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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 사람 Aug 29. 2024

우리 모두의 축제


  검은 반팔 카디건에 베이지색 스커트를 입기로 정했다. 나이 오십에 면접이라니! 무슨 영화 속 장면처럼 남의 일 같으면서도 다음 장면이 기다려진다. 나의 이력서에는 이력이 될만한 게 없어서 조금 난처해졌다. 아이들과 근 십오 년을 떠들고 놀고 뭔가를 주고받았는데 한 줄로 증명될 수 없다. 나의 이력이란 가상의 시간에서 존재하는 것일까. 그럴 것이 나도 그때의 날들이 꿈같긴 하다. 어쩔 수 없이 비고란에 개인 봉사라고 적어두며 혼자 얼마간 오묘해진 마음의 풍선을 불어댔다. 실은 지금의 생각이지만, 조금 신경을 썼더라면 얼마든지 나랏돈을 받으면서 경력을 채워나가며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었을 테지만 나는 전연 그런 생각이 한 줄도 없었다. 그래서 이 기회가 자격 미달로 엔딩 되더라도 내 인생의 또 한 번 멋진 한 장면이 지나갔다고 여길 것이다. 남들과 똑같지 않다고 해서 같은 방식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있었던 일이 없던 일이 되는 건 아니니까. 어떤 진실은 무지개 너머에서 빛이 어둠을 관통하기를 기다리며 비에 젖어 지내는 시간이 존재하니깐. 나는 이 모든 것들을 가슴에 묻고 교무실로 들어섰다. 이미 와계신 두 분의 선생님은 얼굴만 봐도 엄청난 경력의 소유자임이 분명했다. 나는 아직 덜 자란 어린이 같은 마음과 너무 웃자라서 요령껏 피하고 싶어진 초조함 사이에 앉아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세숫대야 같은 크기의 쟁반에 담겨 나온 냉면은 나 같은 사람 열명은 나눠 먹어도 될만한 양이었다. 엄마, 아부지, 나. 이걸 다 어떻게 먹지? 말은 안 해도 각자 머릿속 말풍선은 같을 것 같은 표정으로 흡입하기 시작했다. 엄마, 다음엔 여기 오지 말자. 이건, 해도 해도 너무 많잖아. 음식은 절대 남길 수 없다던 엄마는 기어코 국물까진 마시지 못했다고 한탄하시며 부른 배를 진정시키느라 대충 고개를 끄떡였다. 이눔아, 한 시간 지나면 다 꺼진다. 뒤따라 오시던 아부지가 청년처럼 웃으며 말했다. 엄마랑 나랑 아부지랑 강둑을 걸어서 집으로 오는데 배도 부르고 바람도 불고 나른해지기도 해서 무척 행복했다.





합격했다는 전화를 받고 웃음이 났다. 재밌기도 하고 이제부터 어떡하지 막막하기도 했다. 대단한 도전이라고 할 수도 없고 쟁쟁한 경쟁이랄 수도 없는 지극히 개인적인 작은 에피소드 하나에도 합격이란 말은 새롭고 뿌듯하다. 따지고 보면 시간당 알바에 지나지 않는 이 일을, 이제 낯설고 새롭게 익혀야 하는 일들이 꺼려지는 지금의 내게 와준 것에 대해 나는 나를 되돌아볼 것이다. 그러고 보니, 얼굴들이 떠오른다. 나를 믿고 아껴준 소중한 사람들. 그땐 그렇게 스치고 말면 그만인 줄 알았는데 그게 다가 아니었다. 우리는 각자 사는 것 같지만 한 곳으로 흐르는 큰 강물처럼 결국 먼 풍경처럼 섞여 흘러간다. 흐르는 대로 흘렀다고 생각하며 나는 유유히 나이들고 싶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이 영원하진 않을 것이고 나를 떠밀며 물줄기는 끊임없이 흐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생은 모두의 축제임이 분명하다. 새롭게 만날 이후의 사람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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