순환 또는 의식의 발달을 설명하는 데 사용되지만 도시의 철도와 혼재되는 순간 도시인의 생활을 은유하는 것으로 바뀐다. 교회를 다니던 시절, 자주 듣던 기도는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해달라"는 거였는데 그 말도 여기에 대입해 비틀면 "머리도 아니고, 꼬리도 아닌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의 시초에는 경이로움이 있다. 그리고 그 경이로움의 맹아는 완전히 지워지지 않고 어느 구석에든 남아 있다. 우리는 대개 그 단서를 유년시절의 경험에서 찾을 수 있다. 앞서 '우울한 편지'처럼 정리한 도시 철도의 현상은 단지 허탈함의 눈으로 볼 것이 아니다. 이건 내 생각이 아니라, 영화가 말하는 바다. 영화는 철도의 풍경을 보여주면서 그 이면의 숨겨진 힘을 다시 끄집어내려고 한다. 겉으로 드러나는 권태로움은 어쩔 수 없다. 카메라의 언어이자 시각 언어로 말할수밖에 없는 영화는 처음부터 형상을 뒤틀어버리거나 깨버리는 식으로 그 내부의 무언가를 밝힐 수는 없는 법이다. 그렇게 하면 나오는 것이 과도한 스펙타클이며 그로 인해 오히려 아무것도 볼수가 없게 된다. 그렇다면 그 이면의 힘이란 뭘까?


 조셉 캠벨은 어디서나 신화를 만날 수 있다고 했는데, 그때의 신화는 내가 마주한 현실과 같은 시간에 같은 공기로 호흡하며 형성되는 내면 깊은 곳의 이미지와 이야기들이다. 어느 시점에 기차, 전철도 신화적 형상을 갖출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를 다시 살아있게 만드는 이미지, 삶의 숨겨진 맥락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이야기. <카페 뤼미에르>의 전철은 익숙함의 외피를 사근사근 뚫어내며 신화적 감동을 선사한다. 그것에 가장 의식화되어 있는 인물이 하지메다. 비니를 쓰고 꼭 다문 입, 한 손엔 흡수 마이크를 들고 전철역을 오가며 소리를 기록하는 하지메. 군중의 인파가 오가는 거친 도시 내의 허브에서 그는 마치 보이지 않는 요정을 기다리는 소년처럼 자신의 시간으로 몰입한다.


 철도는 내게도 원초적인 기억이다. 이 영화의 제목에 담겨 있는 그 이름! 영화의 시초에 위치한 뤼미에르 형제는 열차가 들어오는 장면을 찍어 관객들에게 저돌적인 경험을 선사했다. 그것처럼 내게도 철도는 거인의 발자국처럼 위압적이고, 고요한 호숫가에 앉아 있는 것처럼 적요함이 양가적으로 결합된 원초적 기억을 담고 있다. 무성의 텐트 안에서 그 형상으로 박차고 들어오는 증기기관차의 돌진을 보는 기분이 어땠을까? 바깥에서 보는 전철은 철강의 집합체다. 철로 된 길, 철로 된 바퀴가 길을 만들고 위로는 고압선이 흐른다. 열차에 오르기 전에 보이는 플랫폼과 입구 사이의 틈이 내보이는 바닥의 어둠 또한 무섭다. 반면 전철 안에서는 고요해진다. 덜컹 덜컹 거리는 열차의 시그니처 사운드는 동일하지만 그 안에서 느끼는 규칙적인 진동 때문인지 마음이 편안하고 넓은 차창을 통해 보이는 끊임없는 풍경의 변화는 지루함을 밀어낸다.

 


 침묵하는 자의 근심 앞에 변형의 연금술이 일어나다

또 하나의 전철이 끝나고 내리는 자리에 아버지와 새엄마가 있다. 요코는 이제서야 마음 편히 누울 수 있다는 듯 엄마에게 감자조림이 먹고싶다고 말하고는 긴 낮잠을 잔다. 그리고 깊은밤. 모두가 잠든 시간 출출한 배를 안고 깬 요코는 그 소리에 자다 일어난 엄마에게 임신 사실을 밝힌다. 이 사실이 어떤 파장을 불러일으켰는지는 아버지가 달라진 모습에서 확인할 수 있다. 처음 그녀를 마중 나갔을 때의 아버지는 한없이 밝고 인자하지만 그 밤 이후의 아버지는 어색하게 웃고 입을 꽉 다문 채 허공을 보기만 한다.

 

 딸의 임신과 그 후의 일처리에 대해 영화 내내 아버지는 아무말도 않는다. 완벽한 회피다. 아내가 핀잔하듯이 그는 이런 식으로 곤란한 문제에 대처해왔을지 모른다. 그것을 무책임한 것이라 말할 수도 있지만, 나는 솔직하게 곤란함을 표현한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전혀 알 수 없는 상태에 빠진 자의 침묵으로 하는 자기 고백이 거기 담겨 있다. 그리고 그것이 적어도 내겐 익숙한 모습이다. 그건 나의 모습이며 나의 아버지의 모습이며 내가 본 뭇 아버지 세대의 모습이었다. "나는 이런 일을 경험해보지 못했어."라거나 "세상은 너무 빨리 변하니까 올드한 내가 이해하고 해결할 수 없는 일이 계속 터져."라고 시대와 나 사이의 격리를 말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도리어 우리가 치료와 해결에 이르는 본능과 단절된 것이 문제라고 말하고 싶다. 백석 시인이 절간의 소에 빗대어 말한 그 치유에의 본능('병이 들면 풀밭으로 가서 풀을 뜯는 소는 인간보다 영(靈)해서 열 걸음 안에 제 병을 낫게 할 약이 있는 줄을 안다고')이 우리에겐 메말라 있다.


 요코의 배 안에 있는 그 아기는 어떤 길을 가게 될까? 할아버지의 무기력함과 엄마의 고집 속에서 태어날 그 아이는 앞선 세대가 깔아놓은 레일 위에서 지금껏 오가던대로 다니며 과거의 병을 똑같이 아니면 더 심하게 앓지는 않을까? 아니라면 상상도 못한 새로운 방식으로 자기만의 길을 가게 될까? 여기서 다시 하지메의 세계로 돌아가보자. 하지메는 그래픽 디자인을 하나 작업중인데 역시 철도를 모티프로 하고 있다. 옆으로 누운 초록색 전철들이 포개지며 새 둥지를 수직으로 내려볼 때와 같은 배치를 이루며 그 안엔 작은 원이 만들어지고 태아가 누워 있다. 그림속 태아는 목에 회중시계를 걸고 있다. 그건 대만에서 돌아올 때 요코가 하지메에게 선물해준 대만 철도 개국 100주년 기념품을 연상시킨다. 그 그림은 요코의 임신 사실을 알기 후에 만들기 시작한 작품일 것이다. 하지메는 늘 이런 식이다. 가만히 그녀의 이야기를 듣거나, 그녀가 직면한 현실에 예술이라고 포괄적으로 말할 수 있는 우회로를 통해 마음의 여지를 만들어준다. 내 개인적 취향에서 하지메의 그래픽 디자인은 조금 무섭지만 요코는 호기심과 즐거움으로 그것을 바라본다.

 태어날 아기와 요코는 괜찮을 거다. 할아버지는 연약하게 자기 시대의 색 바랜 영광과 함께 퇴락하겠지만 그렇게 주어진 강철같은 세상의 재료들을 자기만의 손길로 재작업해서 둥지를 만들어주는 하지메가 있으니까. 철강 중심의 아버지 세대의 문명을 다른 성격의 무엇으로 변형시키는 하지메는 심리학에서 말하는 연금술사와 닮았다. 연금술은 실패한 과학이지만 성공한 심리학이라고 가스통 바슐라르는 말했는 바, 연금술이 하려던 황금 찾기의 원리는 물리적 현실에선 공상과 무모한 시도로 그쳤지만 우리 내면에선 정말 일어날 수 있다. 하찮은 것이 고귀해지고, 우월한 것이 비천해지기도 하며 극과 극이 그 사이의 간극을 넘어 변형이 된다. ‘마음 먹은대로’ 다 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가치의 전도를 일으키는 내면 차원에서의 변형은 뜻한 바와 다르게, 뜻한 바를 넘어서 일어난다. 마음의 차원에서 어른이란 그 일이 가능하도록 길을 안내하는 자이며 거기에 필요한 시간을 인내할 수 있는 사람일 것이다. 하지메는 그런 의미에서 어른의 역할을 묵묵히 해낸다.


 기억과 망각 사이에서 수행되는 의미 탐색, 뒤바뀐 아이를 찾아서

대만에서 돌아와 옷을 정리하는 요코는 하지메의 전화를 받는다. 그리고 꿈 이야기를 한다. 어릴 때 집을 떠난 엄마가 나오고 요코에겐 아기가 있는데 그녀가 한 눈 판 사이 누군가 아기를 그와 똑같이 생긴 얼음 아기와 바꿔치기 한 후 그것도 모르고 아기를 안았는데 가짜 얼음 아기가 그녀의 품 안에서 녹는 꿈 이야기. "혹시 이런 얘기 들어봤어?" 아무래도 꿈과 무의식을 중심으로 영화를 보는 이 글의 특성상 이 첫 장면은 사뭇 감동적이다. 이 하나의 상황을 통해 그들이 어떻게 교류하는지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꿈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지는데, 요코가 하지메의 책방에 찾아갔을 때 하지메는 그림책 한권을 준다. 꿈을 들을 때는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라고 생각했지만 알아보니 그런 이야기가 유럽 민담에선 오래전부터 있다는 걸 확인해서 그에 관한 책을 건넨 것이다.


 이 두 장면을 사이에 두고 영화의 타이틀 롤이 나온다. 이 글을 쓰며 곰곰히 그 흐름을 생각해보니, 아마 꿈을 소재로 한 대화가 무게감 있게 들어가 있어서 그런 것일텐데 영화 안에도 잠과 깨어남의 흐름이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타이틀 롤을 사이에 두고 그 이전의 요코의 통화 장면이 영화가 꾸는 꿈이라면 검은 화면 배경의 타이틀은 잠을 깨우는 자명종이 된다. 그리고 그 이후의 하지메와의 만남은 꿈을 해석하는 시간이다. 요코의 꿈, 요코라는 꿈이 뒤에 두고 있는 심리적이고 역사적인 배경을 밝히며 그 의미를 좀더 환하게 트이게 하기 위한 지난한 일상 속에서의 꿈 해석 작업이 펼쳐지며 영화는 깨어 있는 상태로 걷고 머물다 커피를 홀짝인다. 하지메가 준 그림책은 모리스 샌닥의 대표작 중 하나인 <Outside over there>이며, 영화는 책을 자세히 보여준다. 방 안에서 우유를 마시며 그림책을 낭독하다 잠이 든 요코는 자신을 버린 엄마에 대한 기억을 더 자세히 떠올리게 된다. 그녀는 뱃속 아기의 아빠인 대만의 남자친구와 결혼은 안하겠지만 대만의 음악가 지앙 원여가 일본에 남긴 발자취를 따라 취재를 한다. 또한 대만 여행에서 만난 회중시계를 하지메에게 기념품으로 선물한다. 부모의 눈에 아무것도 준비된 것이 없어 보이는 요코는 자기 자리에서 끊임없이 과거, 역사, 무의식의 통로를 따라다니며 뭔가를 찾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영화 초반의 새벽녘 경전철의 도래는 어슴푸레한 시간의 저편에서 넘어온 영적 존재의 방문을 보여주는 것 같다. 몸을 떠났던 영혼의 귀환이 일어난 것 같은 느낌. 꿈에서 가짜 아기를 안고 깜짝 놀랐던 요코의 영혼이 거기 있던 것은 아닐까?

 

 이 장면이 내 꿈이라면: 커피를 선물하다

요코는 어느날 하지메에게 커피를 선물한다. 그들이 서점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문이 열리고 유니폼을 입고 있는 커피 아저씨가 들어와 커피를 한잔 따라주고 간다. 잔 받침대를 내려놓고 그 위에 커피잔을 놓을 때 부딪히는 유리의 소리가 경쾌하다.

 

 커피 배달부가 남성이라는 것이 특이하다. “일본은 정말 그런가봐. 그러니까 나온 장면이겠지? 우리나라는 커피배달하면 떠오르는 건 다방 아가씨들이잖아. 그러고보니 <아사코>에서도 여주인공이 남주인공의 회사에 배달갔던 커피 식기를 회수하러 가는 장면이 있었는데 거기선 여자가 그런 일을 해서 특이하다고 생각을 못했던것 같아.” 각각의 문화에 따라 성 역할이 어느정도 고정돼 있는 일들이 있는데 이 꿈에서는 남성 배달부의 등장이 나의 통념을 뒤집는 지렛대가 된다. 모든 것이 배달이 되는 우리나라지만 배달대행 업체를 통하지 않고 이렇게 근거리에서 옷을 차려입은 사람이 보온병에 커피를 담아서 카페에서 대접하는 것과 같게 잔까지 준비해서 오는 엣지 있는 이런 커피 배달은 우리에게는 없는 풍경이다. 이런 꿈을 꾼다면, 나라가 특정되지 않아도 “거긴 아마 우리나라는 아니었던 것 같아”라고 말했을 것이다. 장소나 말이 아니라 특정한 문화적 풍경으로 내가 있는 곳을 추측하게 되는 것이다.

 

 하얀 잔 안에 또르륵 담긴 영롱한 검은 액체가 찰랑인다. 요코라는 나의 특정한 여성의 호명으로 찾아온 아저씨가 전달해준 차 한잔은 지금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약속도 없이, 기별도 없이 누군가에게 대접을 받아본 적이 언제였더라. 유럽의 티 타임(tea time)이나 일본의 다도(다도)에 관해 들을 때면 메마르고 탈진하기 쉬운 이 시대에 쉼을 위한 자리를 적절하게 유지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으며 부러웠다. 그런 문화적 양식처럼 지속적으로 유지가 되는 마음의 여가는 아니지만 이 한 순간의 커피 한잔은 그런 여가를 축소하거나 간략하게 하는 식이 아니라 제대로 선물받는 것같은 기분을 느끼게 한다. 일회용잔이나 텀블러를 이용한 테이크 아웃(Out) 아니라 한잔의 커피를 한 곳에서 다른 한 곳으로 온전히 테이크 인(In) 함으로 나도 내 마음속 고요한 호수같은 따뜻한 심연으로 In 한다.

 

 꿈이라는 마음의 무대에서 만난 우리 두 사람은 그렇게 존재의 필요를 채워준다, 무리하지 않고.


 내 척추를 일으켜 세우는 첫 기억의 빗줄기. 글을 닫으며.

 그게 무엇이 되었든, 처음을 이야기하는 것은 그것을 말하는 지금의 나와 상호작용을 일으키며 처음은 처음으로만 남지 않고 지금의 나를 반영하고 대변한다. 추억의 초콜릿상자에서 취향에 맞는 것을 골라 먹는 것과는 다르게 무언가 처음을 콕 집어 말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던 건, 심리학자 알프레드 아들러였다. 그는 인생의 첫 기억을 상담의 중요한 지렛대로 삼았던 것인데, 상담의 현장 바깥에서도 그 질문은 적절한 자기 탐색의 축이 될 수 있다. 여기서 처음은 선형적 시간의 맨 앞을 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으로 내가 시작됐다고 할수밖에 없는, 내가 그렇게 말할수밖에 없는 처음이다. 그리고 그것을 꼭 인생이라는 큰 통에만 한정짓지 않더라도 ‘당신의 그것의 처음’은 어땠느냐고, 정확히는 지금 어떻게 떠올리느냐고 묻는 것은 좋은 질문이 될 수 있다. 


 답은 돌진하는 미래파적 행동주의의 선언 류로 응결하기 쉽지만 질문은 돌아보고 살피는 자기 탐색의 지침이 된다. 인생과 같이 그것은 미결된 채로 다른 가능성에도 항상 약간의 문을 열어두고 있기에 불안정하지만 기회와 이어져 있다. 우리 불안하고 연약한 삶에는 완벽한 답이 아니라 적절한 질문이 더 필요하다.


 내게 그 중요도에 있어서 맨 앞자리를 차지하는 영화의 첫 경험은 무엇이었을까? 


 비 오는 날이었다. 여름이었고, 나는 어렵게 구한 한 편의 영화를 USB에 넣어 TV에 꽂았다. 침묵과 어둠 속에서 영화가 시작. 어둠은 이내 밝아졌지만, 침묵은 계속 이어졌다. 무성 영화였다. 리모컨으로 아무리 볼륨을 높여도 소리는 한방울도 떨어지지 않았다. 밖에는 계속 비가 내리고 있었다. 소리가 시원했다. 통속적인 연애물이었던 그 영화는 1920년대 나온 일본 영화였다. 소리가 제거된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소리가 없이 만들어진, 소리가 담기지 않는다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며 만들어진, 그렇기 때문에 그때에는 '무성 영화'라고 말할 것이 아니라 그냥 그것이 영화였던 시대에 그런 태도 안에서 만들어진 영화를 보고 있는데, 어느 시점에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렇게 고요하면서도 활달하고 아름다우면서 평범할 수가 있나. 특히 그 흰 손의 움직임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 후로 나는 종종 유투브에서 무성 영화들을 찾아보게 됐다. 비 오는 날의 그 일본 영화는 오즈 야스지로의 <B선상의 여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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