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하는 나무, 토템폴
알래스카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주제가 많지만,
오늘의 이야기는 아마도 이 브런치북에서 가장 나누고 싶었던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죠 할아버지와 수지 할머니 집에 가는 날이다.
죠 할아버지는 올해 81세인 클링깃 원주민이고, 할머니는 백인이다. 두 분은 알래스카 앵커리지의 한 대학에서 만나 사랑에 빠졌고, 네 명의 자녀와 입양한 두 명의 아이까지 여섯 아이를 키웠다.
할아버지 집은 삭스만 빌리지(Saxman Village)라는 작은 원주민 마을에 있다. 우리 집에서 차로 5분 거리이다. 삭스만으로 들어가는 길목에는 양옆으로 토템폴이 줄지어 서있다.
처음 보는 사람은 ' 장식용 조각상'쯤으로 여길지도 모르지만, 토템폴(Totem Pole)은 단순한 기념물이 아니다. 그것은 공동체의 역사이고, 정체성이며, 살아 있는 이야기이다.
알래스카의 클링깃, 하이다, 심시언 부족들은 오랜 세월 동안 거대한 레드 시더 나무에 자신들의 전설과 삶의 기록을 새겨왔다.
토템폴에는 곰, 독수리, 까마귀, 범고래 같은 동물들이 조각되어 있다. 이들은 단지 장식이 아니라 각 부족과 가문을 상징하는 존재들이다.
까마귀는 창조자이자 장난꾸러기로, 변화와 지혜를 의미하고, 독수리는 용기와 고귀함을 상징한다. 곰은 보호자이자 강한 지도자, 범고래는 가족애와 영혼의 안내자이다.
토템폴은 한 나무의 삶이 끝나는 자리에서, 한 부족의 이야기를 다시 시작한다. 먼저 건강한 레드 시더 나무를 고르고, 공동체의 장로들이 어떤 이야기를 담을지 결정한 후, 장신이 손으로 조각하고 색을 입힌다.
그리고 기둥을 세우는 날,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축제를 연다. 춤과 노래, 음식이 어우러지는 축제 속에서, 하나의 토템폴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다. 그것은 단지 나무가 아니라, 주상과 후손을 잇는 징표, 공동체의 자존심이다.
하지만 이런 전통은 한 때 철저히 부정당했다. 19세기말, 미국 정부는 토템폴을 '우상 숭배'로 간주해 파괴하거나 세우지 못하게 했고, 많은 기둥이 불타거나 땅에 묻혔다. 그 시기, 원주민 아이들은 영어만 사용하도록 강요받았고 전통 언어와 문화는 잊혀 갔다.
그러나 지금은 알래스카 곳곳에서 젊은 원주민 예술가들이 다시 토템을 조각하고 있고 잃어버렸던 언어를 복원하고, 이야기와 춤, 노래를 되살리려는 노력들이 일어나고 있다.
죠 할아버지와 수지 할머니도 언젠가는 집 앞에 토템폴을 세우고 싶어했다. 하지만 토템폴을 세우는 가격이 생각보다 비쌌다. 지금이라도 당장 세우고 싶지만 그 금액이 모여져야 가능하다. 언젠가는 할아버지 집 앞에도 토템폴이 꼭 세워지길 바래본다.
우리가 죠 할아버지 집에 갔을 때 신기한 조형물을 봤다. 까마귀와 독수리 형상을 한 작은 모형이었다. 바로 위에 있는 사진이다.
나는 궁금한 마음에, 이게 뭔지 물었다. 죠 할아버지는 눈을 반짝이며 설명해 주었다.
"이건 우리 가족을 나타내는 거야. 나는 독수리 클랜이고, 수지는 까마귀 클랜이지.
우리 아이들은 엄마의 클랜을 따라가서 까마귀 클랜이야. 결혼을 할 때는 반드시 다른 클랜, 즉 독수리 클랜 사람과 결혼해야 해, 그렇게 자녀를 낳으면 아이들은 다시 엄마의 클랜을 따르게 되지.
결혼할 때도 마찬가지야. 결혼은 딸이 아니라, 엄마가 결정해. 심지어 이혼도 엄마가 결정하지."
이 작은 모형들은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가족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굉장히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죠 할아버지는 계속해서 클링깃 전통을 들려주었다.
"예전에는 아이가 태어나면 부모가 직접 키우지 않았어. 남자아이는 삼촌이, 여자 아이는 이모가 키웠지.
두 살 때부터 결혼할 때까지 삼촌이나 이모 집에서 자라는 거야. 삼촌과 이모의 말은 법과 같았어. 아버지는 다른 부족이기 때문에 간섭할 수가 없었지."
나는 조심스럽게 다시 물었다.
"왜 부모가 직접 키우지 않고 삼촌과 이모가 키웠어요?"
할아버지는 천천히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 부모는 아이에게 너무 약하지. 부모가 키우면 자녀들이 때론 버릇없이 굴고 반항할 수도 있잖아.
하지만 삼촌이나 이모 밑에서 자라면 부모에게 하듯 쉽게 반항하지 못해. 그리고 삼촌과 이모는 부모보다 더 냉정하게 아이를 훈육할 수 있지. 그렇게 자녀들이 예의 바르고 반듯하게 자라도록 한 거야."
어느 정도 이해는 갔지만 부모 품이 아닌 다른 친척의 손에서 자란다는 것은 낯설고 힘든 일일 것 같았다.
죠 할아버지는 자신이 부모님에게 직접 양육된 첫 번째 세대라고 말했다.
"1937년에 클링깃 부족에서는 부모가 자녀를 직접 키우기로 결정했지. 백인 사회에서 경쟁하려면 그들처럼 살아야 한다고 믿었어. 그 결정은 부족 사회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어."
하지만 그 선택은 뿌리와의 단절을 가져왔다.
"내 자녀들은 클링깃 언어를 모르고, 손주들은 자신의 뿌리가 어디인지조차 모른다네."
그 이야기를 하는 할아버지 눈빛에는 깊은 슬픔이 서려 있었다. 그것은 단지 한 가정의 문제가 아니라, 한 민족의 역사였다.
알래스카 원주민들이 겪은 고통 중 가장 깊은 상처는 '기숙학교 시스템'이었다.
19세기말부터 정부와 선교 단체는 원주민 아이들을 부모에게서 떼어내 기숙학교에 보냈다. 그곳에서는 전통 언어와 옷, 종교, 이름까지 모두 버려야 했다. 아이들은 머리를 잘리고, 영어 외의 언어를 쓰면 매를 맞았다. 그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에서 왔는지를 잊어갔다. 지금에야 비로소 클링깃 문화를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지만, 할아버지가 아이였을 때는 그런 이야기조차 할 수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상실의 기록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지금 이곳 알래스카 원주민 공동체에서는 그들의 언어를 되살리기 위한 노력을 이어가고 있다. 일부 학교에서는 원주민 언어 수업이 다시 시작되었고, 죠 할아버지도 앵커리지 주간 모임에 나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단어들을 나누고 있다.
그리고 손주에게 클링깃어 인사말을 가르쳐주며 말했다.
“Yak’éi(야크에이) 안녕하세요, 반가워요라는 뜻이야.
근데 이 말속에는 ‘당신이 여기 있어 참 좋다’는 마음이 담겨 있단다.”
그 말처럼, 나 역시 지금 죠 할아버지와 수지 할머니 곁에 있을 수 있어 참 좋다.
그리고 이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이 글을 쓰는 나도 따뜻한 ‘환영’을 받은 기분이다.
언젠가 죠 할아버지의 손주들이 그 말의 뜻을 이해하고, 그 말로 서로 인사하며 웃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그리고 이 땅의 그들의 언어가 다시 울려 퍼지고, 사라졌던 이름들이 하나씩 되돌아올 수 있기를...간절히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