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이 나를 읽는다-『기러기』(메리 올리버 시선집, 마음산책)
그녀는 분명, 살아생전에 매일 아침마다 작은 유리잔에 한잔의 아침 햇빛을 따라 마시며 그날의 삶을 시작했을 거예요. 이 세상을 떠났지만 그 후인 지금까지도 그녀는 또 다른 그녀의 세계에서 그 루틴만은 꾸준히 지키고 있을 거예요.
그대는 이 세상을 사랑하는가?
그대의 소박하고 비단결같은 삶을 소중히 여기는가?
공포를 딛고 선 초록 풀을 숭배하는가?
- '작약'에서
메리 올리버의 시는 나팔이나 호른같은 그 앞이 쩍 벌어진 금관 악기같아요. 감상적이고 얌전한 서정에 물들지 않은 그 예찬적 태도 안에서 그녀의 시어들은 거짓이나 왜곡 없이 청중과 독자에게 전달됩니다. 거기엔 상징과 은유를 꼬아 만든 고도의 시적 구성도 없기 때문에 섬세한 독서는 필요 없어요. 우리는 그녀의 경탄에 동참할 준비만 돼 있으면 돼요.
나 평생
좀이 쑤셨지-
반들반들한 윤기보다
무결함보다
집에 머무는 것보다
더 경이로운 무언가가 있을 것만 같아서.
그게 무언지 알지도 못하면서.
- '쇠고둥'에서
삶이 아니라 생명! 메리 올리버의 시에서 '나' 곧 그녀는 어마어마한 생명의 무대를 거닐 수 있는 티켓을 받아 한정된 기간 동안 어디든 다닐 수 있는 특권을 받아 행복에 겨워 어쩔줄 모르는 어린이와 같아요. 그녀의 시 속 화자는 사회적 자아가 아니라 자연이 낳은 모든 생명체들의 크고 작은 움직임과 생존의 그물망 안에서 장조의 멜로디를 알아들을 수 있는 감식안을 가진 산책자예요.
하지만 그것은 단지 자연 앞에 겸허나 숭배에 그치지 않아요. 그녀의 언어는 또한 무엇보다 저항자의 언어입니다. 우리의 길들여짐에 대한 무정부주의적 과격한 저항이나 현대에 오며 점점 쌓여있던 오염과 훼손의 엔트로피가 폭발 직전에 온 현실에 대한 반성적 저항이 아닌, 이 창조적 세계에 대한 긍정이 무한 긍정의 끝에 자연스럽게 배출되어 나오는 살아감에 대한 말들은 의식적인 저항 없이 저항적 언어로 행사가 된다는 데에서 메리 올리버의 시는 저항시이기도 해요.
그리고 난 더 이상 쓸모 있는 존재,
온순한 존재가 되고 싶지 않아,
들판의 아이들을 문명의 교과서로 인도하고
그들이 풀보다 낫다고(못하다고) 가르치고 싶지 않아.
-'비'에서
우리가 기적적으로
우리 둘 다 아는 언어를 발견한다 한들,
오렌지빛 이른 아침
올빼미의 휴식 시간에,
나 올빼미에게 무슨 용기, 무슨 가치 있는
말을 할 수 있을까?
-'오늘 아침 또다시 소나무 숲에서'에서
문학은 곳곳에 미처 빼지 못한 찌꺼기처럼 끼어서 썩어가는 인간의 고통에 주목해야 한다고, 그리고 그것이 환부 하나를 도려내는 것보다 훨씬 깊은 뿌리를 품고 있으며 그와 연관된 인간들의 세상에 구원과 혁명은 꿈에 가깝고, 그런 우리가 처한 존재의 암흑을 치열하게 볼 수 있는 힘과 기술을 길러주는 것이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이번에 메리 올리버의 이 시선집을 읽으면서 알게 됐어요.
'고통에서'가 아니라 '고통에(으로)' 눈을 돌리게 하는 것이 문학의 내적 동기여야 한다고, 일정 부분 당위적으로 사고했던 것입니다. 반면 자연과 생명을 노래하는 시는 그것이 아름다운 한곡의 노래는 될 수 있지만, 어느정도 도피일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는 생각도 해왔지요. 그런데, 메리 올리버의 이 시들 앞에서 저의 그런 생각이 얼마나 단순한것인지, 또한 내가 그런 생각으로 살아왔다는 것도 알아챌 수 있었어요. 메리 올리버가 차곡차곡 쌓아두고 떠난 이 시들의 세례 받으며 어쩌면 저도 "아침이 오기까지 더 나은 것으로 변"했을지 모르겠습니다.
'숲에서 잠이 들어'
땅이 나를
기억하는 듯했어, 땅이
그 검은 치마 매만지고, 주머니엔 이끼와
씨앗 가득 담고 나를 고이 거둬 갔지.
그런 잠은 처음이었어,
강바닥의 돌멩이 같았지,
별이라는 흰 불들과 나 사이엔 아무것도 없고
내 생각들만 있었지, 생각들이
완벽한 나무들의 가지 사이로
나방처럼 가벼이 떠다녔지. 밤새
나는 주위의 작은 왕국들이 내는 숨소리를 들었지,
어둠 속에서 제 할 일을 하는
곤충들, 새들. 밤새
나는 물속에 있는 것처럼
빛나는 운명과 씨름하며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했지. 아침이 오기까지
여남은 번은 사라져
더 나은 것으로 변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