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야 【환상의 빛】

by 글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에스미 마키코 주연 (2016년)


빛은 영화 전반을 아름답게 비쳐준다. 화려한 장면이나 대사보다는 빛으로 말한다. 유미코는 이쿠오와 재미있게 살고 있다. 3개월 된 아기를 키우며 바이크를 초록색으로 칠하고 소소하게 아기자기하게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여자는 연락을 받는다. 남편이 철도 위를 걸어가다 열차에 깔려 죽었다고.




유미코의 엄마가 와서 아기를 돌보며 딸이 심리적으로 안정되게 도와준다. 옆집 부인이 유미코에게 타미오를 소개해준다. 오사카로 아이를 데리고 간다. 엄마와 이별하는 플랫폼. 유미코도 엄마도 울지 않는다. 헤어지는 순간에 이들은 감정이 없는 건지, 감추는 건지 슬픔을 내색하지 않는다.




도착한 곳은 바다마을. 파도가 세게 치면 집안으로 바닷물이 들어올 것도 같다. 여자와 남자는 서로에게 잘 적응하며 산다. 남자에게도 딸이 있다. 그들의 아이 둘은 서로 잘 어울려 논다. 호수 옆을 걸으며 장난도 치고 서로를 잘 챙겨준다. 남자의 아빠는 늘 바다를 응시하며 멍하게 앉아 있다. 아무런 변화나 갈등도 없어 보인다.


어느 날 유미코는 다다미방 앞에 앉아 술 취해 돌아온 남편을 비난하며 묻는다.


“거짓말쟁이! 아버님이 혼자 계셔서 오사카에서 돌아왔다며. 다 들었어. 전 부인과 재혼하려고 돌아왔다며? 많이 사랑했다며? 그런 마음으로, 왜 나랑 결혼했어?”


남자는 그런 얘기는 지금 할 얘기가 아니라며 외면한다. 다음날, 이웃의 장례식 행렬을 따라가는 여자. 그 뒤를 남자가 따라간다. 여자가 다시 울며 말한다.




여자: “모르겠어, 전 남편이 왜 죽었는지, 왜 철로를 걸었는지? 정말 모르겠어.”

남자: “누구에게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야”




익스트림 롱숏(extreme longshot) 으로 그들의 모습은 서서히 작아지며 영화는 끝난다.




누구에게나 벌어질 수 있는 끔찍하고 어두운 일이 있다. 그러나 빛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빛으로 어둠을 태우며 살아갈 수 있다. 조심스럽게 해석해 본다.




젊은 나이에 남편이 자살했으니 유미코의 심정이 어땠을까? 사건 직후에는 그녀의 눈물 한 방울도 엿볼 수 없다. 엄마와의 이별 장면에서도 그렇고,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니 더 슬프다. 누구 하나 울부짖거나 아픔에 대해 소리 내어 말하지 않는다. 다다미방에 앉아 테이블을 한 없이 바라보거나 바다를 바라본다.




남자들은 담배를 태운다. 소리 내 봐야 이미 벌어진 일은 어쩔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걸까? 불안한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을 몰라 잠잠히 있는 걸까?




누구에게나 벌어질 수 있는 일이라고 남자는 담담하게 말하며 여자를 위로한다. 그보다 더한 위로가 있을까? 그나마 자신의 감정을 조금이라도 표현하는 이는 여자뿐이다. 아무런 전조도 없고 힘들다는 얘기도 없었는데 남편은 왜 자살을 했을까? 부인도 전혀 눈치채지 못한 남자의 심리. 무엇이 그를 자살에 이르게 했을까?




한창 옹알이하는 아기가 마냥 귀여운 행복한 가정을 이루었음에도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 원인은 무엇일까? 여자는 끊임없이 생각했을 것이다. 다시 가정을 이루어 문제없이 살고 있지만 생각을 지울 수 없었을 것이다. 새 인생을 산다고 해서 아픈 추억이나 상처가 깨끗이 없어지는 건 아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전 남편의 죽음. 남편의 내면에는 어떤 변화와 결심이 들어찼던 것일까?




부부지만 서로 독립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모든 걸 속속들이 알 수 없다. 특히나 남자들의 경우 시시콜콜 내면을 드러내 보이기를 꺼려하는 사람들도 많다. 수다를 떨지도 않고 혼자 고민한다. 행동은 갑작스럽지만 내면에는 오래 전부터 무엇인가가 진행되고 있다. 기승전결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타인의 내면은 얘기하지 않으면 들여다볼 수 없다. 같이 사는 부부에게 상대방의 죽음이 끼치는 충격은 크다. 행복한 가정을 새로 이룬다고 해도 여자의 가슴 한 구석에 도사리고 있는 전 남편의 그림자. 의문. 그의 아이를 키우고 있으니 아들을 보면서 계속 전 남편이 생각날 거다. 아이가 성장하며 남편의 모습이 보이면 더욱 생각나지 않을까?




여자의 심각한 질문에 타미오는 아무렇지 않게, 무심하게 대답한다. 마치 늘 들어왔던 질문이라도 되는 듯이.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야’




무거운 주제도 가볍게 해석해버리면 아무것도 아닌 게 된다.

‘누구나 실수할 수 있어.

누구나 실패할 수 있어.

누구나 아플 수 있어.

누구나 이혼할 수 있어.

누구나 직장을 잃을 수 있어.

문제 삼지 않으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으니 잊어버려.

새 가정을 이루었으니 우리에게 집중하며 살자’




전 부인에 대한 질문도 이 말로 일축해버린다. ‘그래, 전 부인을 사랑했지만 이제 당신과 살고 있잖아. 그러니 그런 질문은 의미가 없어. 전 부인을 사랑했다든지, 다시 함께 살려고 했다든지 등의 비난이 무슨 소용이야.’라고 남자는 말하는 듯하다.




추운 겨울 바다처럼 시린 영화지만 곳곳에 빛이 있어 영화는 따뜻함으로 기억된다. 정박해 있는 작은 조각배 안. 할아버지 배 위에 누워있는 작은 꼬마 손자. 둘은 눈을 감고 햇빛을 받고 있다. 잊히지 않는 장면이다. 환상의 빛이 그들을 비추고 있다.



-이미지출처: 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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